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기둥서방 (3)
갑자기 무척 기분이 좋아진 그레이프는 나보다 훨씬 세면서 연약한 척하고 내게 머리를 기대며 거리를 걸었다.
그레이프는 날 봐도 전혀 기억에 남지 않아 모르는 것 같았지만, 나는 몇 번 봤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애초에 카페에 있다가 그레이프가 나타나면 남자들의 시선이 다 한곳으로 집중되며 분위기 자체가 변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내 기억대로라면 카페에서 그레이프를 본 적은 많아야 네 번 정도로, 몇 번 되지 않는다.
그레이프에게 정확한 사실을 말해주려고 하자 내 생각을 감지한 것처럼 오른손이 갑자기 욱신거린다.
입을 열려고 하면 욱신거리고, 말하려고 하면 또 욱신거린다.
어쩐지 오른손에 숨어있는 촉수가 입 좀 닥치라고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입을 다물고 그레이프에게 끌려다니자, 어느새 회사들이 밀집한 구역 옆의 번화가에 도착했다.
쇼핑센터와 여러 가게들 사이에 쇼핑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돈을 받고 짐을 잠시 맡아주는 보관소에 도착한 뒤, 곧바로 카운터로 가 짐을 맡겼다.
"어, 어서오세요…윽."
나는 코를 움찔거리며 인상을 쓰고 있는 직원에게 퀴퀴한 냄새가 나는 배낭을 건네주었다.
조금 묵직한 느낌에 한 손으로 힘을 쓰며 건네주었는데, 손을 놓으니 직원이 배낭을 잡은 채 그대로 넘어져 버렸다.
직원에게는 너무 무거웠던 건지, 들지도 못해 쩔쩔매고 있다.
“무, 무게가….”
“제가 옮겨 놓을게요.”
“어?”
배낭을 들지 못하고 고생하는 모습을 보던 그레이프가 한 손으로 가볍게 배낭을 들어 카운터 너머로 들어가 내려놓고 오자 직원은 묘한 표정을 하고 나와 그레이프를 번갈아 바라봤다.
아무렇지도 않게 무거운 배낭을 들고 옮기는 게 신기한가 보다.
짐을 맡기고 가벼워진 나는 그레이프가 데려가 주는 대로 순순히 따라가 쇼핑센터 근처의 미용실로 들어갔다.
나는 와본 적도 없는 남성 커트 전문점이다.
“머리 모양은 어떻게 해드릴까요?
“대충 해 주세요, 그냥 적당히.”
“아뇨! 옆머리 좀 깔끔하게 해 주시고요, 체격이 좋으니까 좀 시원하게? 아, 그래도 너무 짧게는 하지 말고….”
머리 모양까지 그레이프의 마음대로 커트당하고 나자 어쩐지 회사원이나 백수가 아니라 젊고 몸 좋은 운동선수 같은 외모가 되어버렸다.
면도를 다 하고 거울을 비친 익숙지 않은 모습에 어색해하고 있자 어느새 그레이프가 뒤에서 결제를 끝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입꼬리가 올라간 채로 계속 내 쪽을 힐끔거리고 있다.
“옆이 너무 짧은 거 아냐?”
“계속 신경 쓰였는데 잘됐네요! 다음엔 그 이상한 것 좀 벗고 깔끔한 옷 좀 입으러 가요.”
“이상하다니….”
"너무 낡았어요."
아직 3년밖에 입지 않은 내 운동복을 이렇게 혹평하는 건 조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미용실에서 나오고, 그레이프와 쇼핑센터로 걸어가고 있자 어느 순간부터인가 옆에서 그레이프가 팔을 감싸 안고 가슴을 살살 문질러오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도 왠지 나를 부러운 눈으로 힐끔거리는 게 느껴진다.
하긴, 그레이프 정도의 여자를 옆에 끼고 다니면 부러워 할 만하지.
“이거 괜찮은데.”
“그 옷을…입는다고요?”
“검은색 좋잖아.”
“예전에도 몸 꽤 괜찮았고, 지금은 좋은데 굳이 검은 옷을 입을 필요가 있어요? 앵거, 몸도 좋은데 그냥 밝은색 옷으로 몸 좋다는 게 더 드러나게 입는 건 어때요? 핏도 검은색인데 너무 펑퍼짐해서 전혀 느낌이 안 살잖아요. 여기 이거 입고 와봐요. 타이트한 라인이니까 굳이 검은색을 입지 않아도 약간 슬림하게 떨어질 거에요.”
“아니…검은색…세탁 자주 안 해도 돼서 편한데….”
“저기, 손님…그냥 가만히 계시는 게….”
