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0화 〉마법소녀 (9) (40/299)



〈 40화 〉마법소녀 (9)



“아하하하하!! 뭐야? 겁먹었어 그레이프~? 무서워? 무서워?!”


비정상적인 모습이다.
분명 검이 나가려고 한 것 같은데 갑자기 방어자세로 변해 다시 에스더의 검이 날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샌드백처럼  새 없이 맞는 것만 반복하며 버텨 서고 있다.
에스더가 그런 그레이프를 비웃으며 검을 휘두른다.
그레이프는 재빠르게 검을 맞부딪치지만, 반격은 하지 않는다. 아니, 못하고 있다.


“그레이프!!!”
“앵거! 크윽!”

그레이프는 내 목소리를 듣고 곧바로 내게서 등을 돌리더니 에스더에 검을 막는 것과 동시에 뒤로 뛰어올라 단숨에 내 옆으로 착지했다.
머리에 빛이 계속해서 파직거리는 그레이프의 온몸에 땀이 가득한 것이 보인다.
그대로  앞에 버티고 서서…천천히 검을 세워 들어 올린다.


“괜찮아요?”
“제길….”


왜 최면을 그따구로 걸었지?
지금까지 그레이프를 통해 알아본 대로라면 최면은 일종의 프로그래밍과 같다.

그런걸 알았다면 최면을 걸 때 제대로 대상을 지정했는지 확인했어야 했다.
실수했다.


그레이프에게 계속해서 실험해 보며 이것저것 알아보긴 했지만…사소한 실수라고 하기에는 결과가 너무도 처참하다.
래피드에게 걸 최면은 하나하나 정리해두고 철저하게 걸기까지 했지만, 그레이프는 그렇지가 못했다.
실험용 생쥐에게 이것저것 약물을 주사해 보는 것처럼, 너무 아무 생각 없이 최면을 걸어댔다.

과거의 일이 후회된다. 기존에 걸었던 나에게 피해를 줄  없다는 최면에 덮어씌운다는 생각으로 단순히 공격하지 못한다는 최면을 건 것인데, 대상을 제대로 말하지 않은 것으로 아무한테도 공격할 수 없게 되었을 줄은 몰랐다.
확인할 기회도 없었고, 당연히 생략되어서 이해했을 줄 알았다.
최면 상태는 평소의 대화 상태랑 다르다는 걸 계속 인식하고 주의했어야 했다.

타이밍이  좋다. 차라리 별것 아닌 마견을 상대하다가 이렇게 되었다면 곧바로 최면을 걸어 수정할텐데…지금 그레이프의 의식을 날려버렸다간 그레이프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최면을 거는  잠깐의 시간이 위험하다.

에스더에게 동시에 최면을 걸까? 아니, 동시에  명에게 최면을 거는 게 가능한가?
모르겠다. 확신할 수도 없고…만약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너무 위험하다.
에스더에게 최면을 먼저 거는 건…? 그것도 어렵다.
에스더는 내가 비전폰을 들어 올리자마자 반응했다.
무언가 방심시킬 방법이 없는 한 다시 최면을 거는 건 어려울 거다.


“뭐야 너네….”

에스더가 다가온다.
천천히, 불의 검으로 바닥을 긁어 녹여버리며 날개를 조금씩 펼치고 있다.
불만스러운 목소리…공기를 긁는 듯한 살기가 에스더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보인다.
대체 이게  보이는 거지?
오른손이 욱신거리며 보이지 않아야 할  보인다.
대체 에스더가 내 몸에 뭘 심어놓은 건지 알  없다.

“아는 사이야?”
“그레이프! 공격해!”
“으읏…!”


단 한 마디, 명령을 통해 그레이프의 최면을  버리려고 했지만 오히려 그레이프의 머리에서 터지는 빛이 더욱 커진다.
명령이 충돌하고 있다.
하지만 결국 그레이프는 공격하지 못하고 멈춰 섰다.
기존에 내려둔 명령이 더 우선시되는 건가? 최면상태가 아닐  내려지는 입력에 제대로  출력이 되고 있지 않다.
기존에 그려둔 회로를 깰 수가 없다.

