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5화 〉기둥서방 (2) (75/299)



〈 75화 〉기둥서방 (2)

그레이프와 같은 회사에 다니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퇴근하면서도 뒤를 돌아보며 힐끔거린다.
퇴근하고 나오다가 갑자기 직장 동료로 보이는 사람에게 붙잡혀 얘기를 나누고 있는 그레이프를 보고 있는 것이다.

“요즘 선임비서님 엄청 바쁘신 것 같지 않아? 퇴근만 하면 바로 집에 가고.”
“강아지라도 키우시는  아냐? 나 퇴근길이 근처 마트라서 자주 장 보고 가는데, 매일 장 보고 가시던데?”
“바보야, 장 보고 매일  가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지.”
“뭔데?”
“남자지, 남자.”

지나가는 사람들은 회사 동료에 대한 얘기를 하며 퇴근하고 있다.
그레이프가 다니는 회사 분위기를 대충   있게 해주는 대화다.
법무법인이라고 해서 긴장된 분위기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자유로운 회사인 것 같다.


“대체 남자친구가 누굴까…선임비서님 절대 남자 안 사귀실 줄 알았는데.”
“전에 법률 프로그램 확장사업  때 젊은 대표가 갑자기 꼬셨던 거 기억나? 그거 남들 다 보는 앞에서 차는 거 보고  레즈비언이신 줄 알았어.”
“퇴근길에 콘돔 사는 거  사람이 있다던데….”
“다들 너무 선임비서 얘기만 하는 거 아니냐…? 우리 이러다 선임비서님한테 고소당하는 거 아냐?”

지나가는 사람들의 화제의 중심은 전부 선임비서의 남자친구가 누구냐 하는 것이었다.
참 영양가 없는 주제이긴 하지만, 회사 사람들끼리 뭉치기에는 이렇게 좋은 주제도 없기는 하다.
선임비서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많은 관심을 받고 행복해하기만을 빌어줄 수밖에 없다.

“어차피 우리가 이렇게 얘기해봤자 비서님 남자친구가 엄청 잘생기고 키도 크고 돈도 많을 거라는 건 확정이지.”
“하긴…눈 엄청 높잖아. 찬 남자가 한둘이 아니던데.”

나는 주변 사람들의 대화를 훔쳐 들으며 느긋하게 걸어갔다.
그레이프는 여전히 퇴근길에 마주친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업무 관련해서 할 얘기가 남은 모양이다.


침대 위에서 볼 때는 매일 보며 점점 익숙해져서 무디어진 감이 있었지만,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는 걸 보니 미모가 빛이 난다.
허리는 꽉 조이고, 엉덩이는 탄력 있고, 허벅지도 두껍다.
예쁘지만 관능적이라기보다 여전사 같은 외모에 시원시원한 성격을 기대하게 하는 몸짓, 운동으로 다져진 몸은  위로도 자신이 활발한 여자라는 걸 알려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걸음걸이는 실수하면 부서져 버릴 유리 위를 걷는 듯 조심스러워서 여성스럽게만 보인다.


“…그래서, 이제 법무법인이기는 하지만 이번에 인공지능 상담 어플도 개발한 만큼 회사도 많이 변할 거고…비서님도 비서가 아니라 아예 사업부로 오시는 게.”
“죄송하지만, 생각 없어요. 사업부장님도 그렇고…제 성격에는 안 맞네요.”
“어…음, 그렇죠. 사업부장…괜찮으세요? 요즘 자꾸 비서님 헛소문 내고 다니던데.”
“부장님이 헛소리 하시는 게 하루 이틀인가요?”


가까워지고 보니, 회사 동료인 걸 넘어서 다른 부서의 사람이 그레이프를 스카웃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회사 내에서 다른 곳으로 부서이동을 해 가는 것도 스카웃이라고  수 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비서인 그레이프를 사업부로 데려오고 싶은 모양이다.


“그건 그렇죠…선임비서님, 오늘 고생하셨어요. 혹시 약속 없으시면 식사….”
“죄송해요, 방 청소하러 가야 해서.”
“바, 방 청소요…? 청소는 나중에 하셔도….”


나는 그레이프에게 다가가 앞을 막았다.
그러자 그레이프는 내게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길을 비켜서 옆으로 돌아 지나쳤다.


“급하거든요.  사람이 있어서…그런데 헛소문이라뇨?”
“아, 그게…비서님이…문란…하다는 소문인데….”

나는 다시 그레이프의 앞으로 다가가 앞을 막았다.
그러자 그레이프가 조금 인상을 쓰고  얼굴을 보더니…가만히 보고있다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애, 앵거?! 여긴 어쩐…아니, 왜 이래요?!”

그레이프는 정말 나를 보고 기겁하더니 주머니에서 작은 향수를 꺼내 내 몸에 뿌렸다.
옷이 물에 젖었다가 마른 퀴퀴한 냄새와  냄새가 그레이프가 뿌리고 다니는 향수 향기로 덮여진다.


“면도는?! 샤워는?! 혹시 물 끊겼어요? 하루 사이에? 연락하지 그랬어요! 내줄게요!”
“아니…그게 아니고, 좀 사정이 있어서.”
“수염 라인이 의외로 어울리는 것 같기도…아니…씻는것부터…옷은 왜 이래요? 전에 사준 옷은?”


그레이프가 어느 날 갑자기 사온 옷은 비싼 자연산 양모로 만들어진 꽤 말끔한 양복이었는데, 스프링클러가 터지며 이미 물에 젖어 이리저리 구겨지고 일부가 쪼그라들어 있었다.
입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짐 정리  하느라, 이게 편해서.”
“짐…? 등에 맨…쓰레기들은 뭐에요?”
“쓰레기들이라니.”


