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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소녀 최면물-89화 (89/299)

< 89화 > 야근 (7)

나는 그레이프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걸 확인하자마자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레이프는 자리로 돌아간 뒤 어려울 일도 없는데 머리를 싸매며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다.

머리를 어깨에 기댈 때는 그렇게 심심하고 졸린 건가 싶었는데, 지금 표정을 보니 졸린 것 같지는 않다.

“…뭐가 잘 안 돼요?”

일이 잘 풀리는 거로는 보이지 않는 모습에 천천히 다가가 묻자, 그레이프가 이마에 대고 있던 손을 떼며 손사래를 친다.

그러고는 가만히 나를 올려다보며 고민이 많아 보이는 복잡한 눈빛을 하며 말했다.

“앵거 씨…오늘 갑자기 야근하자고 해서 미안해요.”

그레이프는 내가 계속해서 불만스러워하고 짜증을 내는 모습을 보고 갑자기 야근을 하자 한 걸 미안하다고 생각했는지 조금 우울해 하는 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그 모습을 보니 내가 너무 불만스러워하는 티를 냈다는 게 느껴진 나는 나도 모르게 따라서 사과해버렸다.

“아뇨, 저도 미안해요…짜증만 냈네요. 일은 어차피 해야 하는 거니까…그리고 선물도 받았고, 야근해야죠, 이해해요.”

“아니…그게 아니라…하아….”

“잠깐만….”

나는 말을 하다가 그레이프에게 등을 돌리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레이프가 자료를 체크하는 동안 탕비실로 걸어가  유자차를 두 잔 타온 나는 그대로 그레이프의 자리로 돌아가서 한 잔을 책상 위에 올려놨다.

그레이프는 복잡한 표정으로 작업물을 멍하니 체크하다가, 내가 가져다준 차를 보고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어? 뭐에요?”

“유자차요, 커피는 이제 집 가야 하는데 마시면 잠이 안 올 테니까…좀 마시면서 해요.”

그레이프와 같이 있는 게 싫은 건 아니다.

하지만 야근을 하는 건 싫다.

내가 야근하는게 싫은 것처럼 같이 야근을 하는 그레이프도 지금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을 것이다.

야근을 하는 건 일을 빨리 끝내야 하기 때문이지, 그레이프의 잘못이 아니다.

이러한 생각을 통해 내가 지금 짜증이 나는 만큼 그레이프도 마음이 편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나는 내가 마실 차를 타는 김에 그레이프의 것도 타서 가져다줬다.

그레이프는 유자차를 받고 멍한 표정을 지으며 올려다보더니, 얼굴을 붉히며 웃는 얼굴로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자, 잘 마실게요….”

“검토는 오래 걸릴 것 같아요?”

나는 그레이프의 뒤쪽에서 머리 옆으로 손을 쭉 뻗어 마우스를 잡았다.

얼마나 확인했는지 대충 살펴보니,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보인다.

마법소녀라서 동체시력이 빨라 이런 걸 보는 것도 오래 걸리지 않는 걸까?

내가 보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다.

“아뇨…오, 금방, 금방 끝나요….”

그레이프는 나한테도 심장 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목소리를 크게 움찔거리며 말하고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내 얼굴을 힐끔거렸다.

“앵거 씨 이럴 때 보면 되게 못된 것 같아요….”

“예?”

유자차를 타서 가져다줬는데도 그레이프에게 욕을 먹은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레이프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어깨에 손을 올리고 토닥였다.

“히, 하악…학….”

“유자차 타 줬는데 욕하지 마시고, 빨리 체크 해주세요.”

“앗, 읏, 넷….”

움찔거리는 그레이프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나는 시선을 자연스럽게 그레이프의 가슴 사이로 향했다.

커다란 가슴이 꽈악 조여지며 만들어진 깊은 가슴골이 저절로 시선을 끌어모은다.

크고, 부드러워 보이고…쇄골도 야하고, 가슴 크기를 버티기 힘든 것처럼 꽈악 조여진 옷도 야하다.

…야근을 하게 되었다는 불만과 분노도 내가 할 작업을 끝내며 완전히 사라졌다.