“1번, 지금…누구 편을 들고 있는 거야?”

에스더가 얼굴을 점점 일그러트리며 다가온다. 불의 검의 색이 변하고 있다.
에스더의 마력이 불처럼 타올라 공중에 일렁거리는 게 보인다.
분노하고 있다. 아니…분노와는 조금 다르다.


“질투 나네?”

에스더의 검이 허공을 가르며 허공에 붉은 선을 그었다.
눈에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다. 보이지 않는 게 정상인데 이상하게 잘 보인다.
나는 욱신거리는 오른손을 꾸욱 쥐며 머리를 찌르는 고통에 눈을 감고 있는 그레이프에게 말했다.

“그레이프! 막아!”
“크윽?!”


곧바로 그레이프의 몸에서 진득한 마력이 촤아악 하고 퍼지며 주변의 공간을 장악한다.
대체 왜 이런 게 보이는 것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순간에는 상황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있다.
퍼져나간 마력에 불의 검이 겹쳐진 순간 그레이프의 몸이 반응한다.
눈을 감은 채로, 부러진 검을 들어 올려 불의 검을 막는다.

“하아…! 하아…! 하아…!”


뭔가가 이상하다.
에스더의 몸에서 새어 나오는 마력도 점점 커지고 있지만…그레이프도 뭔가 변하고 있다.
점점 마력이…단단해지고 있다.


“…귀찮아졌네.”

에스더가 검에 마력을 더하며 불의 색을 변화시켰다.
새하얗게 타오르는 불의 검이 부러진 검을 내리누르지만 그레이프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점점 강해진다, 아니 점점 더 단단해지고 있다.
마력이 아예 고체화되며 그녀의 몸을 지탱할 정도로 강해지고 있다.

“그레이프, 넌 이게 문제야. 진짜…평소엔 쓸모없으면서, 꼭 귀찮을 때만 강해지더라?”
“후후…불굴의 마법소녀니까….”
“아하~? 언제적 얘기야? 샌드백 그레이프!”

에스더가 검을 크게 휘두르자 그레이프는 또다시 검을 맞대 튕겨 나가는 동시에 바닥을 박차며 뒤로 뛰어올랐다.
뛰어오르는 동시에  허리를 끌어안아 날아가던 그레이프는 빛이 파직거리는 머리에 손을 대고 고통스러워하며 말했다.

“앵거, 내려주면 바로 도망쳐요.”
“뭐?! 그게 무슨…!”
“이유는 모르겠지만…여기에 강력한 정신공격이 깔려 있어요. 에스더만 있는 게 아니라…마인드 컨트롤러도 와 있을지도 몰라요. 지하는 위험하니까, 어서 위로 도망쳐서…쉘터로 들어가요.”

나는 그레이프의 말을 듣고 놀라서 움찔 떨며 고개를 숙였다.
마인드 컨트롤러는 에스더를 세뇌해 타락시켰던 간부급 괴인이다.
내가 아는 건  정도 뿐이지만…그레이프는 뭔가 더 알고 있는지 내 최면에 의한 반응을 마인드 컨트롤러가 와 있는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그레이프는 바닥에 떨어지는 나를  손으로 안은 채 두 다리로 콰가가각 하고 지면을 긁으며 착지했다.


“한 번 정도는…! 저항할 수 있으니까!!”


그대로 에스더에게 날려 보내져 촉수괴물들이 가득 있는 공간에 도착한 그레이프는 날 내려놓으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레이프의 몸에서 끈적한 마력이 흘러나오며 점점 단단해지는 게 보인다.
기체 같은 형상에서 액체로, 액체에서 점성 높은 점액질처럼,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하학적인 문양의 고체가 되어 그레이프의 부러진 검에 달라붙는다.
그레이프는 고개를 들고, 반쯤 부서진 검날 위로 고체화된 마력을 완전히 덧씌웠다.
부러진 검 위로 생겨난 새로운 검날을 앞으로 향한 그레이프는 검을 크게 휘둘렀다.

