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마법소녀 (11)
그레이프와 래피드는 계속해서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고, 어느새 상황이 종료된 것을 안 것인지 터널 안에 안내 방송이 울려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에스더가 사라진 지하철 터널 안으로 수 없이 많은 드론들이 들이닥쳤다.
드론이 원래 지하로 진입하기 위해선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레이프가 지상에서 터널까지 뚫어버린 구멍을 통해 단숨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 중에서 구조용 드론 한 대가 곧바로 그레이프쪽으로 날아오더니, 기계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레이프 씨…저, 이번에는 봐 드리고 싶은데…좀 심각한 걸 망가트리셨네요.]
“뭐, 뭔데요…?”
[대체 왜 지상에서부터 땅을 파고 내려오신 거에요…? 좀 더 돌아가시면 긴급탈출 엘리베이터 열고 급강하하는 방법도 있는데…전에 래피드님이 그렇게 진입했었잖아요? 도중에 있는 군용 케이블 다 잘라버리셨던데…이거 특수 케이블이라서 지금 군부대 난리 났어요. 진짜, 그레이프 씨는 이런 것만 없어도 평가점수 더 받아서 순위도 올라가고 지원금도 많아지실 텐데….]
“히이이익….”
[상황 설명 좀 해주시겠어요?]
수리용 드론들은 완전 무인화가 아니었다.
한번에 수많은 드론을 담당하는 방위군 조종수가 있으며 자동화된 프로그램이 수리하는 것은 드론이 직접, 어려운 부분은 사람이 끼어들어 수리하는 식이다.
반면에 구조용 드론은 각자 하나씩 담당하고 있었으며, 사실상 방위군과 마법소녀 사이의 현장 소통창구가 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레이프는…그 드론을 통해 과도한 파괴를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지원금을 삭감당했다.
나도 마법소녀가 돈을 버는 구조는 잘 모르겠지만, 원래는 전액 지원을 해 주는 모양이다.
다만 그레이프는 여러 가지로 망가트려서는 안 될 걸 망가트리는 불운이 많은 모양이었고, 이번에도 운이 나쁘게도 어떻게 하기 힘든 대단한 걸 파괴해 버린 것 같았다.
그레이프는 드론에게 울먹이며 한 번만 봐달라고 조르고 있었고, 구조용 드론은 살아있는 것처럼 인명구조용 기계 팔을 꺼내 화면을 긁고 있었다.
“저, 저기…앵거…씨라고 했죠?”
“아…네.”
“다음부터는 그러시면 안 돼요…정말로, 일반인은 위험하니까…이번에는 다치지 않고 끝났지만, 큰일 날 뻔했다고요?”
그리고 나와 래피드는 한쪽에 서서 조용히 얘기하고 있었다.
래피드는 부끄러운 듯 손으로 머리를 넘기며 말하고는 시선을 피하며 팔짱을 꼈다.
래피드가 날 걱정해주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그 사실만으로도 살벌한 상황에 겁 없이 뛰어든 보람이 있었다.
“그건 그렇고…어쩐지 저희 자주 보게 되네요.”
“그러게요, 뭐…저야 좋죠. 래피드님 팬이니까.”
“패, 팬이요…? 으음….”
래피드는 내 말을 듣고 조금 쑥스러워하며 변신을 풀었다.
몸에 짝 달라붙은 옷을 입고 있던 래피드는 순식간에 평범한 여자아이 같은 옷차림이 되었다.
가슴을 살짝 강조하는 듯한 코르셋 셔츠에 치마…아주 약간 조여드는 느낌인데도 가슴이 너무 커서 일부러 커 보이게 강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역시…가까이서 봐서 느끼는 거지만 그레이프랑 확실히 다르다.
그레이프가 근육질 야생마 같은 느낌이라면 래피드는 푹신푹신한 양 같은 느낌이다.
분위기도 그렇고 머리카락이 곱슬머리인 것도 그렇고…가슴도 커서 안으면 부드러울 것 같다.
커다란 가슴에서 자애가 느껴진다. 역시 성녀, 가슴조차 성스럽다.
“그레이프랑은…무슨 사이세요?”
“네?”
가슴을 힐끔거리며 래피드가 성녀인 이유를 가슴에서부터 찾고 있던 나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래피드가 고민이 가득한 얼굴로 눈썹을 살짝 모으며 올려다보는 게 보였고, 나는 래피드의 가슴 사이와 얼굴을 번갈아 보며 대답했다.
“음…글쎄요?”
그러고 보니 그레이프랑 나는 무슨 사이일까?
친구…?
