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 야근 (9)
“…어? 응? 어어?”
눈을 몇 번이고 깜빡이며 정신을 차린 그레이프는 멍하니 내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다시 내 얼굴을 봤다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천천히 옆으로 향하고, 또다시 내 얼굴을 힐끔거렸다가 고개를 숙이며 뜨거운 숨을 내쉰다.
나는 그레이프의 모습을 보고 내가 방금 건 최면을 떠올렸다.
나를 보면 야한 생각을 하게 되는 최면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
“어, 어라? 갑자기…어? 앗, 어?”
“그레이프 씨?”
이미 그레이프의 자궁에 황홀할 정도로 많은 양의 정액을 사정하고 개운해진 나는 점점 팔을 바들바들 떨고 몸을 흠칫 거리는 그레이프를 바라보며 가장 중요한 걸 질문했다.
“야한 눈으로 보면 준다는 벌이 야근은 아니죠?”
“어? 당연히 아니죠…?”
“제가 야한 눈으로 보는 게 이상해요?”
“아, 아뇨? 아뇨? 어라…? 어?”
“저 지금 야한 눈으로 보고 있는데, 어때요?”
“네에?!”
노골적으로 그레이프의 배꼽 바로 밑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하자 그레이프는 당황하면서도 숨을 점점 가쁘게 했다.
내 시선의 끝에는 정액을 잔뜩 받아 뜨겁게 달아올라 있는 마법소녀의 자궁이 있다.
잔뜩 박아대고 가득 사정해버린 조금 전의 일을 떠올리며 가만히 바라보자 그레이프는 갑자기 허리를 움찔거리며 앞뒤로 살살 흔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허리를 흔든다는 사실에 당황해 두 손으로 다리를 잡으며 눈을 크게 뜬다.
“어? 어? 갑자기, 앗, 어?”
최면의 효과가 생각한 것보다 조금 더 강한 것 같다.
나는 그레이프의 반응을 보고 숨이 막힐 정도로 심장이 두근거려 한숨을 쉬면서 침착하게 말했다.
“…혹시 그레이프 씨 지금 야한 상상 했어요?”
“네?! 아? 어?! 아뇨?!”
“허리 왜 흔드는 거에요?”
“아뇨, 아니, 그게요? 어? 가, 갑자기…어어?”
비밀 계정에 올리는 자위영상을 떠올려보면, 그레이프는 평소에도 야한 생각을 조금씩 하고 있을 게 틀림없다.
하지만 지금은 내 얼굴을 보기만 해도 야한 상상을 하게 되고, 내가 야한 눈으로 보고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게 된다.
아마도 평소와 다르게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쾌감과 야한 상상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거로 보이는 그레이프는 한 손을 가슴 위에 얹고 내게서 완전히 시선을 돌려 눈을 내리깔면서 천천히 심호흡했다.
“후우…후우…하아…후우….”
최면은 전부 제대로 걸려들었다.
이걸로 그레이프는 내게 야한 눈으로 본다고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자기 자신도 야한 눈으로 나를 보게 되어 내게 잘못을 따질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숨을 고르는 그레이프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최대한 덤덤하게 말했다.
“아무튼, 벌은 좀 아닌 것 같아요.”
“네에…네, 벌은, 벌…?”
“계속 이해 못 하는 것 같은데…제가 그레이프 씨 몸을 야하게 보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몇 번이고 말했잖아요, 이렇게 야한 몸인데 제가 어떻게 야한 눈으로 안 보냐니까요? 심지어 섹스도 그렇게 했는데.”
“하아…하아…그, 그쵸…그건 저도 알아요…하아…알긴 아는데…그래도…당연하긴 하지만…저희는 그런 사이가 아직….”
당연하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래도 그 당연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르나에게 최면을 걸며 알게 된 최면의 문제점이다.
친구 사이에는 섹스하는 게 상식이다 같은 최면을 걸어도 개인이 그 상식을 받아들이기 싫어한다면, 상식을 거부하는 일이 생긴다.
