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8화 〉래피드 (2) (28/299)



〈 28화 〉래피드 (2)

단지 손을 잡힌 것 뿐인데 반응이 상당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 래피드에게 있어 이 손은 보지와 다름없는 상태다.
나는 래피드의 손을 꽉 잡고 살짝 힘을 풀었다가 다시 잡아주며 흔들었다.

“후엑♡ 히익♡ 읏♡”
“아, 아가씨…?”

그저 악수할 뿐인데 래피드의 얼굴이 점점 엉망이 된다.
이 정도로 할까.
주인아저씨도 래피드가 갑자기 고개를 젖히며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리면서 표정이 이상하게 풀려버리는 걸 보고 다급하게 다가오고 있다.
나는 래피드의 손을 놓아주고 인사했다.

“그러면 저는 먼저 가 볼게요.”
“헤엑…♡ 헤엑? 헤에? 네? 앗, 아…?”
“여기 자주 오니까 다음에  봐요.”
“네에? 네…? 아?”

얼굴을 상기시키고 숨을 헐떡이던 래피드는 방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혼란스러워하며 손을 쥐었다 폈다 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그래 봤자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 리가 없다. 나와 손을 잡았을 때만 손이 보지처럼 변하는 최면이니까.

반응이 귀엽다.
래피드의 반응을 보자면 보지가 상당히 예민한 쪽인 것 같다. 아니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감각이어서 당황한 걸지도 모르겠다.
보지가 손에 있어 꽉 쥐어지며 흔들린다는 건 대체 무슨 느낌일까? 상상도 하기 힘들다.

첫 번째 최면은 계획대로, 아니 계획 이상으로 잘 되었다.
래피드가  거리에 나타날 때는 가장 먼저 케이크 가게로 간다.
케이크를 먹은 뒤 행복해진 기분으로 도서관에 가고 그날 읽을 책을 빌린 뒤 공원으로 가 책을 읽는다.
그 후에는 식사하기도 하고 놀러 가기도 하고 마음대로였지만, 처음의 이 동선만큼은 언제나 같다.

인사를 마친 뒤 나는 일단 밖으로 나왔다.
당연히 아직 돌아갈 생각은 없다.
우연이라는 건 원래 연속으로 겹치는  좋다. 래피드가 좋아하는 로맨스 소설에도 나오는 말이다.
우연이 연속된다면 그건 운명이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내게는 래피드의 위치를 추적할 방법이 있었고, 이후의 동선도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래피드보다 먼저 래피드가 다음에 향할 곳으로 이동했다.
도서관에 도착한 뒤 래피드가 좋아하는 소설책이 있는 코너에서 기다린다.
물론 래피드의 위치는 계속해서 확인하고 있다.

잠시 후 케이크를  먹은 래피드가 도서관에 도착했다.
좋아, 일단 여기까지는 잘 되고 있다….

“후우우우…!”

나는 길게 숨을 내쉬며 긴장감을 한번 풀어낸 뒤, 래피드가 전에 읽다가 멈춘 소설을 책장에서 꺼냈다.
책의 제목은 ‘그 남자와의 비밀스러운 관계’
뭐랄까, 미행하면서 알게 된 거지만…진짜 취향이 여러 가지 의미에서 내성적인 여자아이 같다.
케이크를 먹는 걸 좋아하고 로맨스 소설을 읽는 걸 좋아하고….

분명 래피드의 취미는 독서라고 했는데 읽고 있는 책들 대부분은 로맨스 소설뿐이다.
가끔 엄청 어려워 보이는 학술지를 읽는 모습도 봤지만 그건 정말로 가끔이다.
그리고 잠시 후 래피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

자신이 읽던 책이 없어 당황스러워하고 있다.
특이한 취향이라고 생각하지만…전자책이 당연해진 시대에 래피드는 늘 도서관에서 종이책을 빌리는 것을 고집하는 모습을 보인다.
가끔 보면 책을 들어 책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으며 행복해하기도 하던데…책 냄새를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전자책이 당연해진 시대인 만큼  도서관에는 손님도 없고 직원도 입구의 경비원 할아버지뿐이었다.
책을 빌리는 시스템도 기계가 대신해준다. 도서관에는 아무도 없다.
지금 시대에 책을 빌리는 사람은 무척 드물기도 하고…그 말은 래피드와 공통점을 하나 더 만들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는 얘기다.
나는 우연히 만난 것처럼 래피드에게 다가가며 인사했다.