옷가게에 도착한 뒤 그레이프는 내 의견은 전부 무시해버리고 옷을 골라줬다.
심지어 옷가게 직원마저 내 의견을 무시한다.
그레이프의 외모를 보고 나를 무시하는 건가….
나는 조용히 그레이프가 준 옷을 챙기고 탈의실로 들어가 갈아입고 나왔다.
“이거 어울릴 것 같았어요! 저거 다 주세요!”
“네, 손님! 아까 그 옷하고는 전혀 다르네요!”
“내 운동복이 어때서….”
분명 그레이프는 나랑 쇼핑하고 싶다고 했는데, 이건 내 자존심을 깎아내리기 위한 시간이 아닐까?
검은색에 카모플라쥬 패턴이 가로줄로 들어가고 분홍색과 파란색 세로줄로 포인트까지 챙긴 내 운동복이 어때서….
방위군 시험을 준비할 때부터 입은 애착이 가득한 옷이다.
“이 옷은 버려도 되죠?”
“어째서?”
“어째서라니…보풀이 일어나는 걸 넘어서 너무 입어가지고 엉덩이랑 무릎에서 빛이 나기까지 하잖아요…조금 더 입으면 찢어지는 거 아니에요?”
하지만 그 애착도 여기까지인 모양이다.
그레이프의 말대로 내 운동복은 너무 자주 입어서 상태가 좀 안 좋긴 했다.
옷가게에서 여러 가지 옷을 입어본 나는 셔츠 위에 후드집업, 블랙진이라는 무난한 패션에 휘감겨 만족스러워하는 그레이프의 손에 끌려나갔다.
그레이프의 한쪽 손에는 내가 입어본 옷들이 가득 들어있는 옷 가방이 보인다.
“마침 얼마 전에 보너스 나왔는데 잘됐네요! 그 배낭 안에 있던 것들 다 옷이었어요? 나중에 좀 버리고 오늘 사준 거 입고 다녀요!”
“예전 옷이랑 섞어서 입고 다니면….”
“앵거는 좀 더 미니멀하게, 심플하게 입는 게 어울려요. 몸이 좋은데 왜 시선을 다른데에 쏠리게 디테일이 많은 옷이나 검은 옷만 입는 거에요?”
“그런 옷들이 세탁하지 않아도 더러워진 티가 안 나잖아.”
“제가 세탁해 줄 테니까 앞으로 이 옷들만 입으세요.”
세탁까지 해주겠다면야, 기꺼이 입어줄 수 있다.
옷까지 사준 그레이프는 어느새 해가 지고 밤이 된 거리를 함께 걷다가 같이 사진을 찍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나는 그레이프의 말을 듣고 비전폰을 주머니에서 꺼냈다가, 그제야 내 비전폰이 망가져 있었다는 게 떠올랐다.
그레이프는 화면이 깨지고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는 내 비전폰을 보더니 깜짝 놀라며 말했다.
“왜, 왜 이래요?!”
“불도 조금 붙었고, 떨어뜨려서?”
“불…생각보다 조금 크게 불이 났었나 봐요….?”
내 집이 아니고 리프의 비밀 연구소였지만, 에스더가 불을 붙이긴 했다.
“상태가…하아아…비전폰도 새로 사야겠네요.”
그레이프는 내 손을 잡고 트루비전의 전자기기 매장으로 데려가더니 새 비전폰까지 사줬다.
원래 쓰던 구식 모델이 아닌, 최신 모델이다.
내가 가지고 있던 비전폰보다 강도도 더 높고 속도도 더 빠르다.
“무, 무이자 할부…몇 개월까지 되나요?”
“무이자는 5개월까지입니다!”
“5개월이면…더, 더 길게 하는 법은 없어요?”
“이번에 새로 하는 이벤트에 가입하시면 추가금액이 아주 조금 더 발생하는데요~대신 좀 더 오랜 기간동안 무이자 할부가 되는데 어떠세요?”
“아니, 돈을 더 쓰는 방법 말고….”
“무슨 일이야?”
“히잇! 아니에요! 결제해주세요!”
새 비전폰을 가지고 놀던 나는 그레이프가 결제를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아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그러자 그레이프가 곧바로 결제해버리고는 내 팔을 안고 끌고 나갔다.
어쩐지 결제를 하는 그레이프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던 것 같다.
구매를 하며 직원이 새 비전폰을 사며 부서져 버린 기존의 비전폰 안에 들어있는 데이터를 옮겨주겠다고 말했지만, 곧바로 거절했다.
데이터를 옮겨주려면 다른 컴퓨터에 비전폰 두 대를 동시에 연결해야 한다.