친구라고 하기에는 서로 아는 점이 너무 없었다.
그레이프도 그런 점에서 가까워지는 건 조심하는 느낌이었고…대화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면 그레이프랑 딱히 섹스 외에 무언가를 한 적이 없었다.
섹스하고 싶어서 집으로 오고, 만나면 섹스, 얘기도 섹스, 오늘 해도 되냐고 묻는 것도 결국 섹스, 아침에 일어나면 섹스해도 되냐는 질문, 밤이 되면 섹스하러 가도 되냐는 질문, 사오는 물건도 콘돔이나 섹스할 때 도움이 되는 약들, 관심이 있는 것도 섹스.
…그레이프는 섹스 몬스터다.
그레이프와 나의 관계를 정확하게 말하자면 섹스파트너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런 걸 래피드에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치, 친구…아닐까요? 파트너?”
“파트너요…?”
“아…좀 특이하게 만났는데, 그레이프가 회사에 다니잖아요? 마법소녀인 줄 몰랐는데 그때 카페에 자주 왔었어요. 저도 그 카페로 갔고….”
“거기에서 만나서 친해진 거에요?”
“으으음…그건 아니고,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아, 전에 에스더 본 적이 한 번 더 있잖아요…?”
“앗, 맞아요.”
“그때 가면이 깨진 걸 보고 제가 누군지 알아봐 버려서, 그 후로 친해졌어요.”
어…음…거짓말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진실을 숨겼을 뿐.
나는 당당하다.
래피드는 내 말을 듣고 가만히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흐으음 하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구나아, 흐으응….”
“어…저기, 앵거? 미안한데, 잠깐…도와줄 수 있어요?”
그때 드론과 대화를 하던 그레이프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레이프의 옆에는 구조용 드론이 붙어있었고, 그레이프는 미안하면서도 곤란한 듯 날 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하는 의문을 품고 있자 구조용 드론이 앞으로 날아와 내 앞에 멈춰서 내 얼굴을 스캔했다.
[흐으음…앵거, 얼마 전에 회사를 퇴사함…전투용 각성제를 만드는 제약회사에서 일하셨네요? 영업사원, 흐음…특이할 게 전혀 없는데?]
“지금 무슨 짓이에요?”
[아…래피드님, 죄송합니다. 그레이프 씨한테 들은 걸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 있어서….]
드론의 밑부분에서 갑자기 트루비전의 태블릿 PC인 비전패드가 나타나 내 앞에 내밀어 지며, 화면에 보고서로 보이는 내용이 떠올랐다.
[마법소녀 루이와 함께 마견들의 습격을 버팀, 루이는 질투의 마녀에게 당한 거로 추정, 그 후에 에스더와 한동안 무슨 대화를 하셨죠?]
“아, 아무 대화도….”
[대화 없이 그 시간을 버티신다고요? 저희가 추정하기로 루이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은 5초 내, 루이의 연락이 닿은 후 그레이프가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정확하게 확인되지는 않지만 5분이 넘는 시간이었습니다. 일반인인 당신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인가요? 죄송하지만 신체 부위를 채취해봐도 되겠습니까?]
“자, 잠깐…지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한테는 그런 말 하나도.”
[아, 그레이프 씨…죄송합니다. 아무리 봐도 이상한 반응이 스캔 되지 않아서요. 남자니까 당연하지만…마력반응 없음, 일반인에 과거도 이상할 것 없음…평범한 제약회사 사원인데 왜…솔직하게 얘기해주시겠습니까? 무슨 대화를 하신 거죠? 루이의 통신유닛을 통해 대화로 추정되는 음파가 있다는 건 확인했습니다.]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겨우 그게 이렇게까지 취조할 일인가?
나는 무척 당황스러웠지만…래피드의 눈빛은 더욱 당황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그레이프도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뭐지? 에스더랑 대화한 게 이렇게 큰일인 건가?
“자, 잠깐…저 사람은 절 보호하려고 에스더한테 뛰어들기까지 했어요. 설마 지금 이 분을 의심하시는 거에요?”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레이프 씨, 돌입 전에 마인드 컨트롤러의 출현 가능성을 의심하는 통신을 주셨죠?]
“아, 그, 그랬죠…두통이 심해서. 뭔가 행동을 제약하는 것 같고.”
[그레이프 씨는 전부터 마인드 컨트롤러의 정신공격에는 강했으니…오히려 당할수록 강해지는 게 있었죠. 다만 그래서 의문인 겁니다. 대체 왜 이 분이 멀쩡한 거죠?]
“그건, 마인드 컨트롤러가 없어서…아니면 도주했으니까.”