“하아아아아아앗!!”


그레이프의 머리 위에서 터져 나오는 빛이 점점 강해지고, 완전한 천사의 고리가 되어 머리를 조여오는 게 보인다.
동시에 검을 휘두른 그레이프의 검 끝에서 마력이 날카로운 형태를 띠며 퍼져나갔고, 주변에 있던 촉수들을 단숨에 반으로 갈라버렸다.

[키에에에엑!!!]
“그레이프으으으!!! 내 팬들한테, 무슨 짓을 하는거야아아!!”
“크으으읏…! 앵거!! 뛰어요!!”
“크윽…!”

나는 곧바로 바닥을 박차며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에 있어 봤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레이프가 단숨에 수많은 촉수들을 베어버리는 걸 보며 확실히 느꼈다.
방해되는 걸 넘어서  있다가는 터널이 무너지게 생겼다.
아무리  공격하려 하지 않아도 여기 있다가는 둘의 싸움의 휘말려 죽게 생겼다.


그대로 달려서 나가려던 나는…시야 구석에 보이는 걸 보고 걸음을 멈췄다.
벽에 루이가 박힌 채 조용해져 있다.
주변에서 그녀의 몸을 윤간하던 촉수들은 어디로 간 건지, 머리만 감싸던 촉수가 어느새 다리만 밖으로 나오도록 루이의 몸을 삼키고 빛을 발하고 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촉수와 루이가 아닌, 그녀의 옆에 떨어져 있는 무기였다.
아니,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그녀가 들고 있던 방패다.

공격은 할  없지만, 방패는 그레이프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방어는 할 수 있다. 최면을 걸 시간도 없지만…방패를 전달해 주는  정도는 가능하다.
조금 더 버티면 래피드나 애쉬가 나타나서 도와줄 거다. 에스더가 나온 이상   하나는 반드시 와야 한다.
애쉬는 분명 에스더가 간부 중에 가장 약하다고 했지만…지금까지 에스더가 나올 때마다 둘 중 하나가 반드시  걸 생각하면 에스더는 결코 약하지 않다.
오히려 타락하기 전에 3위였던 만큼, 그 둘이 아니라면 상대할 수 있는 마법소녀가 없다.
아니면 이대로 도망가야 하나?

“아아아아…! 모르겠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그레이프가 걱정되어서 못 참겠다.
단순히 섹스파트너 같은 관계가 되어 있었지만, 떡정이라는 말도 있고 이대로 죽거나 끌려가게 놔둘 수는 없다.
내버려두기에는 마법소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로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루이의 사각방패를 들고 다시 그레이프가 있는 곳으로 달렸다.
그건 그렇고 방패의 무게가 굉장하다. 정말로…나도 그렇게 운동을 했지만 이건 무식하게 무겁다.
역시 루이도 중위권 정도는 되는 마법소녀라는 건가.
내가 들기에는 무척 무거웠지만, 흠집 하나 나 있지 않은 모습이 무척 단단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거라면 분명 쓸만할 거다.

“샌드백~샌드백~아하하하하!!! 그레이프, 뭐야~? 점점 약해지네?”

되돌아가자 에스더가 벽을 등지고 서게 된 그레이프에게  새 없이 불의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어느새 양손에 든 검을 빠르게 휘두르며 그레이프를 점점 벽으로 밀어내고 있다.
그레이프가 조금 공격을 피하려고 하면 날개를 살짝 움직여 몸을 비트는 것으로 검의 궤도를 틀어지게 만들어 따라간다.
하트모양의 꼬리 끝 부분은 균형을 잡는 데 쓰는 것처럼 이리저리 휘둘러대며 공중에서 그레이프를 압박하고 있다.
나는 그레이프에게 사각 방패를 원반처럼 던지며 외쳤다.

