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기둥서방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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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억하는 집주인은 돈을 내라고 말은 하지만 이렇게까지 할 사람은 아니었다.
조금 사정이 힘들 때 전화해 부탁하니 월세를 한 달 미뤄주고, 두 달까지도 미뤄주는 착한 사람이었다.
그 뒤로 매달 한 달 치 월세만 주면서 방을 뺄 때 나머지를 다 주겠다고 하며 살고 있긴 했지만, 집주인도 돈 여유가 있으면 밀린 월세도 좀 달라고 하면서도 과도하게 재촉하지는 않았다.
요즘 시대에 보기 힘든 선량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설마 내가 없는 사이에 내 방을 빼 버릴 줄이야.
문 앞에는 리프 때문에 스프링클러에 젖어 망가진 노트북과 컴퓨터부터 여러 옷가지, 낡아서 철제 프레임이 녹이 슬어있는 것까지 보이는 옷장과 그레이프가 사줬지만, 또 프레임이 휘어버린 침대까지…모든 가구가 나와 있었다.
가구라고는 해도 이렇게 보니 대부분이 쓰레기다.
그나마 멀쩡한 가구라고는 그레이프가 사온 접이식 테이블 하나.
그 외에 가져갈 만한 건 커다란 가방에 대충 욱여넣어 져 있는 내 옷들 정도였다.
문 앞에 붙어있는 강제퇴거에 대한 알림을 봤을 때는 조금 황당하고 화가 나기도 했지만, 이렇게 집 밖에 나와 있는 가구들을 보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프링클러도 터졌지, 화재경보 때문에라도 집주인이 찾아와볼 만 하다.
찾아온 뒤 보게 되었을 광경이 눈에 선하다.
현관문은 그레이프가 한번 구겼다 펴서 약간 일그러져있고, 집 안은 스프링클러로 인한 물바다에 벽면과 바닥도 섹스할 때 그레이프가 손톱으로 긁고 엉덩이로 찍어서 이리저리 흔적을 남겨놔 엉망이었고, 바닥은 깨져서 전선이 나와 있는 데다….
더 생각해보지 않아도 쫓겨날 만하긴 했다.
내가 집을 쓰레기장처럼 쓰기는 했다.
그레이프에게 방 수리비를 받기는 했지만, 당연히 제대로 수리하지 않았다.
자기가 부순 방을 고치라며 준 돈은 이미 과자나 음료를 사 먹거나 래피드를 미행할 때 써버려서 얼마 남아있지도 않았다.
그레이프도 자기가 짐승처럼 영역표시를 해놓은 것 같은 흔적이 마음에 드는지, 찾아올 때마다 고치라고 하지도 않았다.
결국, 내가 집에서 쫓겨난 건 그레이프와 리프 때문이다.
월세가 계속 밀려있기는 했지만, 그 둘이 내 방을 엉망으로 만들지 않았다면 집주인도 한번 찾아와보고 망가진 침대와 낡은 옷장을 보고 동정의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 줬을 것이다.
내가 쫓겨난 건 내 잘못이 아니다.
“하아아….”
그런 생각을 해도 내가 집에서 쫓겨났다는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나는 일단 이참에 버릴 것과 버리지 않을 것들을 구분해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쓰레기 같은 짐 더미를 뒤졌다.
노트북과 컴퓨터는 망가지긴 했어도 안에 있는 데이터가 필요했다.
드라이버를 찾아 대충 분해한 뒤 중요한 부품만 챙겨 가방에 넣고, 쓰레기장에 내놓았다.
낡은 옷장도 필요 없다.
입을 옷들만 챙긴 뒤 가벼워진 옷장을 들어서 버리고, 프레임이 망가진 침대도 한 손으로 들어서 버리고….
몸이 좋아져서 그런지 무거운 것들이 별로 무겁게 느껴지질 않는다.
아니, 단순히 몸이 좋아져서가 아니라 뭔가 더 달라진 이유가 있는 건가…?
아무리 몸이 좋아졌다고 해도, 침대의 금속 프레임을 한 손으로 들어도 무겁지 않다는 건 이상하다.
리프에게 잡혀가기 전보다 몸이 훨씬 개운하다.
