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야근 (6)
이 세상에 야근 같은 걸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무리 야근 수당을 다 준다고 해도 야근과 퇴근 중 고르라고 하면 누구나 다 퇴근을 고를 것이다.
그런 당연한 생각에서 나온 말을 하자 그레이프는 대체 어째서인지 설마 내가 거절할 줄은 몰랐다는 듯 깜짝 놀라며 당황스러워했다.
“어…? 시, 싫어요?”
“네.”
“앗, 혹시 오늘 바쁜 일 있어요…?”
“아뇨? 집에 빨리 가서 쉴건데요.”
딱히 예정이 없다고 해도 회사에서 늦은 밤까지 일하는 것보단 집에서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게 훨씬 보람차고 알차게 느껴진다.
그레이프는 일에 중독되기라도 한 것인지 이 당연한 사실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계속해서 왜 야근을 거절하는 거지? 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앵거 씨 혼자서 야근하는 게 아닌데요? 앵거 씨가 하면 저도 같이 할거에요.”
“그러면 제가 야근 안 하면 그레이프 씨도 일찍 퇴근할 수 있어서 좋겠네요.”
나는 진심을 담아 그레이프의 야근 신청을 다시 한 번 부드럽게 거절했다.
그러자 그레이프는 팔짱을 끼더니 거절당해 속이 상한 듯 젖은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부탁해왔다.
“앵거 씨, 선물해 줄 때 제가 야근 같이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잖아요….”
“…어, 네.”
나는 그레이프의 말을 듣고 그제야 갈색 양 인형을 받을 때 들었던 얘기를 떠올렸다.
마법소녀라는 정체를 감추는 입막음이라는 생각이 커져서 신경 쓰지 않고 있었지만, 확실히 그런 말도 했던 것 같다.
이미 선물…뇌물을 받아버렸으니 야근을 거절하기도 어렵다.
“…야근 사유는 뭐죠?”
“좀 더 개발 속도를 올리고자…작업량이 부족해서 하는 거로 생각해주시면 돼요. 아주 조금만 더?”
“그러면 과장님이 도와주시면 야근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닌가요?”
“과장님은 또 따로 하는 일이 있으시니까…그냥 같이 야근…해주면 안 돼요? 야식도 사줄게요.”
“하아아….”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거절해보려던 나는 결국 그레이프의 말을 듣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그레이프는 친해졌다고 해도 팀장이다.
내가 납득하기 어려운 업무여도 상사가 하라고 했다면 할 수밖에 없다.
“좋아요, 야근하죠….”
“…괜찮아요?”
그레이프는 자기가 야근하자는 말을 꺼내 놓고 막상 내가 한숨을 쉬는 걸 보니 양심이 찔린 듯 망설이며 물었다.
나는 야근 생각에 착잡한 기분을 느끼며 다시 의자에 누워 고개를 끄덕여줬다.
“네, 괜찮아요.”
“그럼 저 식사하러 좀 갔다 올게요? 야근…하는 거예요?”
“네.”
그레이프는 내 확답을 듣고 나서야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사무실을 나갔다.
그러면서도 뭔가 망설이는 듯, 계속해서 주춤거리며 작게 ‘이게 아닌가?’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후우우….”
그레이프가 사무실을 나서고 잠시 후, 나는 갑작스러운 야근 소식에 한숨을 내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업무량을 늘리고 싶다면 늘릴 수밖에 없다.
열심히 해서 아무리 작업량을 채워봤자, 팀장이 야근해야 할 것 같다고 하면 야근해야 하는 것도 맞다.
이미 야근이 확정된 거, 그레이프가 먹으라고 말해준 요거트라도 먹으며 당이나 채우자고 생각한 나는 탕비실 냉장고에서 그레이프의 이름이 적혀있는 요거트를 꺼내왔다.
복숭아 맛 요거트다.
갑작스러운 야근에 대한 화가 풀릴 만큼 맛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 하다.
대체 왜 갑자기 야근을 해야 하는 걸까?
생각해보면 그레이프의 말대로 야근을 해야 하는 게 맞기는 하다.
내가 하고 있는 업무는 정말 단순 노동에 가까운 작업이다.
