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준비 (2)
업무가 시작된 후 그레이프는 마법소녀라는 사실을 내게 들키기 전보다도 더 조용히, 말없이 일했다.
직원들은 요즘 그레이프가 예민하기도 하고 감정이 오락가락했던 걸 느꼈는지 그레이프가 앉아있는 쪽을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며 일하고 있다.
부장도 오늘따라 얌전하고, 일하며 문제가 될 것도 없어 사무실 전체가 조용하다.
나는 평화로워진 사무실 분위기에 만족하며 업무에 집중했다.
일하다가 최면어플을 켜서 래피드의 위치를 확인해보니 4번 구역의 상가를 돌아다니고 있는 게 보인다.
주말에는 거의 매번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놀러 나오고, 평일에도 가끔 4번 구역에 찾아오는 것 같다.
당장 찾아가고 싶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업무 중이다.
한편으로는 래피드의 동선을 체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업무에 집중하며 시간을 보낸 나는 점심시간이 가까워질 때쯤 직원들이 사용하는 사내 메신저를 켜서 채팅 내용을 살폈다.
[아~팀장님 좀 피곤해 보이는데.]
[좀 정신이 없어 보이지 않아요?]
[그러실 수도 있죠~매일 집중하시기도 힘들잖아요?]
채팅방 안에는 과장이 중심이 되어 대화하는 경우가 잦다.
이 비밀 채팅방 자체가 과장이 부장 몰래 직원들끼리 파벌 형성을 하고자 하며 만든 거였고, 그레이프가 오기 전에는 과장과 부장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던 만큼 당연한 일이다.
예전에는 주로 부장을 욕하는 채팅이 많았지만, 그레이프가 온 뒤로는 그레이프를 힐끔거리며 오늘은 어떤지, 전에는 어땠는지에 대해 얘기를 하는 게 주된 주제로 변해 있었다.
[하아…진짜 팀장님 참 대단하시단 말이야, 저렇게 어린데 책임감도 있고.]
[솔직히 외모 되지, 일 열심히 하지, 똑 부러지지…완전 일등신붓감이죠.]
[아…그런데 오늘따라 피곤해하시니 내가 다 마음이 아프네요.]
오늘도 마찬가지로 그레이프가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인다거나, 눈빛이 멍하다거나 하는 대화가 오가고 있다.
나는 그레이프가 피곤해 보인다는 대화를 보고 그레이프의 책상을 힐끔거렸다.
우연히 눈이 마주치고 깜짝 놀란 그레이프에게 괜찮냐고 눈짓을 하니 눈을 질끈 감은 채 가슴에 손을 대고 숨을 길게 내쉬는 모습이 보인다.
[화나신 거 아냐 지금?]
[하긴 화날 만하죠, 참 눈치 없다.]
[쉿…보잖아.]
[아니 뭐 보라고 하는 말인데요. 먹지 말라고 이름 적어둔 거 보면 모르나? 책임감 느끼고 일도 같이해줘, 뒤에서 늘 감싸줘…참 눈치 없다 눈치 없어.]
[하긴 팀장님이 사람이 좋아서 다 해주는 거지, 그 정도 하면 알아서 좀 제대로 해야 할 텐데….]
그레이프를 잠깐 보고 다시 자세를 잡으며 일하려고 했더니 채팅방 안에서 이상한 얘기가 오간다.
나는 정말 혹시나 싶지만 채팅 중인 직원들이 그레이프를 보고 있었던 걸 생각하면 내 얘기를 하는 건 아닐까 싶어 조심스럽게 메시지를 보냈다.
[무슨 말씀이세요?]
[아~앵거 씨, 아무것도 아니야.]
대단할 것 없는 대화처럼 보이지만 묘하게 불쾌하다.
나는 자리에 앉아있는 직원들을 힐끔거리다가 과장과 눈을 마주쳤다.
과장은 나를 보고 입가를 비틀어 보이며 이상하게 웃더니, 내게 1:1 채팅을 보내왔다.
[앵거 씨 일은 잘 돼? 오늘도 야근하는 건 아니지?]