이대로 집에 돌아가면 나는 래피드에게 최면을 걸 계획을 짜고…그레이프의 영상을 보면서 자위하고, 그레이프의 영상에 댓글을 달다가 잠이 들 것이다.

그런데, 자위를 할 필요가 있을까?

갑작스러운 야근에 정신이 팔려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지금 나는 그레이프와 단둘이서 아무도 없는 공간에 있다.

시간이 많이 지나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둘만의 공간이다.

둘만 있는 공간,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을 상황, 그레이프가 생각하기에도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을만한 순간.

언제든지 최면을 걸어도 좋은 장소, 좋은 시간이다.

이미 스트레스를 쌓일 대로 쌓여있다.

기분 좋아져서, 스트레스를 풀고 싶다.

그레이프와 섹스하면 자위랑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기분 좋아질 수 있다.

…덮치고싶다.

“…꿀꺽.”

“앵거 씨?”

“네?”

“…아까부터 어디 보고 있어요?”

갑자기 치밀어 오른 성욕에 정신을 놓고 그레이프의 가슴을 내려다보고 있던 나는 깜짝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레이프는 조금 전의 풀 죽은 목소리는 어디로 갔는지, 갑자기 엄청나게 끈적하고 녹아내리는 듯한 목소리를 내며 의자를 살짝 뒤로 빼고 다리를 꼬며 말했다.

“저 일 하고 있는데, 너무한 거 아니에요?”

“너, 너무하다뇨?”

“야근하는데, 일하는데 그런 눈으로 보면 어떡해요…눈치 못 챌 수가 없잖아요.”

“제가 무슨 눈으로 봤는데요?”

“그런 걸 여자한테 말하게 시키는 거에요? 진짜 앵거 씨 너무 야하고 너무해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얘기하던 나는 그레이프가 도둑질하는 순간을 발견한 사람처럼 묘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며 점점 확신을 가지고 말하자 도망칠 곳을 잃어버린 것처럼 숨이 턱 막혀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하게 야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상황이 바뀌며 심장이 두근거린다.

“정말…앵거 씨, 야한 눈으로 보면 안 된다고 했는데….”

“그, 그래요…야한 눈으로 봤는데, 그래서요?”

“그래도…친구고, 상사인데…적어도 그렇게 노골적으로 보면 안돼죠오?”

“야한 눈으로 안 볼 수가 없다니까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의자를 돌려 다리를 좀 더 꼬아 엉덩이가 옆으로 톡 튀어나오고, 짧은 치마가 끌어올려 지게 한다.

한쪽 팔로 가슴을 끌어안아 모으고, 다른 손은 표정을 보여주기 싫은 것처럼 입가를 가린다.

“아니, 애초에 그레이프 씨가 셔츠 단추를 푼 게 잘못이지…그러고 있으면 누가 가슴을 안 봐요? 누가 야하게 안 봐?”

“더운 걸 어떡해요….”

“저기요, 지금 이 사무실이 덥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사무실이 추워도 더울 수밖에 없는걸요…?”

“마법소녀는 보통 사람보다 체온이 더 높기라도 하나요?”

“음…제가 지금 보통 사람보다 좀 더 체온이 높은 건 맞죠?”

정신이 나간 것처럼 이상한 소리를 하는 그레이프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한걸음 뒷걸음질 치려던 나는 그레이프의 눈빛을 보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포식자 앞에 놓인 피식자의 기분이 이런 느낌일까?

압도적으로 강한 강자가 꼼짝하지 마, 움직이지 마 하고 바라보자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저기, 그레이프 씨…?”

“네에…?”

“솔직히 말해서 몸이 야한 건 그쪽 잘못이지 제 잘못이 아니잖아요?”

“그런가요?”

“네, 따라 해보세요, 야한 몸을 해서 죄송합니다.”

“그것보다는 팀장님의 몸을 야한 눈으로 봐서 죄송합니다, 친구한테 야한 생각 해서 죄송합니다 가 맞지 않을까요?”

“팀장이고 친구고 몸이 이런데 누가 야한 생각을 안 하냐니까요? 내 잘못 아니라니까?”