자료를 보고 데이터로 입력해야 하는, 단순히 글을 옮겨쓰고 정리해 적용하는 작업인 만큼 작업에 시간이 든다.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작업시간을 단축하는 건 어려우며, 작업량이 늘어나면 그대로 내 작업시간도 늘어나게 되는 일이다.
그레이프가 검토하는 데에는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지 않지만, 검토하기 위한 자료를 만드는 시간은 오래 걸린다.
그레이프가 업무 속도를 올리고 싶다고 하면 당연히 내가 일을 더 많이 해야 하고, 더 많은 자료를 만들고, 더 많은 시간을 써야 한다.
시간이 부족하면 야근해야 하는 것도 맞다.
나는 내가 싫은 것과는 별개로 그레이프가 작업 속도를 올리고 싶어한다면 야근을 해야 하는 건 맞다고 납득하며 혼자만 있는 사무실에서 요거트를 전부 먹어치웠다.
전부 먹은 요거트를 들고 쓰레기통에 버리자 사무실 입구가 열리며 과장과 다른 직원들이 들어온다.
“이야, 새 메뉴 맛있네? 다음에도 이거 먹을까 봐.”
“그러게? 바삭바삭하게 잘 튀기네…응…? 앵거 씨, 잠깐만.”
“네?”
그대로 잠깐 화장실에 갔다 오려고 사무실 문으로 다가가던 나는 갑자기 과장이 불러세워 고개만 뒤로 돌려 뒤돌아봤다.
과장은 가만히 쓰레기통을 내려다보더니,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벌레를 쫓는 것처럼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볼일 봐.”
이럴 거면 대체 왜 불러세운 거지.
나를 부르자마자 부른 이유를 깜빡한 건가.
치매에 걸릴 기미가 보이는 과장을 뒤로한 나는 빨리 화장실 갔다 와서 좀 더 잠이나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사무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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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셨습니다~”
점심시간이 끝난 뒤, 퇴근 시간까지 아무 일 없이 시간이 지나갔다.
나는 어차피 야근해야 한다는 생각에 일에 제대로 집중하지 않고 대충대충 일하며 적당히 시간을 때웠다.
평소에는 빨리 일을 끝내두고 일이 아직 안 끝난 척을 하며 시간을 보냈었는데, 오늘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팀장님, 퇴근 안 하세요?”
퇴근 시간이 되자 직원들은 모두 집에 돌아갈 준비를 했지만, 나와 그레이프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있는 내게는 아무런 말도 안 하던 직원들은 그레이프가 퇴근하지 않는 걸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는지 하나둘씩 말을 걸고 지나갔다.
“아, 저는…오늘 야근 좀 하려고요.”
“야근? 왜요? 일이 안 끝났어요?”
“일이 안 끝났다기보다는…조금 더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먼저 퇴근하세요, 조금만 있다가 퇴근할 거에요.”
늘 정시퇴근, 일과 생활의 밸런스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직원들을 제시간에 퇴근시켜야 한다는 말을 강조하고 있는 그레이프가 야근하는 일은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다.
그레이프가 정말로 필요할 때만, 정말 급할 때만 야근한다는 걸 알고 있는 직원들은 그레이프의 말을 듣고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저희 바쁜 일이 있었나요? 저도 남을까요?”
“아니…조금, 아주 약간이에요.”
팀장이 남는다고 직원도 남겠다고 말한다니, 평소에 늘 직원들을 생각해줬기에 나올 수 있는 말이다.
그레이프는 정말 괜찮다며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고, 빨리 퇴근하라고 사람들을 부추겼다.
그렇게 퇴근하던 사람 중 하나인 과장은 내가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는 걸 보고 갑자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내게 다가와 물었다.
“앵거 씨는 퇴근 안 해?”
“저는….”
“아! 앵거 씨는…제가 일 좀 도와달라고 했어요.”
과장의 말을 들은 그레이프가 갑자기 다가와서 나 대신 대답해버렸다.
그러자 과장은 묘한 눈으로 나와 그레이프를 번갈아 보더니 혀를 차며 말했다.
“보나 마나 또…앵거 씨, 그러길래 일 열심히 하랬잖아.”
“예?”
“팀장님이 고생이 많으시네요, 어휴….”
