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최면어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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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피드에게 처음으로 최면을 건 후 집으로 돌아온 나는 인터넷을 켜 정보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비전넷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느린 속도와 그 탓인지 고용량의 파일은 쉽게 올릴 수도 없는구시대의 인터넷 안에는 여러 비밀스러운 사이트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마약 거래, 범죄적인 영상 공유, 개인적인 일상 채널…의외로 단순히 귀여운 고양이 사진을 올릴 뿐인 사이트도 있었지만…시크릿 채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이 수많은 사이트 중에서도 내가 주로 활동하는 곳은 하나뿐이었다.
현재 비밀 인터넷 안에서 유명하고 큰 사이트들은 몇 되지 않는다.
여성에게서 음란한 감정에너지를 채취하는 괴수와 관계하는 영상을 판매하는 금지된 영상 거래 사이트, 그리고 그렇게 위험하지 않은 괴수를 판매하기도 한다는…촉수사랑위원회와 괴수의 체액에서 채취한 진짜 최음제를 포함한 마약 거래 사이트.
그리고 가장 큰 사이트가 바로 마법소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나는 이 사이트에 정기적으로 접속하며 아무에게도 공개되지 않은 마법소녀의 비밀스러운 음부를 방대한 자료수집과 확실한 모델링을 통해 3D모델링으로 최신식 정보를 유료공개하고 있는 유명한 회원…’뷰지도장’ 이었다.
이 사이트는 그저 정보를 공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여러 마법소녀들에 대한 상세한 정보와 칼럼을 유료로 판매할 수도 있는 마법소녀 관련 굿즈/설정집 상점 같은 곳이었다.
실제 마법소녀의 머리카락이나 손톱같은 물건은 무척 비싼 가격에 판매되기도 했으며, 그러한 흔적만을 수집해서 다니는 수집가들도 존재했다.
최근 떠오르고 있는 신성인 사회에 찌든 회사원 같은 이미지의 마법소녀 그레이프, 나이는 많지만 누가 봐도 연하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합법 마법소녀 루이쨩 같은 다른 마법소녀들에 대한 정보와 굿즈도 많았지만…역시 가장 메이저하고 가장 값어치 있는 상품은 래피드와 애쉬의 굿즈. 그중에서도 잘못 걸리면 정말 죽을 수도 있는 애쉬와 관련된 물건들은 무척 비싼 가격에 거래되고는 했다.
원래 나는 이런 실제 흔적과 관련된 제품들만 관심이 있는 수집가 타입에 속했지만, 이 사이트에는 마법소녀와관련된 물품 외에도 판매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마법에 대한 고찰과 마법소녀에 대해서 학술적으로 연구하거나 추론한 문서를 판매하는…’설정덕후’ 들의 칼럼집.
실제 방위군에서 일하고 있는 박사와 교수도 있는 등, 무척이나 격식 높은 토론의 장으로서 마법에 대한 고차원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고 그러한 대화 내용을 판매하는 형식이었다.
많은 유료 포인트가 필요하기도 해서…그돈으로 희귀 상품을 수집하면 모를까 평소라면 이런 복잡한 내용에는 관심도 가지지 않을 것이지만…지금 내게는 래피드의 머리카락 같은 것보다 정보가 필요했다.
[마법소녀의 마법에 대해]
[차원붕괴의 시작이 먼저인가, 마법소녀가 먼저인가.]
[마법소녀라는 명칭에 대한 오류.]
[작성자가 삭제한 글입니다.]
[작성자가 삭제한 글입니다.]
[‘뷰지도장’ 님의 여러 스캔 자료를 통해 추론하는 마법소녀의 보지에 대한 추론.]
때로 올라온 글들은 너무 위험한 내용이다 싶으면 삭제되기도 했다.
그중에서는 유명 회원 중 한 명인 나의 자료들을 참고해 작성된 문건도 있었다.
포인트가 아까워서 보지는 않았지만, 글에 대한 평가가 낮은 거로 봐선 별로 좋은 내용은 아닐 것 같았다.
계속해서 사이트를 뒤적이던 나는 결국 내게 필요할 것 같은 문서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애쉬는 왜 정신침식 괴수에 면역을 갖는가?]
아마도 머리 위가 파직 거리던 것과 관계가 있는 것 같았고,나는 제목을 클릭해 포인트를 지불하고 문서를 읽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2동박사입니다.
오늘은 방위군 내부의 연구자료를 통해, 애쉬의 정신침식 괴수에 대한 면역을 병사에게 적용할 수 있는가 에 대한 내용을 짧게 정리해 드리고자 합니다.