“어? 또 보네요?”
“앗? 아, 안녕하세…아아아!”

그러자 래피드는 당황스러운  일부러 표지가 보이게 들고 있던  손 위의 소설책을 보고 경악하더니 손가락으로 책을 가리키려다가 그대로 손목을 꺾어 접어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 어…? 그, 그  혹시…?”
“응? 아…이 책이요? 재미있어요. 요즘 읽고있는데…특이하죠? 남자가 로맨스 소설이라니.”
“어?! 로, 로맨스 소설 좋아해요?”
“네에, 아까 들고 있던 것도….”
“사랑은 짜릿하게 다가왔다…였죠?”
“오, 알고 계시네요?”
“조, 좋아하는 책이어서…앗, 여기에서 빌리신 거에요?”

나는 래피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내가 산 책이 아니다. 전자책이 훨씬 싼데 이런 활자 쓰레기에 돈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엄청난 가치를 가진 예술품일 수도 있지만…내게는 종이 낭비에 불과했다.
래피드와 대화하려고 읽어두긴 했지만,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그건 다 읽어서 이제 이거 읽으려고요. 전에 다른 사람이 그걸 빌려 갔을  이거 조금 읽어봤는데…재미있더라고요. 벌써 1 챕터를  읽었어요.”
“앗, 그쵸…? 저도 1 챕터는 다 읽었는데….”

알고 있다. 이미 알아봐 뒀으니까…래피드는 자기가 읽는 책에 몰래 머리카락  가닥을 뽑아 책갈피를 꽂아놓는 습관이 있다.
당연히 내가 전부  수거해서 모근을 빨아먹어 줬다.
이 책은 마침 래피드가 딱 앞부분만 읽은 소설이었고, 읽는 반응을 보니 꽤 재미있어 하는  같아서 나도 노리고 있는 소설이었다.
나는 래피드에게 지금에서야 눈치챈 것처럼  직장에서 부장에게 놀란  연기할 때를 떠올려 놀라는 모습을 보여주며 말했다.

“그래요? 아, 혹시…이거 읽고 계셨던 거에요?”
“그, 그렇긴 한데…괜찮아요! 다른 책도 있으니까.”

좋아, 지금이다.

“그럼 먼저 읽으실래요?”
“어? 아, 아니에요…먼저, 오셨으니까….”

거절해도 좋고 승낙해도 좋다. 책을 양보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래피드에게 호감을 얻을만한 방법이다. 돈도 들지 않고 래피드와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좋아하는 걸 양보했다는 인상까지 줄 수 있는 최고의 대사다.

“아니에요, 저는 또 오면 되는걸요. 구해주기까지 했는데 책 양보도 못 하겠어요?”

최고다. 내가 생각해도 내 모습이 너무도 상냥하고 착하고 매력적이게 보인다.
역시 며칠 동안 그레이프에게 현자타임이 될 때마다 고민한 보람이 있다.
 평소 지능으로는 상상도  수 없는 엄청난 계획들이 실현되고 있다.
이왕이면 받아줬으면 좋겠다. 만약 계속해서 거절하면 나도 어쩔 수 없이 이걸 가져가서 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니까.
래피드는  말을 듣고 고민스러운 듯 머뭇거리고 있다.