[일은 잘 되고 있고, 야근은 더 안 할 예정입니다.]
[안 해야지, 잘 생각했어.]
과장은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채팅방 안에서의 대화도 점차 뜸해지고 아무런 대화도 올라오지 않게 되었다.
일이 아주 바쁠 때를 제외하면 언제나 대화가 이어졌었는데, 특이한 일이다.
아무런 대화도 올라오지 않게 된 채팅방을 내버려 두고 다시 일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됐다.
그레이프는 오늘따라 내 자리를 힐끔거리면서 지나갔고, 나는 언제나처럼 가방에서 샌드위치를 꺼내 식사를 대충 끝냈다.
점심시간이 지나 다시 일하고, 시간이 지나며 아무 일 없이 퇴근 시간이 다가온다.
“고생하셨어요~”
밤이 늦어지고 언제나와 같이 직원들이 인사할 때 나는 퇴근 준비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하자 그레이프가 갑자기 내 등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말을 걸어왔다.
“앵거 씨…저기, 오늘 같이 앉을래요?”
“뭘 같이 앉아요?”
나는 갑자기 무슨 얘기를 하는 건가 싶어 되물었다.
그러자 그레이프는 당황한 얼굴로 나와 다른 직원들을 힐끔거렸고, 내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건지 고개를 살짝 떨군 채 조용히 말했다.
“오늘 술자리 안 가세요?”
“술자리요?”
“과장님이…다들 마시자고…부장님은 볼일 있으셔서 안 올 거라면서….”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나온 얘기인가?
점심시간에 직원들끼리 같이 식사를 하기도 하고, 흡연하러 가기도 하니 그때 나온 얘기일 수도 있다.
어쩔 수 없이 참가해야 하는 공적인 회식이면 모르지만, 단순히 직원들끼리 모이기로 한 것까지 찾아가고 싶지는 않다.
“칵테일 바 가자고 하던데…저번처럼 밤늦게까지 있을 수도 있고….”
“제가 별로 술을 안 좋아해서 얘기를 안 해줬나 보네요.”
“어? 안 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등에 멨다.
“팀장님이랑 마시는 거니까 간 거지 원래는 술 안 좋아해요. 아시잖아요, 술 약한 거.”
“읏….”
“전 술보다 빨리 집에 가서 야한 영상이나 보는 게 좋아서.”
“하, 하아아….”
어차피 이미 서로 할 것도 다 한 사이고 야한 얘기도 할만하다고 생각해 슬쩍 웃으며 말하자 그레이프가 몸을 움찔거리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농담이긴 했지만, 정말로 집에 가서 할 일이기도 하다.
“앵거 씨…자꾸 이러면 진짜 혼나요?”
“네?”
“보려는 거 제 영상이잖아요….”
아무 생각 없이 퇴근 준비를 마치고 일어서던 나는 그레이프가 한 말에 멈칫했다.
혼난다니?
그런 말은 하지 못하게 확실히 최면으로 가르쳐 줬을 텐데.
“혼내다뇨…? 어떻게요? 팀장님 저 혼낼 거에요?”
“…꿀꺽.”
어쩐지 상태가 이상해 보인다.
강간은 나쁜 짓이라고, 싫어한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왜 이렇게 자꾸 혼내는 거에 집착하는 걸까.
나는 점점 눈동자가 핑글핑글 돌고 있는 그레이프를 노려보다가 주변 사람들이 듣지 않는 걸 확인한 뒤 단호하게 말했다.
“설마 정의로운 마법소녀가 팬한테 나쁜 짓 하려는 건 아니죠?”
“으으으으윽, 으흐으으읏….”
“…영상 보는 건 제 자유에요, 그레이프가 야해서 보는 건데 왜 그걸 가지고 그래요?”
“하악….”
“팀장님! 엘리베이터 왔어요! 퇴근해요!”
상태가 이상해 보이는 게 아니라 이상하다.
나는 입꼬리를 점점 올리며 이상한 숨소리를 내는 그레이프를 보고 있다가 다른 직원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놓고 있는 그레이프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레이프.”
“헥?! 앗, 네!”