묘한 느낌에 오른손을 꽈악 쥐어보니, 안에서부터 따뜻한 기운이 몸속에 퍼지는 게 느껴진다.
에스더의 마력이다.
남자가 마력을 몸에 품고 느낄 수 있다니, 마력을 느끼게 되니 드는 생각이지만, 신기한 기분이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걸까?
나는 에스더가 오른손에 심어준 촉수에 충전된 마력을 사용하고 있다.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촉수가 스스로 생각해 마력을 써서 내 몸에 필요한 효과를 전해주는 것에 가깝다.
자지가 뻐근하면 자지를 회복시켜주고, 몸이 힘들면 몸을 조금 편하게 해 주고…지금처럼 힘이 필요하면 몸을 약간 강화시켜준다.
그 정도가 마법소녀들처럼 철근을 끊고 콘크리트를 깨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침대를 한 손으로 쥐고 무겁게 휘두를 수 있을 정도는 됐다.
정말 열심히 단련하면 평범한 인간에게 충분히 가능한 정도이기도 하고, 내 몸도 나쁘지 않은 편이긴 하지만 지금의 체형으로는 불가능한 게 당연할 일이다.
애초에 남자가 마력을 몸에 담고 있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나도 마법소녀에 대해서 배우고, 뉴스를 보며 자랐기에 이게 놀라운 일이라는 사실은 잘 안다.
아니, 놀라운 정도가 아니라, 해부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정도로 엄청난 일이다.
이런 게 가능했으면 굳이 소수의 마법소녀들에게만 괴수와의 전투를 맡겨뒀을 리 없다.
방위군 병사들에게 마력을 충전시키고 싸우게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트루비전에서 계속해서 연구하는 방위군 강화 수트가 비슷한 느낌이 아니었나? 마법소녀의 신체 부위를 결정화한 마력 배터리를 장착해서 약간의 강화 효과를 일으킨다고….
내 몸은 지금 그런 장비들 없이 마력을 저장하고 사용하고 있었다.
…에스더는 대체 내 몸에 무슨 짓을 해둔 걸까.
신기한 점은 내 몸 안에서 마력은 느껴지지만, 마력 감지기 같은 건 전혀 반응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파트의 출입구 같은 곳을 지날 때 마력이 느껴지면 저절로 마수 경보가 울린다.
주로 마견을 감지하기 위한 경보기였는데, 몇 번을 지나가도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이것도 에스더가 뭔가 해놓은 건가?
집 밖으로 꺼내진 짐들을 정리하며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나는 한 가방에 다 들어가게 된 내 짐가방을 등에 지고 나오며 비전폰을 꺼내 들었다.
비전폰에 있는 마력 감지기도 내 손 안의 마력에 반응을 못 할까 하는 의문에서였다.
“엥? 망가졌네…?”
나는 그제야 비전폰의 화면이 이리저리 깨지며 터치가 제대로 되지 않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최면어플은 측면의 버튼으로 단축키 설정을 해둬서 터치하지 않고도 킬 수 있었지만, 화면을 조작할 수 없는 상태였다.
계속해서 화면을 두드려보지만,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깨진 화면 속에는 메신저 어플 위에 39 라는 알림이 떠 있었다.
궁금한 마음에 열어보고 싶었지만, 터치가 듣질 않는다.
볼 수는 없지만, 방에서 쫓겨난 걸 생각해보면 보나 마나 집주인이 뭐라고 한 거겠지.
비전폰을 제대로 쓸 수 없다는 상황이 굉장히 불편하게 느껴진다.
당장 새 비전폰을 사서 최면어플이 들어간 칩을 끼워 넣고 싶었지만, 수중에 돈이 없다.
집에서 쫓겨나고, 가구도 다 정리하고 나니 한 보따리밖에는 내 짐이 없고, 갈 곳도 없다니.
큰 가방을 등에 멘 떠돌이가 되어버렸다.
짐을 정리하며 시간이 빠르게 지나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나는 돈도 없고, 갈 곳도 없었다.