부서진 비전폰 안에는 그레이프의 섹스영상과 래피드의 보지를 찍은 사진 같은 게 가득하다.
혹시라도 매장 안의 컴퓨터에 데이터가 남게 되면 곤란하다.
메신저 안의 대화 내용을 연동하려면 옮기긴 해야 하지만, 따로 내가 옮기는 게 좋을 것 같다.
“바, 밥 먹으러 갈까요?!”
그레이프는 조금은 힘겨운 듯 웃으며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면서 계속해서 비전폰을 만지던 걸 생각해보면 비전넷에 검색해서 찾은 식당 같았는데, 나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식당이었다.
그레이프가 나를 데려간 조용한 술집 같은 곳으로, 전골 요리를 하는 곳이었다.
가게 안은 칸막이로 구역이 나뉘어 있었고, 어째서인지 중년 정도의 남녀 커플이 많이 보였다.
좌석에 앉아 메뉴판을 받자 메뉴에 큰 글씨로 ‘남자에게 좋은 활력의 상징, 100% 자연산 장어전골에 비법 소스를 사용! 30년 장사를 걸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라는 글자가 적혀있었다.
메뉴판에 적힌 글자를 읽자마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걸로 주세요! 아…저 비전넷 보고 왔는데…이쪽은….”
“아하…알겠습니다 손님, ‘엑기스’ 말이시죠?”
“저, 저기…조용히….”
“죄, 죄송합니다. ‘스페셜 전골’ 하나, 장어 전골 하나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이상하다, 왜 이렇게 춥지?
가게 안에는 냄비 요리가 끓는 소리가 가득하고, 뜨거운 공기로 가득 차 있는데…이상하게 춥다.
요리는 얼마 되지 않아 바로 나왔다.
요리가 나오는 게 꽤 빠르다.
손님이 많아서 그런지 미리 준비해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쪽의 남성분께…스페….”
“제가! 서빙할까요?!”
“아! 아닙니다! 앉아 계세요 손님!”
그레이프는 빨리 먹고 싶은지 직원이 서빙해주는 걸 다 기다리지 못하고 직접 놓아주려 했지만, 직원이 곧바로 사양했다.
나도 배가 고프지만, 그레이프도 배가 고픈 모양이다.
그레이프와 내 전골이 서로 따로 나왔고, 서로 조그마한 냄비의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주문할 때 분명 서로 다른 메뉴로 주문했던 것 같은데, 그레이프의 냄비를 보니 내 쪽과 전혀 달라 보이는 게 없었다.
아무리 봐도 똑같은 요리인데 대체 뭐가 다른 걸까.
“그레이프, 내 거랑 그거 뭐가 다른….”
“잘 먹겠습니다~! 앵거도 빨리 먹어요, 맛있을 때!”
“어…응.”
서빙되어 온 요리는 우엉과 장어…그리고 여러 야채가 들어간 짭짤하고 단맛의 전골이었다.
처음 먹어보는 맛이지만 나쁘지 않은 맛이다.
그리고 어쩐지 무척 진하고 먹을수록 속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있었다.
냄비 요리여서 그런지 땀이 날 정도로 뱃속이 따뜻하다.
“맛있다~그쵸?”
“응, 맛있네.”
“많이 먹어요! 부족하면 더 시키면 되니까!”
그레이프는 그렇게 말했지만, 한 냄비로도 혼자 배를 채우기에는 충분한 양이다.
천천히 식사하고 있자 그레이프가 계속해서 내 쪽을 힐끔거린다.
먹는 것만 봐도 좋아하는 것처럼 한입씩 삼킬 때마다 입꼬리가 올라간다.
뱃속은 따뜻한데, 어째서인지 점점 추워진다.
오한을 없애기 위해 더 먹으면 먹을수록 따뜻한데도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아참…그러고보니까 배낭은 왜 들고나온 거에요?”
“응?”
그렇게 한동안 조용히 식사하고, 배가 불러올 때쯤 그레이프가 상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손에 받치며 물어왔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장어를 먹으며 대답했다.
“집에서 쫓겨나서.”
“…네?”
“집주인한테 쫓겨났어. 계약서에 강제 퇴거 사항이 적혀있었는데, 거기 해당돼서 보증금도 못 받았고.”
불이 났다는 얘기를 할 때 아주 잠깐이지만 리프에 대해서 그레이프에게 일러버릴까 고민했지만 입을 다물었다.
이미 리프는 내 보지교육 최면노예 샌드백…아니, 최면교육 보지노예 샌드백이었다.