“고생은요! 얼른 가세요, 얼른!”
그레이프는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과장의 등을 떠밀어 사무실 밖으로 내보냈다.
과장이 한 말이 머릿속에 남으며 황당하게만 느껴진다.
일을 열심히 하라니…?
나름 열심히 했는데도 그레이프가 야근하자고 한 건데?
“다, 다들 갔네요…조, 조금 덥죠?”
“예….”
모두를 내보낸 그레이프는 다른 직원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것까지 확인한 뒤 내 바로 옆자리에 의자를 끌어오며 말했다.
나는 사람들이 빠져나간 사무실 안이 조금 서늘하게 느껴졌지만, 그레이프는 나랑 느끼는 게 다른 것인지 덥다고 말하며 갑자기 셔츠 단추를 풀었다.
셔츠가 열리고 커다란 가슴이 드러나게 된 그레이프가 얼굴을 붉히고 나를 가만히 바라본다.
“야근…할까요?”
일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끈적하면서도 조용한 목소리다.
나는 그레이프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걸 느끼면서도, 야근을 한다는 현실에 대한 불만에 성욕이 억눌리는 것을 느끼며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빨리 끝내죠….”
야근이라고 해도 뭔가 특별할 건 하나도 없었다.
평소에 일하고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작업하고, 그레이프가 추가로 요구한 분량을 만든다.
일하면서 미리 만들어둘까도 싶었지만, 지금 그레이프가 야근하는 목적은 좀 더 많이 만들고 좀 더 빨리 만들자는 것이다.
열심히 해서 이 정도면 야근하자는 말은 안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만들어둬도, 그레이프가 여기에서 조금만 더 하자고 하면 괜히 내가 멋대로 일을 늘린 게 되어버린다.
지금부터 정확히 할당량만큼만 열심히 한다.
나는 빨리 끝내고 퇴근할 생각으로 일에 집중했다.
“…앵거 씨 일 엄청 열심히 하시네요.”
“예….”
“야, 야식 시킬까요?”
“아뇨, 야식 먹을만한 시간 되기 전에 무조건 끝내야죠.”
그레이프는 내 바로 옆자리에서 나를 감시하듯 가만히 앉아있었다.
안 그래도 빨리 끝내고 퇴근하고 싶은데 옆에서 감시까지 하니 일에 몰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시선을 모니터에 고정한 채 계속해서 타자를 두들기자 그레이프가 어째서인지 조금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낸다.
“이게 아닌가….”
“네? 뭐 틀린 거 있어요?”
“아뇨? 잘하고 있어요, 잘하고 있는데…으으음…아니에요…하아아….”
쓰고 있는 내용 중에 틀린 건 전혀 없는데 뭐가 틀렸던 건지 계속해서 한숨을 내쉰다.
조금 신경이 쓰이긴 하지만 빨리 퇴근하려면 일에 집중해야 한다.
나는 그레이프의 반응을 완전히 무시하고 계속해서 일했다.
목표는 한 시간 안에 전부 끝내는 것이다.
“…앵거 씨?”
“네?”
“그, 쉬엄쉬엄…하시는 게….”
“빨리하고 집 가고 싶어서요.”
“…같이 야근하는 거 싫어요?”
“야근은 싫죠.”
나는 너무도 당연한 얘기를 하며 더 이상 말 걸지 말라는 의미에서 손가락을 내 입술에 가져다 댔다.
일에 집중하고 싶다.
“…이게 아닌데.”
계속해서 신경 쓰이게 칸막이 건너편으로 가 칸막이 위에 가슴을 올리며 내려다보기도 하고, 책상에 엉덩이를 올리며 앉기도 하고, 바로 옆에서 내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대기까지 하는 그레이프를 전부 무시하며 일에 몰두한 결과, 한 시간을 조금 넘겼을 때쯤 그레이프가 더 해달라고 한 업무를 전부 끝마칠 수 있었다.
짜고 난 자료를 회사 데이터베이스에 올리고 그레이프에게 업무용 메일까지 보낸 나는 탈진한 사람처럼 의자에 몸을 묻고 한숨을 내쉬며 그레이프에게 얼른 자리로 가라고 손짓했다.
“자, 그레이프 씨도 빨리 가서 일해 주세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