이미 이 반응부터 내게 호감을 느꼈다는  느껴진다.
취미도 맞고 책도 양보해주고 자기가 구해주기까지 한데다가 마법소녀라는 사실을 비밀로 하고 조용히 해 주고 있는 사람. 래피드가 좋아할 만한 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
오늘은 이걸로도 충분하다. 최고의 첫 만남이다.
이대로 래피드가 책을 받으면 난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서 다음에  만나러 올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래피드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고, 한참을 머뭇거리던 래피드는 날 조용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 그럼…같이 볼래요?”

…어라?
…상상도 하지 못한 대답이 와 뇌가 정지해버렸다.
같이…? 뭘?

“…뭘요?”
“책…저도, 1 챕터까지 봤으니까…같이 볼래요?”

응?
어…?
어라?
래피드가 가만히 올려다보며 얘기한다. 상대도 생각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도  수 있는 훌륭한 답안이다.
래피드에게는 나도 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래피드도 좋아하는 책이니까…같이 보는것도 방법  하나이긴 하다.
교복을 입은 청순하면서도 야하고 귀여운 외모의 래피드가 눈을 치켜뜨고 올려다보며 한 부탁이다.
거절할  있을 리가 없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래피드와 함께 도서관 내의 책상에 앉아 로맨스 소설을 같이 읽게 되었다.

“앗…저는  읽었어요.”
“아, 네.”

꽤 낡은 책상에 서로 어깨를 맞대며 앉아 소설책을 보고 있다.
같이 보기보다는 보는 건 래피드 뿐이고 나는 그냥 페이지를 넘겨주기만 하고 있을 뿐이었지만…이 순간이 믿기지 않는다.
살랑거리면서도 푹신푹신하고 부드러운 래피드의 머리카락이 팔을 간지럽히고, 커다란 가슴이 책상 위에 올려져 무척 동그랗게 변해 있는 것이 보인다.
교복에 감싸인 가슴이 폭력적이다. 푹신푹신해 보여서 만져보고 싶다.

가까이 와서 느끼게 된 거지만 냄새도 부드럽다.
뭔가 달콤하고 부드러운…아, 딸기 찹쌀떡 같은 냄새가 난다. 그런 냄새를 맡아본 건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딸기 찹쌀떡이 떠오른다.
책을 읽느라 집중해서 가슴골이 보인다는  전혀 모르고 있는  귀엽다.
아쉽게도 자지는 그레이프에게 잔뜩 짜내져  서지도 않지만…심장은 두근두근 떨린다.

래피드랑 어깨를 맞대고 앉아있다니…오늘 이런 일까지 기대하진 않았는데….
왠지 일이  풀린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래피드의 가슴을 힐끔거리다가 슬슬 이번 페이지는 다 읽었겠지 하고 생각하며 다음 장으로 넘겼다.

“앗! 잠까♡, 힛?!”
“응?!”

그때 갑자기 래피드가 페이지를 넘기는 내 손을 잡고는 뜨거운 것에 데인 것처럼 확 하고 손을 떼며 야한 소리를 냈다.
그래이프의 목소리와는 또 다르다. 그레이프가 이성 잃고 울어대는 짐승 같았다면 래피드의 목소리는 좀 더 귀엽다. 살짝 아기 새 같은 느낌이다.
바로 옆에서 이런 소리를 내다니. 자지가 벌떡 설 것 같지만…조금 부풀어 올랐을 뿐 빳빳하게 일어서지는 않았다.
대단하다 그레이프, 이렇게까지 착정해 버릴 줄이야….

“어? 어…?”

래피드가 내 손에 닿았던 손을 놀란 눈으로 내려다보며 몇 번이고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고 있다.
이해할 수 없어 당황하는 것 같다. 조심스럽게 책상에 손을 올렸다가 손을 문질러 보기도 하고 책상을 만져보기도 하고 끝을 잡아보기도 하지만, 오히려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하며 당황스러워한다.

“왜 그러세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귀엽다.
그리고 재미있다.
나는 일부러 책을 넘기다 래피드의 손에 손을 스쳤다.

“하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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