[그게 더 의문입니다. 그럼 그레이프 씨는 왜 두통을 호소하신 거죠? 실례지만…앵거씨. 협조해주시겠습니까?]
무언가…분위기가 이상하다.
마법소녀를 지켜줘서 감사합니다 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 드론의 너머에 있는 누군가가 날 의심하고 있는 게 느껴진다.
뭔지 알 수 없지만, 이상하다고 생각해 내 정보를 캐보려 하고 있다.
나는 아주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마법소녀 최면어플에 대한 건 말해줄 수 없다.
이대로 가다가는 끌려가서 정밀검사를 당할지도 모른다.
어떡하지?
“저, 저…! 잘 생각해보니까 회사 발표 망칠까봐 머리가 아팠던 것 같아요!”
[…네?]
“아!! 잠깐만! 회사 발표!! 아!!!”
그때 갑자기 그레이프가 나를 감싸주며 말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런 게 통할 리가 없잖아 하고 생각하면서도 무척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레이프…지금까지 자궁에 사정해 준 정액값을 하다니.
고맙지만 그래도 더 싸주진 않을거야…더 싸주면 내가 죽는다.
자기가 한 말에 놀라며 머리를 감싼 그레이프는 드론의 화면에 대고 울먹였다.
“아아아…내, 내 발표…승진 걸려있는데…흑!”
[저기…그러니까, 그레이프 씨…발표를 망쳐서 머리가 아프고 공격을 못 했다고요?]
“네….”
[다른 사람이라면…못 믿겠지만 그레이프 씨라면…있을 법 한 얘기네요….]
…이게 통한다고?
나도 황당해서 그레이프를 봤지만, 그레이프는 나보다 더 상처를 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똑같이 이게 통한다고? 하는 표정이지만 무척 충격받고 있는 게 느껴진다.
[응…? 아아…그렇군, 죄송합니다. 루이를 감염시킨 새로운 촉수계열 괴수…임시 명칭은 오염 촉수 Corruption Tentacle 확인되었습니다. 전투능력은 없는 것으로 확인…아마도…강력한 세뇌를 사용할 수 있는 것 같군요. 그레이프 씨에게 가해진 정신공격은 이것이 원인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그런가요?”
[좋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의문은 여전하네요. 에스더랑 무슨 대화를 하신 거죠?]
결국엔 이건가…취조를 피해갈 수는 없는 모양이다.
나는 조금 긴장하며 에스더와의 대화 내용을 대략적으로 얘기해주기 시작했다.
“일단…에스더 퀴즈를 시작해서.”
[…에스더 퀴즈? 잠깐…당신 어떻게 살아있죠?]
“네…?”
[잠시 재 스캔 하겠습니다.]
곧바로 드론에 달린 스캔 기기가 내 몸을 다시 한 번 스캔한다. 머리에서부터 심장까지 내려온 붉은 광선은 내 심장에 잠시 머물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순간 오른손이 욱신거렸지만, 오른손 아래까지는 내려가지 않자 곧바로 잠잠해졌다.
[…촉수에 오염되시진 않으셨군요. 심장을 장악당하시지도, 뇌를 잠식당하시지도…대체 어떻게 살아계신 거죠?]
“다 맞췄는데요?”
[…네?]
“네?”
“앵거?”
내 말을 들은 드론과 래피드, 그레이프가 동시에 놀란 목소리를 냈다.
어? 뭐야…? 왜 이렇게 놀라?
[죄, 죄송하지만…다 맞췄다고요?]
“네.”
[문제가 뭐였죠?]
“음…에스더가 싫어하는 색은 스칼렛, 레드를 좋아하고 스칼렛은 유사한 색이 가짜 같다며 싫어하죠. 방송 중에 녹화는 안 되었지만 스칼렛 컬러의 차량을 보고 지나가듯이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그 후에도 붉은색을 보면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붉은색을 좋아하는구나 해서 기억했고, 에스더라는 이름의 뜻은 페르시아어로 별을 뜻하는 단어면서 이유는 괴수가 많은….”
[자, 잠깐! 잠깐! 됐습니다! 알겠습니다!]
아직 한참 남았는데 드론이 갑자기 내 말을 끊었다. 그러더니 화면 너머에서 곧바로 한숨을 쉬더니 사과하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알겠습니다…유, 유성군, 아니 유성우 멤버셨군요…혹시 번호가…?]
“124번입니다.”
[아…전 782번입니다. 실례했습니다. 저는 두 다리를 잘려 의족을 하고 있어서…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물어봤습니다.]
이럴 수가, 화면 너머의 상대도 유성우 멤버였다.
