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 야근 (5)
과장이 이상하게 웃는 얼굴을 내밀며 말한다.
나는 대체 왜 갑자기 이러는 건지 이해하기 힘들어 과장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안 좋은 일이라뇨?”
“응? 아냐~아무 일도 없었으면 됐고, 그냥 어제는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하더니 왜 오늘은 인사 안 하나 한 거지.”
“…인사해드릴까요?”
“인사를 해드린다니? 말이 좀 그렇다? 진짜로 오늘 기분 안 좋은가 봐?”
말하는 것만 들어선 뭔가 내게 안 좋은 일이 있나 걱정하는 모습으로 보일 수 있지만, 과장의 얼굴은 말을 하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기분 나쁜 미소를 머금고 있어 나를 전혀 걱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누군가를 걱정한다면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을 짓지, 웃는 얼굴로 말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내가 아는 정상적인 범주 내의 사람이라면 그렇다.
“과장님이야말로 혹시 무슨 일 있으십니까?”
“나? 왜? 뭐 걱정돼? 앵거 씨가?”
“아뇨, 그냥…평소에는 머리 세팅 그렇게 안 하셨잖아요? 걱정되는 게 아니고 좋은 일 있으신 건가 해서 물어본 겁니다.”
나는 과도할 정도로 딱딱하게 세우고 있는 과장의 짧은 머리를 턱짓하며 물었다.
손가락을 대면 찔릴 것 같다.
“하아…이럴 때 보면 앵거 씨는 참 눈치가 없단 말이야? 왜 내가 꾸몄는지 몰라?”
꾸민 건가…?
파인애플 가시 같은 머리 모양인데, 정말 이걸 꾸민 거라고 해도 좋을까?
나는 멍한 눈으로 과장을 가만히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팀장님이 꾸미니까 꾸미지? 요즘 아주 여성미가 장난 아니시잖아? 무슨 의미겠어?”
“…무슨 의미인데요?”
“…내가 어제 괜히 뭐라고 했네, 일부러 일 뺏어갈 생각도 못 하는 사람인데.”
과장은 갑자기 나를 아주 멍청한 사람 대하듯 비웃으며 말하고는 그레이프에게 들리지 않게 하고 싶은지 조금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왜 갑자기 꾸미겠어? 남자한테 관심이 생긴 거지.”
“…남자한테요?”
“팀장도 결국 여자잖아? 짝을 원하니까 자기 좀 봐달라고 꾸미는 거 아냐…이것도 몰라?”
그레이프가 남자를 원해서 다른 남자의 시선을 끌고 싶어서 야하게 입는다?
재미있는 의견이다.
상당히 설득력이 느껴지는 생각이기도 하다.
“그거랑 과장님이 머리를 올린 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하지만 그레이프가 남자를 만나고 싶어하는 게 진짜라고 해도 그게 왜 과장이 머리를 삐죽삐죽하게 올리는 이유가 되는 건지는 모르겠다.
둘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 정말 궁금해서 순수하게 물어보자, 과장이 황당해 하며 한숨을 쉬었다.
“와…진짜 앵거 씨 눈치 끔찍하다…진짜 모르는거 아니지? 이력서에 남중 남고 공대 입대 쓰여 있길래 이런 거 모를 것 같기는 했는데…당연히 팀장님하고 가까워지고 싶어서 이러는 거지…어휴, 한심하다 참….”
“아니…음….”
나는 정말 진심으로 나를 한심하다 여기고 멍청하게 보며 비웃는 과장의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하려던 말을 삼켰다.
과장이 팀장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머리를 올렸다는 건 나도 알 수 있다.
내 질문은 왜 머리를 올렸는지에 대한 이유가 아니라 그 얼굴에 그 외모에 그 머리스타일로 정말 그레이프가 관심을 가져줄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짓을 하고 다니는 것인지…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헛고생을 하는 것인지, 거울을 안 보고 사는 건지…여러 가지로 과장이 그레이프가 봐주길 바라며 꾸민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되고, 진심으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를 물어보는 것이었다.
“에휴~일이나 해. 야근이나 하지 말고.”
“아, 예.”
과장은 나랑 대화하는 게 질린 듯 손을 흔들며 자리로 되돌아갔다.