리프는 앞으로 내게 최면을 가르쳐줘야 하기도 했고, 괜히 내 샌드백을 그레이프에게 때리게 해 망가뜨릴 필요는 없었다.
그레이프는 내가 집에서 쫓겨났다는 얘기를 듣고 멍한 얼굴이 되더니, 무척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월세도 일 년 가까이 밀린 상태를 유지했고, 불도 냈고, 집안 상태도 엉망에 파손까지 있었다.
불이 난 건 사고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일이어서 문제가 되지 않을지 몰라도 고의 파손과 월세 밀림은 강제 퇴거 사유에 속했다.
그레이프가 부숴놓은 거고 섹스하다가 이성을 잃고 그런 거니 고의는 아니었지만…바닥을 꺼트리고 벽을 파낸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월세가 밀렸다고요…? 그럼 밀린 월세는? 쫓겨났어도 내야 하는 것 아니에요? 얼마나 밀렸어요? 보증금으로 채워준대요?”
“아, 내야 하는 건 맞는데…그 약들 있잖아? 약 가져가고 그걸로 봐주겠대.”
“약…그거?! 영양제들요?!”
그레이프는 내 말을 듣고 갑자기 기겁하고 큰 소리를 내며 일어나더니,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느끼고 얼굴을 붉히며 천천히 앉았다.
“그, 그 약이 얼만데…! 월세가 밀렸어도…!”
“아마 월세를 다 내면 돌려줄지도 모르지만….”
“얼만데요! 낼게요!”
“조금 많이 밀렸는데?”
정확하게는 두 달 치 정도 밀려있었지만, 사실 전기세도 조금 밀려있었다.
집주인에게는 방을 뺄 때 한 번에 내겠다고 말해서 미루고 있는 상태였다.
“왜, 왜 밀린 건데요…?”
그야 당연히 밀리게 둘 수 있으면 좀 밀리게 하고 내는 게 나한텐 이득이기 때문이다.
집주인이 성격이 나쁘지 않아서 한두 달 밀린 거로는 뭐라고 하지도 않았고, 밀린 걸 한번에 다 주지 않고 한 달 치만 줘도 더 기다려주고…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를 쫓아낼 줄이야.
속마음은 그랬지만, 그레이프에게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아…힘들어서….”
“읏….”
그러자 그레이프는 아무 말 없이 입을 닫더니, 상 위에 손을 올리고 손가락을 까딱까닥 움직였다.
상을 손끝으로 톡톡톡톡 치며 한숨을 내쉬기까지 한다.
영양제는 이미 대부분 먹은 상태였지만, 그 남은 약들의 가격이 아까운 모양이다.
“하아아…그래서 내일 우리 집에 오기로 해놓고 오늘 저 배낭을 들고 회사로 온 거에요? 짐을 다 싸서?”
“응. 갈 곳이 없어서.”
“하아아아…아니, 그래도…그 약은…못 구하는 건데…어?”
약에 대해서 계속 미련이 남는 것인지 계속해서 한숨을 쉬며 속상해하던 그레이프는 갑자기 머릿속에 의문이 떠오른 듯 말을 멈추더니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앞으로 어디서 자요?”
나는 오늘 잘 곳에 대한 얘기를 듣자마자 미리 생각해둔 얘기를 입 밖으로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 나 호텔비 좀 내주면 안 될까? 잘 곳이 없어.”
내일 만나기로 한 건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당장 내게 닥쳐있는 상황이 더 중요했다.
오늘도 그렇고, 내일 이후에 잘 곳이 없다.
비전폰까지 사줄 줄 몰랐지만, 앞으로 연락하는 것도 그럭저럭 해결되긴 했고, 내게 지금 필요한 건 당장 잘 곳이었다.
내가 생각한 방법은 그레이프에게 돈을 빌려서 한동안 호텔에서 머물고, 래피드의 머리카락을 뽑아 얼굴을 알고 있는 소수의 사이트 유저, 애쉬와 래피드의 머리카락을 모으는 회원에게 따로 연락해 판매하는 것이었다.
또는, 리프에게 책임지게 해 집을 하나 사달라고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었다.
문제는…내게 리프의 연락처가 없다는 점이었다.
어차피 연락하지 않으면 최면 때문에 벌칙을 수행하게 될 테니 못하면 알아서 해야 하는 거고, 연락이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 물어보지도 않았다.
이미 최면을 가르쳐줄 시각도 리프에게 말해 지정해 뒀으니, 주변 사람들에게 보지를 보여주며 자위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알아서 하겠지.
집이 없는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는 일이기에 걱정이 되지 않았지만, 문제는 지금이었다.