야한 눈으로 보는 건 당연하지만, 상사, 친구사이에 그러는 건 안된다는 말을 또다시 할 거라고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레이프에게 말했다.
“오히려 친구 사이고, 직장 상사니까 이렇게만 보는 거지…그게 아니었으면 더 심한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르죠.”
“심한 이이일…그, 쵸오…? 친구도, 상사도 아니면…더 야한….”
“그러니까 제가 야한 눈으로 보는 건 혼나야 하는 게 아니라 잘 참아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음.”
논리적이게 내 행동을 변호한 나는 예상과 다르게 이해해주기는커녕 오히려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내는 그레이프를 보며 조금 당황했다.
내가 한 말에 문제는 전혀 없는 것 같은데, 대체 뭐가 문제가 되어서 여전히 야한 눈으로 보는 내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최면을 걸어서 내가 그레이프를 야한 눈으로 보는 건 당연하고, 야한 눈으로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내 얼굴을 보면 호감을 느끼게 해뒀다.
그런데도 이런 시큰둥한 반응이 나온다면…어쩔 수 없다.
나는 그레이프를 따라서 불만스러워 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사실 이런 말 정말 안 하려고 했지만…그레이프 씨도 저 야한 눈으로 보잖아요.”
“네히엣?!”
최면을 걸어서 나를 보면 야한 생각을 하게 해뒀으니 당연히 지금 나를 야한 눈으로 보고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이미 느끼고 있다는 말투로 지적하자 그레이프는 깜짝 놀라며 나를 커다랗게 뜬 눈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휙 돌렸다.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초점이 잘 잡히질 않는다.
“어, 어, 언제부터요? 애, 앵거 씨를 야한 눈으로 보다뇨…?”
“그레이프도 느끼는데 제가 못 느끼는 줄 알았어요?”
“거짓말하지 말아주실래요? 저는 그런 거 절대 안 들키게 하거든요?”
“조금 전에도 저 보면서 야한 생각 했잖아요. 무슨 상상 했는지는 모르지만, 티 엄청 나요.”
“읏, 앗, 앗….”
그레이프는 꼭꼭 숨기던 비밀을 들켜버린 듯이 얼굴을 잔뜩 붉히고 숨을 거칠게 내쉬며 가슴을 감싼 팔을 부들부들 떨었다.
“언제부터…언제부터 느꼈는데요?”
“…솔직히 느낀 건 조금 전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야한 생각하는구나 싶었던 거긴 한데, 이런 눈빛 몇 번인가 더 봤던 것 같아요.”
“처음! 이번에 처음이라 그래요! 그 전에 느낀 건 착각이에요!”
질문에 거짓말을 하기에는 짐작이 가는 게 너무 없어서 솔직하게 말하자 그레이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그리고, 지금 그것도 앵거 씨가 야한 눈으로 계속 보니까 저도 기분이 이상해 진 거지…저는 앵거 씨 야한 눈으로 그렇게 막 보지는 않았어요!”
“…진짜요?”
“네!”
그레이프가 그렇다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레이프는 몸매도 야하고 옷차림도 야하지만, 나는 뭐…거울을 볼 때마다 피곤에 찌든 얼굴을 보고 이러다 언제 죽는 건 아닐까 싶어지는 외모다.
최면을 걸기도 전에 나를 대상으로 야한 생각을 한다는 게 말이 안 되기는 한다.
하지만…그레이프의 비밀 계정을 생각해본다면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또 아니다.
나를 대상으로 야한 상상을 하는 게 아니라 같이 일을 하는 회사원을 대상으로 야릇한 망상을 했을지도 모른다.
영상이나 댓글 내용이 모두 그런 느낌이었으니, 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레이프는 정말 자기는 그런 적 없다는 결백을 증명하고 싶은지 뜨거운 눈빛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도 계속해서 얼굴을 붉히고 시선을 돌려 다른 곳을 힐끔거렸다.
내 얼굴을 보면 야한 생각을 하게 되어서 당황하고 있다.
