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화 〉그레이프 (1) (10/299)



〈 10화 〉그레이프 (1)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만…황당하게도 이걸로 상황은 끝이었다.
애쉬를 따라온 트루비전 사의 구조 헬기들이 높은 상공에서 당연하다는 것처럼 여유롭게 날아다니며 상황종료를 알리는 방송을 시작하는 게 들렸다.

래피드는 힘들어하면서도 주변의 얼마 안 남은 촉수들과 음액에 절어진 시민들을 구조하고 있었다.
비참하다고 해야 할까…기괴한 공간이다. 촉수들에게 당해 찢기거나 다리를 잘리고 겨우 살아있는 부상자들과 방호 쉘터에 숨어들어 간 사람들을 쉘터로 나올 준비를 하게끔 유도하고 안심시키는 방송들이 들린다.

그때 애쉬가 음액에 절여져 있는 그레이프를 손도 대지 않고 허공에 주먹을 쥐는 거로 그레이프를 잡지 않은  잡아 들어 올렸다…염력인가?

“후윽…! 후읏…! 하악…! 애,애쉬이…!”
“그레이프, 오랜만이네.”
“오랜만…? 얼마 전에 만났잖아요…?”
“언제?”
“사, 삼 주 전에….”
“그래? 그때 뭐 했는데?”
“래피드랑 같이 쿠키 먹었잖아요…?”
“삼 주 전이라….”

보이지 않는 갈고리에 걸린 듯 허공에 매달려 있던 그레이프의 몸에 쉴  없이 빛이 번쩍인다. 온몸에 자그마한 전구들이 달린 것처럼 보일 정도다.
빛이 흘러가는 방향을 보니 언제부터인가 래피드가그레이프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아마도 그레이프를 치료해 주고 있는  같았고 한쪽 가면이 어느 정도 부서진 그레이프는 남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애쉬가 잡아 들어 올려주던 염력에서 벗어나 조심스럽게 바닥을 딛고 일어섰다.

“기억에 문제는 없나 보네.”
“정신체크  거였어요…? 정신공격을 하는 괴수는 없었는데…왜요?”
“아…얼마전에 좀 이상한 놈을 봤거든. 아무튼 그레이프,  정도면 아직 에스더한테 이렇게 빠르게 질 정도는 아닌데….”
“아직 이라니…나중에는 진다는 얘기 같잖아요!”
“아까 몇  버텼어?”
“며, 몇 초라니!”
“몇 초?”
“…52초 정도요.”
“하아아…귀찮아지겠네.”

애쉬가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쉬고, 그레이프는 창피한지 움찔 떨며 뒷걸음질 쳤다. 어느새 그레이프의 치료가 끝난 래피드가 손을 거두고…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저기…괜찮으세요?”
“네? 아, 네!”

상냥하다. 천사나 다름없는 래피드가 먼지투성이가  얼굴로 보호받았을 뿐인 날 걱정해주고 있다.
커다란 가슴으로 저절로 눈길이 간다. 래피드의 전투복은 그 상냥한 마음씨와 전혀 걸맞지 않게 너무도 음란하다. 온몸에 달라붙는 디자인 탓에 가까이에서 보면 유두의 형태가 선명하게 보인다.

곧바로 최면을 걸어버리고 멍하니 보고 있고 싶지만…바로 옆의 애쉬가 마음에 걸린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영상 속의 모습이 떠오른다. 최면어플의  주인을 없애버린 것도 있고…방금 전 그레이프에게 한 질문도 마음에 걸린다.
래피드와 그레이프가 그렇게 고생하던 에스더를 잔챙이 취급하듯 순식간에 죽여버린 것도 마음에 걸린다…아니, 그러고 보면 조금 수상한 얘기가 있었다.
에스더가 죽어도 다시 돌아올 거라는 듯한 대화…방위군이 공개하지 않고 있는 기밀정보인 것 같았다.

“…생존자?”
“네? 아, 네.”

갑자기 애쉬가 내 쪽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천천히 다가오는 그녀의 몸에 달라붙어 있던 날카로운 느낌이 가득하면서도 온몸에 달라붙는 전투복이 빛에 휩싸이며 사라져 간다.
어느새 파괴된 주변 풍경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햇빛을 최대한 온몸에서 가리는 옷차림이  애쉬가 새하얀 눈 같은 피부와 빛나는 은발을 흔들며 내 앞에 섰다.