에스더의 팬클럽인 유성우는 일종의 정예 팬클럽으로, 에스더의 방송을 꾸준히 시청하고 있는 사람만 팬클럽 아이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 만큼 평범한 팬들과는 다르게 정말로 에스더를 좋아하는 사람들만 가입할 수 있는 특이한 팬클럽이었다.
나는 래피드와 애쉬를 조금이라도 보기 위해 버티고 있었던 거지만…782번이라면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들어왔다고 할만한 번호다.
[저…혹시 정답을 전부 맞히면 정말로 살려줍니까? 그래서 사신 겁니까?]
“어…아뇨, 촉수로 만들려고 하던데요. 그, 에스더가 앉고 다니는 커다란 촉수가 1번이에요.”
그러고 보니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젠 나도 1번이다. 1번이 공동 1번이 되는 건가?
그 말까진 할 필요가 없어 보여 말하지 않고 있자, 드론을 조종하는 사람이 실수한 것처럼 드론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히이이익…! 죄, 죄송합니다. 시, 실례 많았습니다. 정밀검사는…괜찮으실 것 같군요. 그레이프 씨도, 래피드님도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씀하신 대로 잘 처리해 두겠습니다.]
“고마워요 캐이시, 아…오늘 저녁 뭐에요?”
[오늘 저녁 메뉴는 오믈렛 새우 리조또입니다.]
“…혹시 조리장이 누군가요?”
[아, 그분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늘 다들 기대 중입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래피드와 드론 너머의 사람은 아는 사이인 것으로 보였다.
트루비전에서 만들어낸 드론은 방위군이 직접 조종하는 걸로 알고 있다. 아마 본부에서 알고 있는 사람인 것 같다.
그 상대에게 그레이프와 래피드가 이미 무언가 말해둔 모양이다.
“정밀검사는…받아서 나쁠 건 없지만, 받을 이유가 없으면 괜히 피곤하기만 할 것 같아서 제외해 달라고 했어요.”
“응…이유는 모르겠는데 갔다 온 사람들이 다들 조금 멍해져 있더라고요.”
래피드와 그레이프가 내게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해줬다.
얘기를 들어보니…아무래도 둘은 정밀검사가 뭘 하는 것인지 잘 모르는 모양이다.
하긴, 그건 비전넷에서도 괴담처럼 도는 소문일 뿐이었다. 둘은 모를 수도 있다.
나는…비밀 사이트와 리프를 통해 정밀검사라는 게 필요 없는 기억을 검열하는 행위를 말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굳이 지금 방위군 소속의 드론이 앞에 있는데 그런 걸 말할 필요는 없다.
말하면 바로 정밀검사행이다.
[그러면, 좋은 귀가 되시길…다행히 루이 씨가 잘 대처해준 덕에 사상자는 없었습니다. 발차 판단이 정확했군요.]
“루이 언니는 어떻게 된 거에요?”
[루이 씨는…당분간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만, 상태가 조금 이상합니다. 계속 가슴 돌려줘, 키 돌려줘 하고…존재하지 않는 것에 집착하는 유아퇴행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신종 촉수의 영향이 아닐지…두분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을 끝으로 드론은 공중을 날아 사라졌고, 어두운 터널 안에는 래피드와 그레이프, 그리고 나만 남게 되었다.
"그, 그러면…전 가볼께요."
곧바로 래피드는 내 옆에서 살짝 떨어지더니 수줍게 말했고, 눈앞에서 빠르게 변신하며 마력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공간이동 마법을 쓰려 한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끼며 래피드를 바라보자, 래피드는 고양이 같은 눈으로 가만히 나를 올려다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다음에 또 우연히 볼 수 있으면 봐요!"
말하면서도 그레이프를 힐끔거리는 걸 보니…어쩐지 전혀 우연히가 아닌 걸 원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렇게 래피드가 사라지고 난 뒤 그레이프와 멍하니 서있던 나는 갑자기 여기에 온 목적이 떠올라 주머니를 뒤졌다.
“아….”
나는 주머니 안에서 반으로 갈라진 그레이프의 회의자료 USB를 꺼내 그레이프에게 내밀었다.
…아무래도 래피드의 공격에 당할 때 잘려나간 모양이다.
“…어, 미안.”
“괘, 괘, 괘, 괜찮아요…흐, 흐윽….”
그레이프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망가진 USB를 두손으로 받았다.
그리고 그대로…내 손을 잡더니, 침을 꿀꺽 삼키고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안에 텅 비어버렸어요."
어째서인지 손 끝으로 내 손등을 살살 긁어댄다.
…무서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