소설리스트

마법소녀 최면물-96화 (96/299)

< 96화 > 준비 (4)

“팀장님 오늘 휴가 내신다던데?”

“갑자기 왜…? 혹시 어제 피곤해 보이셨는데 아프셨던 거 아냐?”

“아…하긴, 그래서 갑자기 돌아가셨나 보다.”

지하철에서 시에나와 섹스하며 출근한 나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조금 당황스러운 얘기를 들었다.

어제 그레이프에게 건 최면을 수정하고 기분 좋게 집에 돌아와 잠든 뒤 가벼운 마음으로 출근한 건데, 대체 그사이 또 뭐가 잘못된 건지 그레이프가 휴가를 내 버렸다.

“야! 너희 말이야! 팀장이 없으면 더 빠릿빠릿하게 일해야 되는 거야! 어! 알았어?! 대답 안 해?!”

“예….”

“대답에 혼이 담겨 있질 않잖아! 기운이 없어 아주, 아침도 안 먹고 출근했어? 그리고 엘리베이터 손잡이 부순 건 누구야! 지금 그것 때문에 회사가 아주 난리야 난리! 기물파손이라고!”

“일단 저희는 아닙니다. 그리고 그 정도로 난리는 아니던데요….”

“회사를 자기 집처럼 생각하면 자기 집처럼 아낄 줄도 알아야지, 일만 하고 돈만 받아가면 그게 회사야? 돈 주는 호구지! 다들 회사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회사에 자신이 이바지한다는 생각으로….”

팀장인 그레이프가 없으니 곧바로 부장이 이때다 싶었는지 날뛰며 직원들을 타박한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직원들이 몰래 대화하는 채팅방에 부장을 욕하는 얘기가 전혀 올라오질 않는다.

다들 일할 기분이 안 나는지 아무런 대화 없이 일만 하고 있다.

그레이프가 없는 것만으로 사무실 분위기가 엄청나게 조용해졌다.

“수고하셨습니다.”

“과장님, 식사….”

“응? 아냐, 먼저 가.”

다른 직원들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한 나는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옥상으로 올라가 그레이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레이프에게 또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인지 걱정되어서 불안한 마음을 참을 수가 없다.

최면을 수정할 때 뭔가 놓친 게 있었나 싶어 정말 혹시나 하고 전화하자 그레이프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전화를 받았다.

[하아…하아…하아….]

“…그레이프?”

[여, 여보세요?! 앵거 씨…? 하아…무, 무스은…일이세요?]

[탁, 탁, 탁, 탁]

전화 너머로 그레이프의 숨찬 목소리와 함께 뭔지 알 수 없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온다.

걷는 것 같기도 하고…뭔가를 떨어뜨리는 것 같기도 한 묘한 소리다.

맨발로 집안에서 뛸 때의 소리와 조금 닮았다.

“오늘 회사 안 오셨길래 무슨 일인가 해서…어디 아프세요?”

[안, 아파요오…! 멀쩡, 해요…! 하아…! 하아…!]

[투둑, 토도독, 톡]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이번에는…빗방울이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난다.

…그레이프의 거친 숨소리가 멈추질 않는다.

“바빠요?”

[바, 바쁜…건가아…? 바쁜 것 같아요…어제부터, 어젯밤부터…계속?]

“밤새운 거에요?”

[네, 네에…하아…하아…읏…! 하아, 아아아아….]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고, 그레이프가 아쉬워하는 목소리로 길게 한숨을 내쉰다.

무척 힘들어 보이면서도 개운해 보이는…묘한 목소리다.

나는 정말 혹시나 하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 뭐 해요?”

[지, 지금…그게…! 지, 지원! 지원 왔…어요, 마법소녀, 니까….]

[철썩, 철썩, 철썩, 철썩]

“이 소리는 뭐에요?”

[이건…그러니까, 스, 슬라임…잡는, 중이에요!]

나는 그레이프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프는 상위권 마법소녀고, 어젯밤 갑자기 과장하고 술을 마시러 가지 않고 돌아가야 했던 것도 지원을 가야 해서 그랬던 거라면 말이 된다.

지금 들리는 철썩철썩 하고 슬라임이 뛰어올랐다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도, 토도독 하고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도, 턱, 턱 하고 동그랗고 부드러운 뭔가가 빠르게 두들겨지는 소리도…전부 슬라임을 상대하고 있다는 말이 되는 얘기다.

“근데 왜 소리가…때리는 소리가 나요?”

[날, 상할까봐…! 맨손, 으로…던지고, 있어요…!]

슬라임은 산성을 가진 괴수다.

그레이프의 검, 크리스탈 소드는 특수주문을 해서 만든 비싼 검이다.

산성에 날이 상하는 게 싫어서 맨손으로 던져 핵을 부숴 잡을 수도 있다.

그레이프는 맨손으로 슬라임을 잡아 던지는 게 가능한 수준의 강력한 마법소녀다.

[읏, 읏, 흐으읏…흐으윽….]

[찌걱찌걱찌걱찌걱]

“…이건 무슨 소리에요?”