그레이프는 몽롱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다가 입가를 손으로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뭔가 잘못되었는지 어딘가 망가진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출근할 때도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기는 했지만…내 얼굴만 보면 초점이 나가고 정신이 어딘가로 날아가 버린 것처럼 묘한 행동을 보인다.
내 얼굴을 볼 때마다 이상한 반응을 한다는 건 아마도 내 얼굴을 보면 야한 생각을 하게 만든 최면이 문제다.
최면을 걸면서 나는 단순히 조금 야한 기분이 들거나 약간 야한 상상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레이프의 반응을 보니 내 예상보다도 훨씬 더 야한 상상을 하는 것 같다.
내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다.
“과장님, 저 죄송한데 오늘 못 갈 것 같아요.”
“네? 아니, 왜요…? 오신다면서.”
“죄송해요, 생각해보니까 집에 빨리 가 볼 일이 있어서…그런데 누구누구 모이기로 했던 건가요?”
“부장님 빼고 전부 다 모이기로 한 거죠, 팀장님도 오시는 게 좋은데….”
“부장님 빼고, 전부 다…라고요?”
제정신을 차리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그레이프는 구석에 등을 기대고 있는 내 바로 옆에서 과장과 대화를 하며 내 쪽을 힐끔거렸다.
나는 그레이프의 시선을 느끼고 눈을 마주쳤다가, 곧바로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돌리는 그레이프를 보고 주머니 안에서 비전폰을 꽈악 쥐었다.
아무래도 그레이프에게 걸어둔 최면을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일단 다른 건 괜찮을 것 같지만, 내 얼굴을 보면 야한 상상을 한다는 최면은 빨리 없애주는 게 좋아 보인다.
문제는 언제 어떻게 최면을 걸어야 하는가다.
엘리베이터 안에 점점 직원이 가득 차고, 그레이프는 직원들에게 밀렸는지 점점 내 쪽으로 붙어 허리를 맞댔다.
사람이 가득 차며 그레이프와 점점 밀착된다.
“아아아! 잠깐, 잠깐! 나도 좀 타자!”
“꺄악!”
“부장님! 어디 만지시는 거에요!”
“아 거 일부러도 아니고 만진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미안해! 나 오늘 바쁘다니까? 좀 같이 좀 타지!”
그때 오늘 바쁘게 집에 가야 한다고 말했던 부장이 이미 사람이 가득 찬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오며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레이프는 깜짝 놀라며 나와 마주 서서 다른 사람들에게 등을 떠밀렸고, 나와 서로 배를 밀착시키고 맞댄 자세가 되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레이프와 내 눈이 서로 크게 떠지고 마주한 얼굴이 점점 붉어진다.
“앗, 애, 앵거, 씨, 이건….”
“…쉿.”
나는 괜히 이런 모습을 다른 직원들에게 눈치채져서 좋을 게 없다는 생각에 그레이프에게 쉿 하고 말을 하지 말아 달라는 소리를 냈다.
뒤이어 주변을 둘러보는 내 모습에 의도를 파악해 준건지 그레이프도 입을 다물고 조용히 해줬다.
“하아…하아…하아….”
그레이프는 나와 가슴을 맞대고, 배를 맞대고, 서로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져서 뜨거운 숨을 점점 빠르게 내쉬었다.
숨결 하나하나가 뜨겁고 달콤하다.
다른 직원들이 주변에 가득 차 있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저절로 발기해버린 자지가 그레이프의 다리에 닿는다.
그레이프도 그 열기를 느꼈는지 허리를 움찔거렸다가, 조심스럽게 내 허리 양옆에 있는 엘리베이터 손잡이를 꽉 쥐며 몸을 가까이했다.
사람들이 밀치는 힘을 버티기 힘든지 점점 가슴이 밀착되고, 배가 맞닿으며 살살 문질러진다.
허리가 아주 약간씩 흔들리며, 뜨거워진 자지의 형태를 확인하듯 다리가 꾸욱 눌러져 온다.
마법소녀인데도 변신 전에는 힘이 없는 건가?