배낭 안에 짐을 다 넣을 수가 없어서 바깥쪽에 냄비랑 프라이팬 같은 식기들을 매달아두긴 했지만, 쓰레기들이라는 말은 조금 심했다.
하지만 얘기를 듣고 보니  눈에도 거지들이 들고 다니는 보따리처럼 보이긴 한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나한테 동전을 던져주던 이유가 혹시 이것 때문인가.

“…앵거, 진짜 무슨 일 있었어요? 약속은 내일인데 오늘…거기다 복장까지.”
“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레이프에게 솔직하게 얘기해주기로 했다.
어차피 이미 집에서 쫓겨났고, 집주인도 집안 몰골을 봐버렸으니 돈을 가져온다 해도 다시 들여다 보내주진 않을 것이다.


“전선이 합선되어서 어제 집에 불이 좀 났어.”
“불?! 아,  다쳤어요?!”
“난 괜찮은데, 집에 있던 게 다 젖고 망가져서…침대도 프레임이 휘었잖아? 그래서 그냥 버릴  버리고 챙길 것만 챙겨서 나온 거야.”
“전선…전에 안 그래도 전선 주변에 먼지가 좀 많아 보여서 청소하고 갔는데…하아아…그래도 안 다쳐서 다행이에요.”


그레이프는 그제야 내 상태가 이런 이유를 이해해줬는지 한숨을 쉬며 내 머리를 만져줬다.
엉망이 된 머리를 대충 정리해주려고 다가오자 내 몸에 가슴이 계속 문질러졌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같다.


“집이 엉망이 되어서 있을 수가 없어서  거에요?”
“음…그거랑 그냥, 그레이프 퇴근 시간이구나 싶어서.”
“그, 그렇구나…그래서 왔구나…? 밥은 먹었어요?”
“아직.”

그레이프는 손에 들고 있는 작은 가방에서 실핀을 꺼내  머리를 고정해 모양을 만들어주고는, 내가 입고있는 운동복의 지퍼를 반쯤 내렸다.
안에 입은 셔츠가 드러나자 그레이프의 뒤에 언제부턴가 서 있던 여자가 우와…하고 감탄하는 소리를 낸다.
소매도 밀어서 걷어 올리게 하고, 팔 근육과 가슴근육이 좀 드러나 보이게 해 거지꼴이었던 나를 운동선수처럼 만들어준 그레이프는 어쩐지 기분 좋은 듯 실실 웃으며  손목을 잡았다.

“앗, 그럼 저녁 같이 먹어요. 그전에 일단 음…미용실좀 같이 갈까요? 지금 보니까 머리가  많이 자랐네요? 수염도 가서 면도하고…앗, 차라리 잘 됐어요!  내일 휴가 냈으니까 같이 쇼핑이나 조금 할래요? 안 그래도 옷 입는 거 신경 쓰였는데…앵거는 몸이 좋으니까 좀  어울리는 옷을 입는 게 좋아요.”
“이걸 들고?”
“가방은…근처에  맡아주는 곳이 있으니까 거기 잠깐 맡겨요! 돈은 제가  테니까….”

그레이프는 이참에 내게 옷을 사주고 싶은지 기뻐하며 말했다.
나도 사준다는데 굳이 싫다고 할 생각은 없다.
 그래도 최근에 나한테 앵거는 벗은 몸이 제일 매력 있네요 같은 소리를 해서 내 패션감각이 나쁘다는 점을 지적받은 것 같아 아주 조금이지만 신경 쓰고 있기도 했다.

“저, 저기…비서님…그…혹시…그 분이…?”
“아, 미안해요. 식사는 나중에 회식할 때 같이 앉아서 먹어요.  바빠서 이만.”
“네? 아, 네…?”


어느새 있는 줄도 모르게 잊혀진 남자에게 인사를 한 그레이프는 또각또각하는 구두 소리와 함께 내 팔을 잡고 질질 끌고 갔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레이프의 힘에 못 이기는  끌려가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정말로  이겨서 끌려가는 나를 보며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기둥….”
“비서님, 남자 취향이….”

그레이프는 주변은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는 듯 내 팔에 가슴을 문질러대며 신나서 걸어가더니, 뭔가 떠오른  흠칫 놀라며 얘기했다.


“아까 그 사람은 사업부 사람인데, 저더러 같이 부서 이동해서 일하자고…엄청 귀찮은 사람이에요.”
“어…응.”
“지금도  계속해서 같이 일하자고 하고, 저는 전혀 관심 없는데…아, 이런 얘기 별로 재미없죠? 참, 앵거도 여기 근처에서 일했다고 했죠? 어디에요?”
“저거.”

나는 정말로 귀찮았는지 불평을 하다가 내가 다닌 회사를 물어보는 그레이프에게 회사 맞은편에 보이는 제약회사를 손으로 가리키며 대답했다.
그러자 그레이프는 신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혼자서 밝은 목소리로 떠들며 나를 끌고 갔다.

“그렇구나~카페에서 저한테 고백했었다고 해서 가까이 다닌다고 생각은 했는데, 바로 맞은편이었네요? 지하철에서 자주 만났었을 수도 있겠어요!”
“음…그레이프 사는 구역이 나랑 반대방향이었던 거 아니었어?”
“역에서 내리면서 봤을 수도 있죠~회사로 가는 길이 같으니까?”
“난 영업사원이라 외근을 많이 해서….”
“그래서 카페에서 봤구나! 저 카페 자주 갔어요! 자주 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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