괴수들에게 평범한 인간이 가장 취약한 점은 바로 그들이 발하는 특정한 정신파장에 의한 과도한 발정, 공포유발입니다.
괴수에게 발정한 여성 병사는 그들의 제조공장에 납치당한 뒤 구출되어도 재투입된 전투 중 배신할 확률이 높았으며, 남성 병사들은 조그마한 벌레형 괴수에게도 과도할 정도의 공포를 느끼고는 합니다.
001번. 애쉬는 이러한 정신공격에 대해 완전한 면역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그 특징으로서 정신공격을 당한 순간 두상에 빛이 쉴 새 없이 번쩍이며 침투에 저항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연구소 내에서는 ‘헤일로’라고 부르고 있으며, 헤일로를 연구해 본 결과 정확히 말해 애쉬가 정신공격에 완전면역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속적인 발광현상은 말하자면 마법을 사용할 때의 특정적인 현상, 마력광이 작게 점멸하는 것이 반복되어 일어난 현상이라 할 수 있으며, 면역이 아닌 지속적 치유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애쉬는 특유의 강화마법을 사용해 자신의 신체를 지속해서 회복시키는 전투방식을 사용하는 만큼, 정신 또한 같은 방식으로 지속 치유되고 있는 것에 가깝습니다.
추가로 앞서 마법소녀의 변신에 대한 분석 문건에서 발언한 바 있는 ‘신체 백업 능력’ 이라는 가설과 같이, 애쉬는 자신의 정신 오염도에 대한 지속적인 백업을 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즉, 면역은 아니나 면역에 가까운 회복력과 회복을 뛰어넘는 오염에도 백업을 불러일으키는 정신 복구를 행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허나 래피드는 이와 전혀 다르게 정신계 괴수에게 무척 약한 모습을 보이며…이에 대한 내용은 이후 [두 마법소녀의 마법 차이점 - 3] 에서 서술하겠습니다.
또한 애쉬는 자신의 마력을 완전히 개인화하는 것으로 다른 마력의 침투에 대한 저항성을 지니는 걸로….]
“켁, 뭐야 이 가격….”
글 내부에 있는 다른 문건에 대한 링크를 클릭하니 어마어마한 포인트가 필요하다는 경고창이 나온다.
이래서 설정덕후들이 싫다. 글뿐인 내용에 대체 왜 이렇게까지 비싼 가격을 책정하는지….
하지만 지금 내게 무척 중요한 정보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링크된 글을 클릭해 결제하고 읽기 시작했다.
[2동 박사입니다.
앞선 문건에서 마법의 발현이란 괴수를 통해 발견하게 된 감지할 수 없는 미지의 에너지인 감정 에너지와 함께 또 다른 에너지인 마력을 사용해 발현하는 것으로 추리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마력이란 연구소 내에서는 알파 에너지라 부르는 힘이 한번 가공되어진 고출력의 에너지로, 마법소녀들은 마력을 체내에 구성, 저장, 회로화, 방출하는 것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관측되었습니다.
이 마력을 체내에 구성하여 자신과 자신의 마법에 적합하게 적응시키는 과정을 저희는 마력의 개인화 라고 부르고 있었으나, 최근 001, 애쉬에게 부정당했습니다.
001은 이를 정제과정에 가깝다 말하고 있으며,이러한 추리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방법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자 하고 있으며, 래피드와 애쉬의 마법의 차이점에서 연구소측은 사람에게 적합한 마력, 마법이 따로 존재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감정 에너지와 같이 마력의 구현에는 강한 감정이 필요하다고 추리 중이며, 그를 통해 정제된 마력은 각각 다른 성질을 띤다는 가설을 내렸습니다.
래피드는 누군가를 치유하고 보호하는 마법에 특화된 만큼 마력을 타인에게 작용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에 적응한 마력이 그만큼 외부의 마력과 자주 접할 필요성을 느껴 다른 마력에 대한 저항력이 약한 것으로 관측되고 있습니다. 다만 반복적인 자극에는 점점 반발력이 발생하기 시작해 정신계열 공격에 빠르게 저항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반면 애쉬는 Unknown 001, 롯드를 사용해 방출된 마법을 고정하는 것으로 마법마저 자신의 개인 영역 안에서 순환시키는 것으로 위상의 완전한 개인화를 일으켜 외부의 침식에 대한 강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래피드가 강화마법을 시도하다가 실패했을 때 그에 대한 피해를 애쉬가 받은 것으로 보아 모든 영향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며, 자신이 해롭다고 판단하거나 아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자의 공격을 차단하는 것으로….]