“그레이프!! 받아!”


곧바로 그레이프가 비정상적인 움직임을 보이며 방패를 받아들었다.
두 손으로 분명 검을 잡아 다급하게 에스더의 공격을 막고 있었는데, 한쪽 발을 위로 쭈욱 뻗어 방패를 받는다.

“앵거! 왜 도망  친 거에요!”
“닥치고 막아!”
“읏…!”


예상대로다. 방패를 든 그레이프의 머리 위에서 파직 거리던 빛이 빠르게 사라진다.
그레이프를 괴롭히는 저항력이 사라지고 있다.
나는 급하게 방패를 주워 달려온 데다가 던지기까지 한  숨이 차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더는 무리다. 저 방패…진짜 너무 무겁다.
내가 어떻게 던진 건지도 모르겠다…한번 던진 정도로 근육이 찢어진 것처럼 아프다.

“하악! 하악! 하악…! 허억…!”
“앵거…이게 무슨 짓이야?”

지면에 쓰러져서 숨을 헐떡이는 내게 에스더가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스더의 꼬리가 쭈욱 뻗어 그녀가 얼마나 분노했는지를 보여준다.
어차피 공격하지 못할 걸 알지만…에스더가 나를 공격할 수 없다는 최면을 이미 걸어두었기 때문에 달려온 것도 있었지만, 역시  반응은 무섭다.
나는 숨을 헐떡이면서 크게 생각하지 않고 아까 에스더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며 말했다.

“마, 말했잖아…? 난 마법소녀끼리 죽이는 건 싫다고.”
“하아…?”
“콜록! 콜록! 하아…! 하아…!”

그대로 나는 고개를 숙인  목을 긁어내는 통증을 느끼며 기침했다.
숨이 너무 차다. 방패 진짜 너무 무겁다.
천천히 고개를 들고 보자 그 무거운 방패를 그레이프가 한 손으로 들고 있는 게 보인다.
 손에는 방패,  손에는 부러진 날에 마력을 씌운 검.
잠시 소강상태가 되며 에스더가 검을 멈추자, 그레이프는 방패를 제대로 장비하고 자세를 잡으며 내 앞을 가로막아 섰다.


“…그래…내가 악당이라는 거지?”

그런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에스더가 천천히 공중으로 떠오른다.
저 날개 뭔가 이상하다. 전혀 파닥거리지 않아도 펼친 것만으로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다.
자세히 보니 에스더의 일렁거리는 마력이 빠르게 밑으로 쏘아내지는 게 보인다.
마력으로 자기 몸을 바닥에서 밀어내는 건가…?

“앵거…왜 돌아온 거에요 대체…!”
“하아…하아…닥치고, 방패나 들어.”
“후우…설 수 있겠어요?”
“3초만…있다가.”

에스더가 천천히 공중에 떠오르고 두 자루의 불의 검이 하나로 합쳐지는  보인다.
하나의 대검이  불의 검이 그녀의 손에 들리고 천천히 위로 들리고 있다.
그 모습을 본 그레이프는 방패를 든 손을 앞으로 내밀더니 옆으로 서서 검을 몸의 뒤쪽으로, 아래쪽으로 숨긴 자세를 취했다.

“원하는 대로 해줄게, 인질 지키기 게임 시작이야 그레이프.”


에스더의 불의 검이 붉은색에서 푸른색으로, 푸른색에서 흰색으로 점점 하얗게 불타오른다.
점점 마력을 모은 에스더가 그대로 날개를 기울여 공중에서 쏘아지며 그레이프를 향해, 나를 향해 돌진해왔다.

“한번 죽지 말아봐! 아하하하하하!!”

에스더가 마치 혜성처럼 공중을 갈라 날아오자 그레이프는 나를 등진  뒷발로 지면을 짓밟아 땅에 발을 박아넣으며 작게 말했다.

“앵거, 움직이지 마요.”
“뭐…?”
“어떻게든, 전부 막아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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