“운이 좋았네. 약골 에스더라서.”

약골…? 그게?
그녀가 마지막에 궁극 마법을 사용한 것만으로도 그 열기에 래피드가   배리어가 있는 곳을 제외하고 주변이 모두 검에 그을려 있는 데다가…건물의 유리창들마저 녹아내려 있는 게 보인다. 철골이 드러날 정도로 파괴된 구조물들은 철골이 반짝이게 녹아있고, 콘크리트는 뜨겁게 달궈져 공기에 빠르게 식으며 아직도 허공을 일렁이게 만들고 있다.
저 높이에서는 구조 헬기가 주변의 열기를 먼저 식히기 위해 안개형태의 물을 살포하기 시작하는 게 보인다.
이게 약한 거라고?

애쉬의 태도는 무언가 괴리감이 느껴진다. 말하는 것도…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는 듯 쫓기는 듯한 분위기라고 할까, 에스더와 싸운 것도 정말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해서 위험한 상황 같은 건 한 번도 없었던  같은 착각이 들게 만든다. 목소리조차도 묘하게 날카롭다.
그때 애쉬가 전투복장일 때의 칼날이 사라진 하이힐로 또각, 또각 하고 엉망이  지면을 두드렸다. 곧바로 주변에 눈에 보일 정도로 선명한 마력의 원이 우우웅 하고 진동하며 퍼져나갔고, 무언가가 내 몸을 훑고 지나가는 느껴졌다.

커다란 소리를 머금은 진동이 온몸을 뚫고 지나가는 느낌이다. 그대로 주변으로 퍼진 기운은 저 멀리 허공을 일렁이게 만들기까지 하며 천천히 사라졌고, 애쉬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다가 그녀의 손에 쥐어진 롯드를 양산으로 변화시켜 머리에 쓰고는 또각또각 하는 발소리를 내며 내게서 등을 돌리고 멀어져갔다.

“래피드, 돌아가자. 상황 종료야.”
“어? 그치만…아직 다친 사람들….”
“전부 살아있어. 괴수 없음.”
“잔해에 묻혀 있는 사람들도 있는걸…잠깐이면 되니까, 구조를….”
“…그레이프?”
“네엣?!”
“구조해.”
“네….”

래피드가 다른 사람들을 마저 구조하려고 하자 애쉬는 혀를 차고 래피드가 치료해 준 그레이프에게 일을 맡겨버렸다.
래피드가 잔해를 하나하나 부드럽게 들어내고 구조가 붕괴되는 걸 배리어로 막아가며 구조하는 것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레이프도 구조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아마 도시가 과도하게 붕괴한 것도 아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혼자서도 어렵지 않게 잔해에 묻힌 사람들을 구조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곧바로 육체강화를 사용한 듯한 그레이프가 한 손으로는 가면의 깨진 부분을 가리고 다른 한 손으로 커다란 잔해들을 치운다는 비현실적 광경을 보여주며 사람들을 구조하기 시작했다.

“가자 래피드.”
“으, 응….”

그러자 래피드도 더는 이 장소에 머무르기 힘들어졌는지 우물쭈물하며  쪽을 살피더니 천천히 애쉬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애쉬가 등을 돌리자마자 이상하게 긴장되어있던 공기가 풀어지며 뒤늦게 현실감이 찾아온다.
 같은 상황이다. 애쉬랑 래피드가 나를 구해주다니.

마법소녀의 진정한 팬으로서 결코 잊을  없는 소중한 경험이다. 이런 경험과 로또에 당첨되는  중 하나를 고르라면 진짜 팬들은 무조건 래피드와 애쉬에게 구조되는 걸 선택할 것이다.
나는 정말 순수한 팬심으로 제정신인 래피드에게 구조를 받는다는 이 꿈과 같은 경험에서 조금이라도 추억을 만들고 래피드와 말을 섞고 싶다는 생각에 천천히 등을 돌리고 애쉬를 따라가려 하는 래피드에게 말을 걸었다.

“저, 저기…혹시 얼마 전에 교복….”
“와아앗!”