리프와 약속한 날짜는 앞으로 며칠은 기다려야 했다.
연구소를 수리해야 한다고 말해서 길게 잡아준 것이지만, 집에서 쫓겨났다는 걸 알았다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당장 잘 곳이 없다.
“잘 곳이 없어요?”
“응, 약이야 뭐…나중에 돈 주면 어쩌면 돌려줄지도 모르지만…아, 월세 다 내고 수리비도 내면 다시 살게 해주려나…? 그런데 약값이 월세랑 그런 걸 다 채울 정도가 될까?”
“그야 당연히 훨씬…아, 안 되죠! 월세가 얼마인지 모르지만 그만큼 비싸겠어요?”
그레이프가 사준 약들은 가격도 알 수 없는 녀석들이라, 그레이프가 얼마를 주고 사 왔는지 알 방법이 없다.
마법소녀이기에 가능한 루트를 사용했거나, 방위군을 통해서 구매했거나…둘중 하나일 텐데, 마법소녀여서 구매가 가능한 거였어도, 방위군을 통해서 구매했어도 어느 정도 할인이 들어가지 않았을까?
애초에 비싼 약이라고 해도 이미 많이 먹은 상태였다.
그레이프도 아마 밀린 월세만큼은 아닐 거라고 하니…차라리 이렇게 쫓겨난 게 나에겐 이득인 것 아닐까 싶어진다.
“저기, 그러면…갈 곳 없는 거죠?”
“응.”
“…한동안?”
“한동안. 그래서 말인데 호텔비를 조금….”
“아니! 마침 저도 낼 돈이 조금 밀려서요!”
그레이프는 내 부탁을 단번에 거절했다.
마법소녀도 빚에 시달리는 건가…하긴, 그레이프는 집 융자도 남았다고 하고, 언제나 돈이 부족하다며 힘들어 하는 거로도 유명했다.
오늘은 보너스가 있어서 사준 거긴 해도, 비전폰까지 사줬으니 돈이 없을 수도 있지.
“그러면~오늘 일단! 제…우리 집에서 자는 건 어때요?”
“응…?”
호텔비를 내줄 수 없다는 말에 카페에서 밤을 새울까 고민하던 나는 그레이프가 갑자기 내놓은 대안에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레이프의 집…?
그것도 방법이긴 하다.
생각해보면 애초에 그레이프가 매일 내 집에 찾아왔으니 내가 그레이프의 집에 간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생활이 변할 것 같지도 않다.
“내, 내일 약속도 잡았었고! 오늘은 고생해서 힘들 테니까 푹 쉬고…집에 따뜻한 물 잘 나와요! 먹을 것도 사놨어요! 내일 맛있는거…먹고…! 따로 잘 곳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긴 한데….”
“빈 방도 있어요!”
…나쁘지 않아 보이긴 한다.
개인 공간도 있고, 그레이프는 출근할 테고, 호텔비도 아껴서 좋고.
나쁘지 않은 방법이기는 한데….
내가 망설이는 것처럼 보이자 그레이프는 갑자기 상 위로 일어서 내 손을 꽉 잡더니, 식사를 마친 테이블에서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가죠? 가, 갈까요? 집으로 갈까요…?”
“어….”
“집에 가서 푹 쉬어야죠! 택시 부를게요? 짐은 나중에 제가 퇴근할 때 들고 올게요! 바로 가요!”
나는 그레이프에게 끌려가서 식당 밖으로 나와 운 좋게 바로 앞에 멈춰져 있던 택시에 강제로 태워졌다.
뒷좌석에 같이 앉은 그레이프가 내 손을 잡고 팔을 껴안아 꼼짝 못 하게 하고 놔주지를 않는다.
이상하게 택시의 속도도 빠르게 느껴진다.
그레이프의 집에 가는 게 나쁘지 않은 생각인 것 같기는 하지만, 묘하게 불안한 기분이 들어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자 신호에 걸려있을 때 택시기사가 말없이 뒷좌석에서 볼 수 있는 화면을 조작해 뷰튜브 채널을 틀어줬다.
[동물들은 짝을 유인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사용하죠. 맛있는 먹이, 잘 꾸며진 집…모두 자손을 남기는 방법입니다.]
괴수가 침공한 뒤로 보기 힘들어진 자연 동물을 찍은 영상이 나온다.
택시기사처럼 나이 드신 분들이 옛날을 추억하기 좋다는 이유로 선호하는 채널이다.
나는 동물 다큐멘터리를 보며 그레이프에게 잡혀있었다.
분명 택시 밖으로 보이는 신호는 파란불인데, 빨간불보다 불길한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