안경도 무슨 각진 부분으로 과일이라도 깎아 먹을 것처럼 생긴걸 쓰고 있고, 옷도 핑크색 셔츠에 머리는 선인장과 파인애플의 중간 정도 되는 머리스타일을 해놓고….
만약 그레이프가 정말로 남자친구를 만들고 싶어서 꾸미고 다니는 거라고 해도, 움직이는 뾰족 선인장에게는 관심을 안 주지 않을까?
자기 입으로 그레이프가 남자친구를 가지고 싶어하는 것 같다고 해놓고…왜 자신이 남자도 친구도 될 수 없는 외모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걸까?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다.
과장이 돌아간 뒤 나는 과장의 말대로 야근하지 않도록 열심히 일하며 그레이프가 남자친구를 만들고 싶어한다는 말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레이프는 지금까지 회사에서 남자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고 말하고 다녔고, 옷차림도 단정하게 하고 다녔다.
그런데 아무리 단정하게 입어도 몸이 야해서 야하게만 보였던 그레이프가 어느 날부터인가 옷까지 조금씩 야하게 입는다.
연애하고 싶어서 야하게 옷을 입는다?
짝을 찾을 때 구애를 하며 자신을 꾸미는 동물의 모습을 생각하면 과장의 생각도 어느 정도는 일리 있는 얘기다.
만약 내가 그레이프와 친해지지 않았고, 자위영상을 올리는 계정을 모르고, 섹스를 하지 않았다면 과장의 얘기를 들은 순간 곧바로 아, 그레이프가 남자친구를 만들고 싶어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레이프는 연애할 수 있다는 말은 했지만, 연애하고 싶다는 얘기는 한 적이 없다.
이 차이는 굉장히 크다.
밥을 먹을 수 있는 것과 밥을 먹고 싶은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
그레이프는 나와 섹스하면서 마법소녀는 남자친구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했다.
정액 중독이 되면 곤란하다거나, 섹스하면 너무 기분 좋아서 위험하다거나….
그레이프는 매일매일 자위해댈 정도로 성욕이 많은 여자니까, 정말로 남자친구가 생기면 매일매일 섹스만 하며 지낼까 봐 경계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레이프가 원하는 건 남자친구가 아니라 그냥 회사에서 느낄 수 있는 야한 시선 같은 게 아닐까?
그레이프가 어떤 상상을 하며 자위하는지를 생각해보면 남자친구를 만드는 것보다는 그날 자위할 자극을 일상에서 찾고 있다는 쪽이 더 신빙성이 높아 보인다.
비밀 계정에서 그레이프가 하는 행동을 다 알고 있는 나만이 가능한 추측이다.
결론을 내리자면, 과장의 추측은 틀렸다.
그레이프는 남자친구를 원해서 저렇게 은근하게 야한 옷차림을 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고 해도 과장이 하고 있는 행동은 헛수고다.
만약 내가 그레이프라면 과장의 뾰족한 머리 모양을 본 순간 포도를 하나 사와 포도알을 하나하나씩 꽂아주며 생리적으로 연애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줬을 것이다.
과장에게 어울리는 짝은 그레이프가 아니라 부장이 전자파를 먹어준다는 이상한 미신으로 키우고 본체 위에 올려두고 키우고 있는 선인장이다.
“벌써 점심시간이야? 오늘 시간 빠르네.”
“팀장님~같이 식당 가요~”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나는 오늘은 평소만큼 일에 집중하지 않았던 탓에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시간을 확인할 수 있었고, 곧바로 귀에서 이어폰을 뽑으며 샌드위치를 꺼냈다.
그레이프는 오늘은 다른 여직원들과 같이 식사를 하기로 한 것인지, 다 같이 사무실을 나갔다.
다른 직원들도 모두 식사를 하러 나가고 나는 혼자만 남은 사무실에서 샌드위치를 빠르게 먹어치우고 의자를 뒤로 젖혀 낮잠을 자려 했다.
“앵거 씨?”
“…팀장님?”
의자에 누워 눈을 감고 있자 여직원들과 함께 나갔던 그레이프가 돌아와 내 어깨를 두들겼다.
나는 가만히 눈을 떠서 그레이프를 올려다봤다.