[아, 아앗…그게, 하이브리드, 하이브리드…돌연변이 킹 슬라임 있어서, 잠깐, 빠르게 비틀어서 잡느라…손에서 도망, 쳐서어….]

“숨이 많이 차요?”

[조금…좁은 곳에서, 산소 부족해서 그래요…! 후읏…후우우…읏…!]

킹 슬라임은 촉수와 합해지며 투명한 젤리가 이리저리 얽혀 왕관 형태로 변한 슬라임을 말한다.

그레이프 정도라면 손으로 촉수를 잡아 집어 던져 처리할 수 있다.

미끄러워서 잡는 걸 고생하기는 하겠지만, 충분히 가능하다.

“슬라임이 많아요?”

[네에엣…! 빨리, 처리하고 가려고 했는데…많이, 쌓였나 봐요…!]

[쯔븝쯔븝쯔븝쯔븝]

“…어제부터 계속 잡은 거죠? 그렇게까지 많은 거에요?”

[그건, 그게에…자, 잡은 줄 알았는데 재생해서! 뭔가, 뭔가 끝이 잘 안 나네요…! 저도, 끝내고 싶은데엣…! 읏…!]

아무래도 평범한 슬라임은 아닌 것 같다.

재생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돌연변이 슬라임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그정도는 되니 그레이프에게 지원요청을 했을거고…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싸우고 있다니 그레이프가 휴가를 낼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슬라임이 슬라임이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레이프가 전화를 받고 있고, 휴가를 쓰겠다고 연락한 것만 봐도 어렵거나 여유가 없는 상대는 아니다.

정말로 단순히 재생속도가 빨라서 처리하기가 귀찮을 뿐인 슬라임인 것 같다.

“위험한 건 아니죠?”

[안, 위험해요옷…! 전혀엇…! 읏…!]

“뭐, 슬라임한테 그레이프가 지지는 않겠죠.”

[네에에엣…!]

[쯔으윽…뽀옥! 쯔으윽…!]

킹 슬라임이 그레이프의 손에서 벗어나기라도 한 것인지 끈적끈적하고 미끌미끌하게 젖은 무언가가 꽈악 조여진 고리에서 빠져나오는 소리가 난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잡은 듯 쯔윽쯔윽 하고 젖은 뭔가를 잡아 비틀어 조이는 소리가 이어진다.

나는 전화를 하는 게 그레이프에게 방해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곧바로 인사하며 전화를 끊었다.

“바빠 보이네요, 끊을게요.”

[앗, 잠깐, 앗…! 앗…!]

전화를 받으며 잠시 오해했지만, 얘기를 들어보니 내 생각이 틀렸던 것 같다.

혹시 최면이 아직 잘못되어 있나 하고 전화를 걸어본 건데, 걱정과 다르게 마법소녀 그레이프로서 너무 바쁜 상황이어서 휴가를 쓴 것뿐이었다.

지친 듯 숨을 헐떡이고 뭔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너무 야릇하게 들려서 나도 모르게 너무 이상한 상상을 해 버렸다.

그레이프가 어젯밤부터 밤새 자위하다가 만족하지 못해서 휴가까지 쓰고 나랑 전화하면서까지 자위해댄다는 상상은 좀 너무 이상하긴 하다.

왜 그런 바보 같은 상상을 한 건지 모르겠다.

아무리 자위영상을 SNS 비밀계정에 올리는 변태적인 취미가 있는 마법소녀라고 해도, 밤새 자위하고 또 자위하느라 출근도 안 하고 휴가까지 써놓고 계속해서 자위해서 점심시간에 부하 직원하고 통화하면서까지 자위하면서 소리를 들려주는 걸로 흥분해 또 자위할 리가 없지.

걱정과 다르게 그레이프의 휴가 이유는 단순히 마법소녀로서 업무가 너무 바쁜 것 때문이었다.

나는 정말 만에 하나를 생각해 그레이프에게 걸었던 최면을 머릿속으로 정리해봤지만, 문제가 될 것으로 보이는 건 없었다.

그나마 통화를 하면서 자위하는 줄 알고 혹시나 싶었던 게 나를 상상하며 자위하면 절정하지 못한다는 최면이었지만…그건 어디까지나 ‘나를 상상하며 자위할 때’ 로 제한되어 있는 최면이다.

아무 생각 없이 자위하거나, 야한 영상을 보며 자위하면 언제든 절정할 수 있다.

마견보다도 약하지만 그래도 괴수이기는 해서 몸에 지닌 방벽 때문에 일반인은 처리할 수 없는, 마법소녀에게는 마견보다도 쉬운 상대가 바로 슬라임이다.

지금 그레이프가 상대하고 있는 개체는 뭔가 돌연변이가 일어나 재생속도가 빠르고 귀찮은 상대가 되어 있는 것 같지만, 상대가 슬라임이라면 그레이프가 잠을 자고 있어도 전혀 해를 입힐 수 없다.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레이프에게 전화를 걸어 최면에 문제가 없고, 지금 상황도 위험하지 않다는 걸 확인한 나는 한층 가벼운 마음으로 비전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사무실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앵거 씨.”