몸이 완전히 밀착되어버린 그레이프가 내가 흥분해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듯 집요하게 허리를 살살 움직여 나는 얼굴을 붉히고 그레이프를 가만히 올려다보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법소녀니까, 이렇게 작게 말해도 알아들어 줄 것이다.
“…다리, 닿아요.”
“하아…하아….”
“일부러 닿게 하는 거 아니죠…?”
“하아…하아…하아…하아…!”
“자꾸 몸 움직이지 말아 주세요.”
“꿀꺽…하아아…하아아…하악…하악….”
달콤하고 조용한 숨소리가 점점 짐승 같은 숨소리로 변한다.
몽롱했던 눈빛이 날카로우면서도 어딘가 엇나가버린 위험한 눈빛으로 변하고, 입이 벌어지며 끈적하게 젖은 혀가 입술을 핥아 올린다.
나는 본능적인 오싹함을 느끼며 그레이프의 허리에 손을 대고 톡톡 두들겼다.
“그레이프, 그레이프…?”
“엑, 헷?”
“여기 엘리베이터 안이에요.”
“앗, 읏, 네헥…!”
심각하다.
평범하고 정상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그레이프의 상태를 두 눈으로 확실히 확인한 나는 억지로라도 시간을 만들어 최면을 해제해줘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레이프는 나를 보면서 대체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지 계속해서 남들 모르게 허리를 흔들었고, 나는 그레이프가 허리를 흔들고 있는 걸 들키지 않도록 골반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너무 많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꽈악 잡아당겼다.
그러자 그레이프의 숨이 더 뜨거워지고 달콤해지며 입을 벌릴 때마다 끈적한 소리가 나는 것과 동시에 묘한 반응이 나타났다.
“앗…앗…읏….”
허리를 움찔움찔, 부들부들 떠는 그레이프의 입가가 살며시 열리고 혀가 살짝 밖으로 나온다.
다리 사이가 뜨거워지고, 맞닿은 배가 움찔거린다.
여기가 어디인지 잊은 것처럼 맞댄 가슴을 문지르며 두근두근두근두근 하고 심장 소리를 크게 들려준다.
하이힐 때문에 조금 올려다보게 되며 보이는 그레이프의 눈빛이 무척 위험해 보인다.
“하아, 하아, 하아, 하아….”
엘리베이터가 지상에 도착하고 사람들이 내리자 그레이프는 천천히 내게서 떨어지며 내 등 뒤에서 잡고 있던 엘리베이터 손잡이를 놔줬다.
으지직 하는 소리가 들려 슬쩍 내려다보니, 그레이프의 손에 완전히 뭉개져 이상한 형태로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곧바로 내 등으로 손잡이를 가리고 아플 만큼 발기해있는 자지가 보이지 않도록 허리를 뒤로 빼며 내리고 있는 직원들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아~! 생각해보니…팀장님, 죄송한데 저 퇴근 지문 안 찍고 온 것 같아요.”
“어? 네?”
“정말 죄송한데 잠깐 한 번만 위에 올라갔다 올 수 있을까요~?”
조금 부자연스럽기는 하지만 충분히 있을 만한 얘기를 꺼내자 내가 지문을 찍는 걸 확인한 그레이프가 이상해한다.
나는 그레이프에게 조용히 하라는 눈치를 주며, 눈짓으로 잔뜩 발기해있는 내 자지를 가리켰다.
그레이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당황해서 커다란 골반으로 내 다리가 살짝 가려지게 몸을 틀어 서 줬다.
“앵거 씨…하아…진짜 가지가지 한다?”
“다들 가끔 있는 일이잖아요, 죄송합니다.”
“가끔 있는 일을 줄여야 할 거 아냐?”
“죄송합니다.”
“잠깐, 얘기 안 끝났….”
잔소리를 시작하는 과장을 뒤로하고 곧바로 문을 닫은 나는 엘리베이터를 작동시켰다.
그레이프와 단둘이 된 나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당혹스러워하는 그레이프를 가만히 보다가, 일단 급한 일부터 해결하자는 생각에 최면어플을 내밀었다.
“자, 이거 보세요.”
“하…후우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