직장을 관둘 때도 퇴직금 같은 걸 필요 없다면서 멋있게 나가버렸고, 그 뒤에도 래피드의 머리카락을 팔아서 먹고살 생각이나 했지, 돈을 딱히 벌거나 하지 않았다.
그레이프가 계속해서 먹을 걸 가져와 주고 침대도 바꿔주고 샴푸도 사주고 요리도 해주고 콘돔도 사줘서 돈을 벌 필요성도 딱히 느끼지 못했다.
몸을 움직이며 배가 고프진 나는 평소 같으면 슬슬 그레이프가 먹을걸 사 들고 집에 찾아올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있으면 그레이프가 퇴근할 시간이다.
그레이프는 매일같이 내 집으로 찾아오니 내가 방에서 쫓겨났다는 사실도 말해줘야만 했다.
비전폰도 안 되고, 조금 있으면 퇴근해서 집에 갈 테고….
생각해보니 리프 X가 나인 척하고 전화해 그레이프에게 오늘 오지 말라고 했었지….
어차피 오늘 와도 내 집은 이미 사라져있었다.
내일 그레이프가 휴가를 낸다고 했던 것도 기억났다.
비전폰은 안 되고, 잘 곳도 없고…그레이프는 내일 휴가 내고, 오늘은 조금 있으면 퇴근할 거고…그레이프 집 주소는 모르고….
“…갈까.”
나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등에 진 커다란 배낭을 고쳐 매고 그레이프가 다니는 회사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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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프가 다니는 회사는 내가 다니던 10층도 되지 않는 제약회사 빌딩의 맞은편에 있었다.
이 주변에서도 꽤 유명한 회사, ND법무법인이라는 법률사무소다.
나는 법무법인이 뭔지도 잘 모르지만, 상당히 유능한 변호사들이 모여있는 법률 사무소로, 그레이프는 회사에서 비서 일을 하고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나는 짐이 가득 든 배낭을 메고 지하철에 탑승해 있다가 사람들을 밀치며 회사 구역에서 내렸다.
슬슬 퇴근하는 사람들도 있는 건지 내리는 게 상당히 힘들다.
맨몸이라면 힘들지 않겠지만, 가방 때문인지 무척 불편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도 정장을 입고 지금 퇴근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집에 돌아가고는 했지만, 지금의 나는 달랐다.
짐 옮긴다고 대충 갈아입은 트레이닝복에 리프에게 시달리며 씻지도 못하고 나와 곧바로 땀을 흘리며 엉망이 된 머리 모양, 수염도 안 깎아 까칠까칠했고 등에는 내 상체보다도 크고 잡동사니가 가득 들어 달그락거리는 배낭을 매고 있다.
스프링클러 때문에 젖었던 옷에서는 냄새까지 난다.
누가 봐도 집 없는 거지 백수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집에 들어가서 씻을 수도 없고 돈도 없고, 어디 갈 곳도 없다.
정장을 입고 퇴근하는 직장인들은 나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지만, 나는 조금도 창피하지 않았다.
아무리 나를 냄새 나는 백수로 본다 해도…나는 래피드와 처녀막을 만지고 정액을 안에 사정한 남자다.
그레이프에게 매일매일 착정당해오긴 했지만, 겨우 이 정도로 자신감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래피드의 처녀막에 자지를 맞추고 정액을 사정한 래피드의 비밀친구니까….
“아메리카노 하나요.”
“으읏…네….”
나는 당당하게 직장생활을 할 때 자주 찾아가던 카페로 가 커피를 시키고 그레이프의 회사 앞으로 찾아갔다.
퇴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건물 벽에 짐이 가득 든 가방을 기대놓고 그 위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누가 봐도 거지꼴이긴 했지만, 내가 당당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그레이프는 퇴근하면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으니, 분명히 이 길을 지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회사 입구가 보이는 길에서 가만히 앉아 나를 비웃고 가끔 동전을 던져주며 퇴근하는 회사원들 사이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으니, 저 멀리에서 그레이프가 깔끔한 옷차림으로 머리를 올리고 구두를 또각거리며 퇴근하는 모습이 보인다.
마침 커피도 다 마신 나는 근처 쓰레기통에 일회용 컵을 던져넣고 그레이프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