“아, 과장님.”

“하아아….”

그대로 옥상 문을 나와 사무실에 가서 샌드위치를 먹으려던 나는 사무실 문 바로 앞에서 과장과 마주쳤다.

과장은 나를 보고 갑자기 인상을 쓰고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팔짱을 끼고 턱짓으로 엘리베이터 옆의 비상계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잠깐 얘기 좀 하죠?

“예?”

갑자기 왜 부르는 걸까.

점심시간을 굳이 낭비하고 싶지도 않고, 빨리 샌드위치를 먹고 잠이나 자고 싶었지만, 과장의 표정을 보니 그러기는 힘들 것 같다.

과장은 불량해 보이게 인상을 쓰고 입가를 비튼 채 계속해서 찍, 찍 하는 혀 차는 소리를 내며 나보다 먼저 앞장서서 비상계단으로 걸어갔다.

나는 의문을 가지면서도 과장을 따라 계단에 들어갔고, 아무도 없는 계단에서 곧바로 주머니에 손을 넣어 담배를 꺼내는 과장의 모습을 보고 손가락으로 담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과장님, 계단에서 담배는….”

“쓰읍….”

“방화법 위반입니다.”

“하아…진짜, 가지가지 하네.”

나는 말하지 말라고 눈치를 주는 과장을 무시하고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지적했다.

내가 비흡연자인 것도 있지만, 계단에서 담배를 피는 건 법적으로 금지되어있다.

“앵거 씨, 눈치 없어?”

“예?”

“아니…과장이 담배 좀 빨겠다는데 뭐? 방화법 위반? 장난해?”

과장은 내가 지적한 게 마음에 안 드는지 내 말을 완전히 무시하며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쓰읍 하고 들이마셨다가 내 얼굴에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나는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얼굴 앞에서 부채질하고 뒷걸음질 쳤다가, 과장이 뒤이어 한 말에 어이가 없어 숨을 삼켰다.

“인상 안 펴? 와, 진짜…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지?”

이게 사람 얼굴에 담배 연기를 뿜고 할 말인가…?

과장은 내가 어이없어하는 건 보이지도 않는지, 아니면 자기 행동이 굉장히 멋있고 압도적인 모습으로 보일 거라 생각하는지 어깨를 일부러 들어 올려 커 보이게 자세를 잡고는 부자연스럽게 팔꿈치를 들고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

“앵거 씨…요즘 좀 너무한 거 아냐?”

“예?”

“예, 하지 말고…대답을 해야 할 거 아냐?”

…예는 대답이 아닌가?

“뭐가 너무하다는 겁니까?”

“말투…하아, 그래 어차피 말해봤자 고치지도 않을 테니까 넘어가자…내가 갑자기 왜 이렇게 불러와서 지랄하나 싶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하려다가 멈춰 섰다.

과장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또다시 담배 연기를 내 쪽으로 내뿜고는 인상을 팍 쓰고 혀를 찍찍 차며 말했다.

“나도 이러고 싶진 않은데, 앵거 씨 요즘 좀 선을 너무 넘잖아?”

“무슨 말씀이시죠?”

“꼭 말을 해야 알아? 자기 행동을 좀 돌아보면 안 돼?”

과장은 내 구두 바로 앞에 담배꽁초를 던지고는, 위협적이게 발을 밟아 담뱃불을 껐다.

나는 무표정하게 과장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부담스럽게 얼굴을 가까이하는 과장에게서 상체를 뒤로 빼고 턱을 당기며 멀어졌다.

담배 냄새도 나지만 너무 못생겼다.

“잘하자, 응?”

“…뭘 말씀이십니까?”

“그걸 꼭 말해야 알아? 진짜로?”

“네.”

말을 안 해주면 대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나는 독심술사가 아니다.

당연한 대답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과장은 대체 어째서인지 한숨을 푹푹 쉬며 머리를 긁고는 주먹으로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팀장님이 잘해준다고 착각하지 좀 말고, 시간 좀 만들려는데 자꾸 이상한 짓 해서 눈치 없이 방해 좀 하지 말고, 남한테 피해 주지 좀 말고, 일 좀 똑바로 하고…어? 내가 하나하나 다 말해줘야 해?”

“뭘 착각하지 말라는 겁니까? 방해라뇨?”

“와, 진짜! 앵거 씨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야? 나 화나게 하려고?”

나는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과장을 멀뚱멀뚱 바라봤다.

과장은 그런 나를 보고 갑자기 하! 하고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더니 닫혀있던 비상문을 발로 걷어찼다.

“잘해줄 때 잘하자, 응? 담배는 앵거 씨가 좀 주워다 버리고? 알았지?”

그 말을 끝으로 과장은 비상계단 문을 쾅! 하고 닫으며 밖으로 나갔다.

나는 잠시 벽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 과장이 대체 뭘 하고 싶어하는 건지 추측하다가 담배꽁초를 발로 차 계단 밑으로 떨어뜨렸다.

…왜 갑자기 뜬금없이 시비를 거는 거지?

생리도 안 하면서.

이유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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