그러자 곧바로 래피드가 엉망이 된 지면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하고 애쉬가 고개를 돌려 래피드를 내려다봤다.
래피드는 상체를 숙인  애쉬에게 보이지 않도록 내 쪽으로 다급하게 얼굴을 보이며 입가에 손가락을 하나 가져다 댔다.

“쉬, 쉬잇….”
“래피드? 혹시 겨우 이거에 걸려서 넘어진 건 아니지?”
“아, 아니야! 방에 케이크 먹다 남긴 게 생각나서…!”
“…하아.”

왠지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쉬는 애쉬의 뒤를 래피드가 쫄래쫄래 따라간다. 어느 순간 둘이 손을 잡더니 허공이 일그러지기 시작하고…그대로 공간 이동하며 사라졌다.

공간이동이라니!
소문으로 듣기는 했지만 처음 봤다. 래피드가 공간이동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설마 정말로 사용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래피드는 괴수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구조하는 거로도 유명했지만 애쉬는 그 반대다. 이미 상황이 종료한 후에 시간낭비를 하는 것 보다  때는 쉬고 나올때는 나오는…구조는 트루비전의 구출 드론에게 맡기는 타입이다.

그 점이 래피드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애쉬를 좋아하는 사람이 서로 나뉘는 이유이기도 했다.
래피드는 하나하나 세세하게 구조해주는  좋았지만…그러는 동안 애쉬는  곳이라도 더 찾아가  마리라도 더 많은 괴수를 없애버린다.

조금 피해를 보더라도 문제의 원인 자체를 없애러 가는 애쉬와 당장 들이닥친 상황을 멈추게 만드는 래피드…둘 중 어느 쪽이 정답이라고 단정 짓기는 힘들다.

“무거워엇…! 후읍…!”

그 사이 그레이프는 계속해서 무거운 잔해에 묻힌 사람들을 구출하고 있었다.
하늘에는 트루비전의 드론이 점점 날아들기 시작하는지 드론 특유의 비행소리가 들린다, 방위군이 오는지 저 멀리에서부터 군화 소리가 들린다.
에스더 탓에 달아오른 주변을 식히기 위해서 안개 형태의 물이잔뜩 뿌려지고 있는 덕에 아직까지 드론에게 현장에 있는  모습을 촬영 당하진 않았다.

슬슬 도망쳐야  것 같다. 괴수 전투현장에 직접적으로 관계되어 있었으니…아마 들킨다면 방위군에게 잡혀 정밀검사를 받아야 한다며 기억을 체크당하는걸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촉수에게 피해를 받은 사람들도 모두 혹시나 모를 오염을 확인하기 위해 정밀검사 행이 확실하다. 쉘터 안에 잘 피해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단순한 검사만 하고 보내주지만…현장에서 괴수를 마주친 이들은 모두 정밀검사 행이다.

이대로 이 자리에 있다가는 래피드의 섹스영상을 봤다는 사실과 최면어플에 대해서도 알려질 테고….
생각해보니 이 장소는 굉장히 위험했다. 앞으로 래피드가 나타난 현장에 찾아가 ‘수집’ 하는 것도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에스더를 만난 건 행운이라면 행운이고 불운이라면 엄청난 불운이었다. 덕분에 래피드랑 애쉬를 동시에 보기도 했고 말도 섞었으니….
근처에 방금 막 관둔 회사도 있고 아직 관두지 않은 척을 하고 회사에 숨었다고 하면서 나가려 하면 제약회사 직원들을 귀찮아하는 만큼 쉽게 놔줄 것이 분명하다.
나는 근처의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앗, 저…저기!”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조용히…드론이 날아오기 전에 부서진 건물 안으로 숨어들려고 하자 갑자기 의식을 잃은 사람들을구조하던 그레이프가 다가왔다.
래피드와 애쉬, 그리고 에스더와 다르게 그레이프는 화려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타입은 아니었다. 오히려 육체강화만 꾸준히 익혀 한 가지 마법으로 강해진 특이한 마법소녀다.
그 탓에 근육이 선명히 보이는 육체미 만큼은 애쉬와도 비교할 만 하고…무언가에 버티는 힘은 상위권 마법소녀들 중에서도 꽤 높게 평가받고 있었지만….
구조를 잘해준다거나, 사람들과 친화력이 높은 타입은 아니었다.