재미있는 반응이긴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레이프가 언제부터 나를 야한 눈으로 봤느냐 하는 게 아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레이프도 저도 서로 야한 눈으로 보는 건데…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지 말자는 거에요, 그레이프도 당연히 저랑 섹스한 게 처음이라고 했으니까 생각 날 수도 있죠.”
“하아…하아…하아….”
“서로 사고를 쳐 버려서 섹스하는 상상을 할 수밖에 없잖아요? 저야 계속 그레이프 씨 가지고 야한 상상 할 수밖에 없고…그레이프 씨는 어떨지 모르지만 뭐, 저를 가지고 야한 상상 할 수도 있고….”
“그렇…죠.”
이제야 내가 야한 눈으로 보는 게 전혀 잘못되지 않았다는 걸 제대로 이해해 준 것 같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시선을 피하는 그레이프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문득 한가지 생각이 떠올라 말을 이었다.
내 잘못을 없앴으니, 이제 그레이프의 잘못을 키워서 혼내줄 차례다.
한번 잘못했을 때 제대로 이걸 해선 안 된다고 제대로 처벌과 함께 가르쳐 두지 않으면 같은 일이 발생하게 된다.
방위군 훈련병일 때 조교가 해줬던 말이다.
다시는 야한 눈으로 보면 안된다거나 벌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할 수 없게 해 줘야 한다.
“…그런데 정말로 예전에는 저 대상으로 야한 상상 안 했어요?”
“…혹시 저 강간한 것도 평소에 그런 상상 하고 있었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네?!”
“아니, 그냥…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왜 갑자기 그레이프가 나를 데리고 가서 덮쳤나…계속 궁금했는데, 예전부터…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가지고 음액때문에 참을 수 없게 되었다면…아니, 음액도 안 통한다고…했죠? 설마 강간…계획, 한 건가요?”
내가 최면을 걸어 덮쳤으니 그럴 리가 없지만, 정말로 내가 하는 말을 진심으로 믿으며 연기하자 몸이 저절로 떨렸다.
말하면서도 뭔가 오싹하고 불길한 느낌이 든다.
진짜 강간이 아닌데도 강한 힘으로 찍어눌러 져서 며칠 동안 몸에 그레이프와 섹스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지만 만약 진짜 강간이었다면…어떻게 되었을까.
“아뇨?! 앵거 씨? 저 그레이프거든요?! 마법소녀 그레이프! 사람들을 지키는 철벽의 6위! 정의로운 마법소녀라구요! 강간이라뇨?! 그건 사고에요!”
“…그런 짓을 해놓고 저한테 야한 눈으로 본다고 뭐라고 하면 어떡해요?”
“아아아…잘못했어요! 안 할게요! 그치만 정말 사고에요! 저 그런 상상 안 했어요! 사고! 정말로…에스더 때문에 일어난 사고에요!”
“그때 얘기 되도록 안 하려고 했는데…그러면 왜 안에 안 싸려고 참고 있는데도 안 빼주고 허리 흔든 거에요?”
“그건…그건…!”
“저는 상상만 한 건데…그냥, 너무 야해서 보기만 한 건데…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지금 보니까 그레이프는…상상만으로 끝낸 게 아니었잖아요.”
그레이프는 자기가 생각해도 할 말이 없는지 아랫입술을 깨물며 눈가를 적셨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조금 전에는 갑자기 나를 이상하게 압박해오긴 했지만, 결국 그레이프는 나를 강간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
“꿀꺽…꿀꺽….”
그레이프는 얘기를 들으며 목이 말랐는지 식어버린 유자차를 꿀꺽꿀꺽 마시고 탁 소리가 나게 잔을 내려놨다.
그대로 술이라도 마신 것처럼 몽롱한 눈빛으로 나를 가만히 올려다본다.
눈동자가 쉴 새 없이 떨리고 아주 작게 빙글빙글 돌고 있다.
“앵, 앵거 씨…? 자, 침착…하고, 오늘 야근 해서 힘들어가지고 지금 조금 부정적이게 생각하는 거에요…그건 사고, 사고에요…그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