커다란 가슴에 얼굴이 완전히 가려져 있던 그레이프는 고개를 조금 숙여 나와 눈을 마주쳤고, 주변을 두리번거린 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늘도 샌드위치에요?”
“맛있어요.”
“…탕비실 냉장고에 제 이름 적어둔 요거트 넣어놨는데, 그거 먹을래요?”
그레이프가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내게 뭔가 먹을걸 주고 싶어 한다.
나랑 친해지고 싶다더니, 혹시 사람 대 사람이 아니라 사람 대 애완동물 같은 관계로 친해지고 싶은 걸까.
이틀 연속으로 먹을 것을 받는 건 조금 아닌 것 같아 사양하려던 나는 오늘도 로제와 섹스한 탓에 배가 조금 고픈 느낌이 들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이름은 왜 적어뒀어요?”
“안 적어두면 부장님이 모르는 척 먹어버리더라고요.”
“아하….”
나는 냉장고에 아무것도 넣어둔 적이 없어 몰랐지만, 부장답다면 부장다운 행동이다.
그레이프는 가만히 누워있는 나를 조용히 내려다보더니 아무도 없는 사무실 안을 괜히 힐끔거리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대로 어깨에 손을 올린 그레이프가 조심스럽게 어깨를 주무른다.
“으어어억, 잠깐…아파, 억….”
“몸 진짜 너무 안 좋은 거 아니에요? 겨우 이걸 아파하면 어떡해요.”
“아니, 팀장님은 마법소녀…억…!”
“둘만 있는데 왜 계속 팀장이에요?”
“그…레이프 씨는 마법소녀니까, 아픈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마법소녀는 변신하지 않아도 일반인보다 훨씬 강력한 신체를 지닌다.
변신하면 철근을 얇은 철사처럼 구부리고 주먹으로 바닥을 깨는 그레이프 또한 지금 상태로도 아마 손가락으로 동전을 구부리는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그 손가락으로 내 어깨를 주무르고 있으니 아플 수밖에 없다.
“지금 저 진짜 섬세하게, 평범한 여자들 정도만 힘쓰고 있는 건데요?”
“아니, 진짜로 아파요, 그만, 그만….”
“흐으음….”
그레이프는 그만해달라는 말을 전부 무시하고는 계속해서 내 어깨를 지그시 누르고 문지르며 안마했다.
그대로 목덜미를 잡아서 주무르는 순간 오싹한 느낌이 든다.
지금은 그런 의도가 느껴지지는 않지만, 이대로 그레이프가 마음만 먹으면 내 목을 부러뜨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며 공포심이 든다.
약해져 있지 않은 마법소녀는 위험하다.
언제든 나를 죽일 수 있다.
“저, 저기…그레이프 씨, 목은 조금…무서운데요….”
“목이 왜요? 무섭다뇨?”
나는 그레이프가 이대로 내 목을 부러뜨릴 것 같다는 말을 하려다가, 그렇게 말하면 그레이프가 자기는 그런 짓 안 한다며 손을 치워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을 치우게 하려면 치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필요하다.
“아니…훈련병때, 마견한테 목덜미를 물릴 뻔 해서….”
“아….”
회식 때 들은 얘기대로라면 그레이프는 어린 시절 개에게 물린 적이 있어 개 자체를 무서워한다.
이렇게 말하면 손을 치워주겠지 하고 빙금 지어낸 거짓말을 꺼내자 그레이프가 곧바로 목에서 손을 떼 줬다.
오싹한 느낌이 사라지고, 긴장되었던 뇌가 녹아내리듯 풀어진다.
“미, 미안해요…그런 줄은 몰랐어요…안마만 해도 무서울 정도라니.”
“아뇨, 괜찮아요…그런데 왜 갑자기 주물러 주시는 거죠?”
내게서 손을 떼고 조금 떨어져 준 그레이프를 올려다보며 묻자, 그레이프가 그제야 본론을 얘기했다.
“그게, 애, 앵거 씨 괜찮으면…오늘 같이 야근하고 싶어서….”
“네?”
나는 상상도 하지 못한 얘기를 듣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불만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그레이프를 노려봤다.
“저 야근하기 싫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