래피드처럼 자기가 구조해  사람 하나하나에게 안부를 묻는 성녀같은 타입이 아닌, 우직하게 자기 할 일만 하는 여전사 타입에 가까웠다.
갑자기 내게 말을 걸 만한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대체 무슨 일이지? 싶어 긴장해있자 가면이 부서진 쪽의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리고 있는 그레이프가 갑자기 주변을 둘러보며  가까이 다가온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처럼 에스더에게 당해 옷이 잔뜩 찢긴 채로 탄력적인 운동선수 같은 몸을 드러내며 다가오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진다.

내 마음속에는 래피드…그리고 애쉬밖에 없지만…확실히 그레이프도 괜히 상위권에 있는  아니라는  알 수 있는 몸매다.
그런 그레이프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 혹시, 아까 그건…비밀이신가요?”

…아까 그것?
뭘 말하는 건지 알 수 없다. 혹시 래피드가 교복을 입고 돌아다닐 때 일을 슬쩍 얘기했던 걸 이해하기라도  걸까? 그레이프는 애쉬, 래피드와 드물게도 사이가 좋은 마법소녀로도 유명했으니…그럴수도 있다.
그런데 그레이프의 입에서는 내가 생각도 하지 못한 얘기가 나왔다.

“…혹시, 마법…소녀세요?”
“…네?”
“아니, 그게…혹시 마법을 각성하신 건가요? 정말 드물지만…그, 남자가 ‘받아들이는’ 건 들어본  없지만…에스더에게 썼던 그거, 마법이죠?”

오싹해지며 심장이 빠르게 뛴다. 에스더? 에스더에게 썼던 그거…?
…최면?
아니…마법? 마법이라고…? 그레이프는 이걸 마법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최면어플이 아니고…?
남자가 받아들인다는 건 뭐지?

“마법, 이라뇨…?”
“대단해요,  에스더에게도 통하는 수준의…그, 속박 마법이라니. 맞나요…? 그, 촉수 안에 있어서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뭔가 말하니까 에스더가 멈춰준 거죠? 덕분에 살았어요!”

스플릿 마우스 형태의 촉수에게 상체를 삼켜져 있으면서도 내 목소리를 희미하게 들은  같았다. 래피드도 내 심장 소리를 듣고 걱정해 다가오기도 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렇게 짐승같이 울어대면서도 마법소녀는 마법소녀인지 촉수 밖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대체 내가 무슨 일을 한 건지는 모르는 것 같았지만…이건 위험하다. 내가 숨더라도 그레이프가 누군가에게 내가 에스더에게 최면을 걸었다는 사실을 말하면….
위험하다.

심장이 빠르게 뛴다. 주변을 살펴보니 사람들은 모두 음액에 절여져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아직 트루비전의 드론들은 도착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장에라도 도착할 듯 드론 특유의 비행소리가 가까워지고 있다. 안개가 조금씩 일그러지며 방위군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한다.

마법소녀는 눈앞의 그레이프 하나뿐….
…할 수밖에 없다.

“그레이프님, 팬입니다 혹시…비전폰에 사인 좀….”
“어?! 패, 팬…? 저요?!”

영업사원다운 립서비스를 하나 해주면서 비전폰을 들어올린 나는 그레이프에게 보이지 않게 곧바로 마법소녀 최면 어플을 켰다.  멀리에서부터 안개가 점점 더 흐트러지는 게 보이며 최면어플이 실행되어간다.

“아, 문구는 ‘검으로 베지 못할 것을  때까지’ 라고 적어주세요.”
“우와아…그 문구…저 처음으로 뷰튜브 만들어졌을 때 한 말이었는데…부, 부끄럽네요.

잠시  화면이 켜지고 검은색과 붉은색, 흰색이 낀 노이즈가 가득한 화면이 나타났다.
나는 곧바로 당황한  웃는 그레이프에게 화면을 보여줬다.

“여기에, 잘 보고 사인해주세요.”

혹시라도…애쉬처럼 저항하거나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그레이프 특유의 강화된 반응속도로 눈을 피해버리면 그땐 큰일이다.
…걸려라, 제발!

“…어?”