“그래요~? 저를 보면 야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어요? 하긴…술 마실 때도 그런 얘기 했죠? 앵거 씨는…그렇게 당해도 기분 좋아해 줬잖아요.”

“아니, 그거야….”

“앵거 씨가 좋아하는 커다란 가슴에, 몸매도 좋고…야하고…머리 묶고 있는 마법소녀인 저니까? 어쩔 수 없는 거였죠~?”

갑자기…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내가 불만이 가득하고, 그레이프는 미안해하면서도 열심히 야근하는 분위기였는데, 지금은 그레이프가 나를 도망치지 못하게 말로 옭아매고 잡아 비트는 듯한 느낌이 든다.

뱀 앞에 놓인 실험용 생쥐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거 뭔가 마법 쓰고 있는 거죠? 꼼짝 못 하게 하는 거.”

“꼼짝 못 해요? 아, 그거구나…아아~마법이 아니고, 제 의지가 마력에 묻어나와서 약간 영향을 끼치는 거에요.”

“의지…?”

“네에, 마법까지는 아니고, 구조는 비슷하지만….”

“아니, 그게 아니고…제가 꼼짝 못 하길 바라고 있다는 얘기세요?”

몸을 움직이려면 움직일 수는 있지만, 끈적한 점액에 갇혀있는 것처럼 쉽게 움직여지질 않는다.

그레이프는 내 말을 듣고 묘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피했다.

웃는 것도 아니고, 무표정한 것도 아닌 오묘한 표정이다.

“겨우 이걸로 꼼짝도 못 하는 구나….”

“네?”

“아, 아니에요…그냥 갑자기…그런 생각이 들어서…저 마법소녀였구나 하고…? 앵거 씨보다…훨씬 강한….”

“저기…그게 무슨…네?”

“앵거 씨는 약하니까…제가 밀면 당연히 넘어지겠죠…?”

…자기가 마법소녀라는 사실을 왜 지금 굳이 새롭게 깨닫는 걸까.

의미는 모르겠지만, 어딘가 오싹해지는 발언이다.

본능적으로 무언가가 위험하다는 느낌이 든다.

“저기…팀장님?”

“네에? 앵거 사원님?”

“일…안하세요?”

“해야 하지만…앵거 사원님이 팀장을 야한 눈으로 봐서요…아, 맞아…저는 앵거 씨의 친구이기도 하지만, 일단 상사잖아요?”

“그렇죠?”

“앞으로 야한 눈으로 보면 혼내도 돼요? 업무 방해로.”

“예?”

나는 대체 얘기가 왜 그렇게 진행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 어이없다는 감정을 최대한 담아 말했다.

“아니, 그레이프 씨가 야한 게 잘못이라니까요? 왜 그걸 내 잘못으로 자꾸 돌려요?”

“자꾸 앵거 씨가 야하게 봐서 저도 이상한 기분 들게 하잖아요…마법소녀는 감정에 예민하다구요.”

“그럼 야하지 말던가요, 야하게 안 입으면 되잖아요? 나는 하나도 잘못 없어요!”

“아뇨~? 전부 앵거 씨 잘못인걸요?”

말이 안 통한다.

그레이프는 대놓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애초에 벌이 뭔데요? 무슨 짓을 하려고….”

“바, 밤 늦게 둘이 남는 거?”

그레이프는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조금 억지라고 생각하고 있기는 한 것인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하지만 이건 말도 안 되는 횡포다.

야한 눈으로 볼 때마다 야근하겠다니.

용납할 수 없다.

“그레이프, 잠깐 이것부터 보고 얘기하자!”

“앗, 이름을 그렇게 마…악…아…에….”

더는 들어줄 수 없다고 생각한 나는 용서 없이 그레이프에게 곧바로 최면을 걸어버렸다.

최면어플을 보고 눈에 초점을 잃은 그레이프의 얼굴에서 붉은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허억…허억….”

알 수 없는 위기감이 사라지며 안도감이 든다.

고개를 꾸벅이며 자신이 최면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려오는 그레이프를 바라보며 나는 고민에 빠졌다.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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