한쪽 얼굴을 가리고 있던 그레이프의손이 천천히 떨어진다.
깨진 가면 너머의 맨 얼굴이 보이고 있는 그녀는…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듯한 멍한 눈을 하고 있었다.
좋아….
걸렸다.

“그레이프, 여기에서 나를  기억을 전부 잃….”

곧바로 나는 그레이프에게 명령을 내리고 건물 안으로 도망가려 했다.
하지만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한가지 문제점을 떠올렸다.
그레이프는 애쉬, 래피드와 친한 것으로도 유명한 마법소녀다.
혹시 나중에 서로 오늘의 얘기를 하다가 이상한 점을 느끼기라도 한다면….
그때는…애쉬에게 조금 전의 에스더처럼 생크림처럼 몸이 뭉개지며  토막이 나고 말 것이다.

“아니지, 윽…시간이 없나….”

다른 명령을 떠올릴 시간이 없다. 잠시 후면 방위군들과 드론이 도착하고 ‘마법소녀와 접촉하고 있는 수상한 모습’  기록으로 남겨져 버릴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그레이프에게 다른 명령을 내리고 곧바로 최면어플을 내리며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그레이프는 그대로 멍하니 서있다가…천천히 정신을 차리며 두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어…어라? 어? 나 뭐 하고 있었지…?”

곧바로 그레이프는 방위군들의 군화 소리와 드론 비행소리를 듣고 구조작업을 돕기 시작했고…나는 잠시 후 건물 안에서 나오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밖으로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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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이번에 온 방위군은 내가 아는 얼굴이 몇 있었고, 나에게 질리도록 영업당한 기억이 있는 덕에 얼굴을 보자마자 당장 사라지라며 보내줬다.
수트가 촉수에게 물려 뜯겨 있던 건 그냥 벗어서 버려버렸고, 와이셔츠 차림으로 나와 일하다가 나온 모습을 연기했다.

덕분에 나는 집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었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샤워도 하지 못한 채 침대에 앉아 머릿속을 정리했다.

“후우우우….”

아니…정리하려고 했다.

[똑똑똑, 똑똑똑]

“…벌써?”

현관문을 일정한 박자로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이미 엉망이 되어 있는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라리 잘 됐다. 머릿속을 정리하기 전에…당사자한데 궁금한 걸 물어보면 더 잘 알  있게 되겠지.

“…어?”

그대로 현관문을  나는 문 앞에 있는 여자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되었다.
문앞에는…가끔 회사 근처 카페에 갈 때 봤었던, 예쁜 걸로 굉장히 유명했던 근처 회사의 여사원이 서 있었다.
분명 법률회사의 비서로…너무 예뻐서 학생때는 발레랑 체조를 했다는 사실까지 소문으로 다 드러난….
…잠깐만, 진짜로?

“…그레이프였어?”

진짜로 그레이프가 컨셉같은게 아니고…진짜 일에 찌든 회사원이었단 말이야?
인터넷에서 가장 큰 논쟁 중 하나가 지금 이 자리에서 풀렸다. 그레이프는 진짜 회사원인가 아니면 회사원인 척 컨셉을 잡고 있는 마법소녀인가….
그 법률로펌에서 맨날 문서 작성하다가 힘들어서 카페로 오고, 그때마다 고백하는 사람들한테 지친 얼굴로 거절하던….
잠깐만?
그, 나도 고백했다가 차인 그 여비서가…마법소녀라고?

“…어? 어? 나 여긴 왜….”

그때, 내가 걸었던 최면이 풀리고 평소 일상생활을 할 때의 정복을 입은 그레이프가 정신을 차리며 당황스러워했다.
내가 다급하게 걸었던 최면은 나와 있었던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모든 상황이 종료되면 의식 없이 내 집으로 찾아오라는 것이었고…혹시나 했지만 다행히도 그레이프는 최면 그대로 내 방으로 찾아왔다.
최면대로 행동한 그레이프는 당연한 것처럼 최면이 풀려 제정신을 차렸고…나는 준비해둔 최면 어플을 그레이프의 눈앞에 곧바로 들이밀었다.

“…이, 일단 들어와.”
“네에….”

또다시 초점이 흐려진 그레이프는 조용히 내 방 안으로 들어왔고, 현관문이 천천히 닫히며…철컥! 하는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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