“흐으으음….”
비싼 가격만큼 값어치를 하는 것인지 문서는 상당히 세세하게 작성되어 있었다. 정식 문건은 아닌 듯 추리하거나 가설이라는 얘기가 많았지만…이 2동박사 라는 사람은 아마도 방위군의 내부 인물로 보이며 내용도 안에서 일어나는 연구결과에 관한 내용이 많았다. 그 말은 이 가설과 추리 자체가 연구소 내에서 나오고 있는 얘기라는 거겠지.
문서 자체도 이 정도면 비쌀 만 하다는 생각도 든다.
래피드가 정신계열 마법에 약하다는 점은 이미 사이트 내부에선 결론이 난 얘기인 것 같았다.
사이트 내에서 판매되고 있는, 뷰튜브에서 삭제된 래피드와 애쉬의 전투영상들을 통한 추리도 있었고, 방위군 병사 중 누군가가 직접 목격한 내용을 통해 어떤 괴수를 만났을 때 피곤해하는 것으로 보이는지에 대한 글도 보인다.
결론을 내리자면…래피드가 최면에 걸린 건 확실했고, 어째서 최면이 도중에 풀렸는지도 알 수 있었다.
래피드는 정신공격에 대한 저항력이 약하지만, 반복적으로 당하면 저항하게 된다.
즉, 최면을 걸고 명령하는 횟수가 너무 많았다는 얘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최면 어플에는 횟수에 대한 경고 같은 건 나와 있지 않았지만…이렇게 되면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만났을 때 최면을 몇 번 걸 것인가…어떤 명령을 내릴 것인가를 미리 정해 둘 필요가 있어 보였다.
겨우 글 두 개를 본 것만으로도 포인트가 상당히 깎여있었다. 자세히 보니 이 2동박사 라는 사람은 굉장히 사이트 내에서 유명한 사람인 듯싶었고, 글 하나하나의 가격이 다른 사람이 쓴 글의 10배는 간단히 넘는가격으로 책정되어있었다.
하지만 글 내용을 본다면 그럴만한 가치가 있어 보이긴 했고…나는 댓글도 봐야겠다는 생각에 스크롤을 내렸다가 무척 흥미로운 댓글을 발견했다.
-최면술사 : 흥미로운 얘기네요. 결국 개인의 퍼스널 리얼리티가 외부에 현상으로서 발현된다는 얘기인가요?
└2동박사 : 맞아요. 술사님 저번 글 재밌었어요.
└최면술사 :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글을 보니 애쉬가 왜 강한지 알 것 같네요…성격이 그렇게 도도한 이유도…개인 사념의구축이 공격력과 관계가 있는 거군요. 둘이 완전 정반대네요.
└2동박사 : 래피드는 말씀하진 퍼스널 리얼리티가 그리 강하지 않아요. 자신만의 현실을 구현한다기보다는 무언가 기억을 떠올려 덮어씌우거나 원래 있는걸 조금 변화시키는 느낌이죠. 반대로 애쉬는…위상 자체를 변이시키는 무언가에요.
└최면술사 : 얼마 전에 연구소 폭발 사고는 혹시 실험 중에…?
└2동박사 : …그거 폭발사고가 아니라 절단사고에요. 애쉬는 차원이 달라요…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마법 자체가…다른 차원의 힘을 가져오는 느낌이에요.
닉네임이 최면술사라니…최면앱을 들고 있는 만큼 무척 관심이 간 나는 최면술사의 닉네임을 클릭해 작성글을 검색해봤다.
[최면의 시작]
[대화를 통한 최면]
[호감을 얻는 화술]
[영업은 최면이다]
“음…?”
제약회사의 영업사원인 나로서는 굉장히 마음에 거슬리는 제목들이 보인다.
뭐지? 영업사원 교육시간 때 봤던 것들하고 좀 비슷한 것 같은데.
포인트도 그리 비싸지 않아 살펴보니 정말 대단할 것 없이, 대화도 의도하고 해야 상대가 유도되어 온다는 일종의 화술 강의들이었다.
그런데 조금 더 스크롤해보니…굉장히 수상한 글들이 보인다.
[어둠의 최면]
[최면 쾌락]
[지위박탈과 세뇌]
대체 무슨 글인지 모르겠지만…이것도 엄청난 가격으로 책정되어있다. 2동박사의 글보다 5배는 비싸다.
이런 무식한 가격은 낼 수 없다는 생각에 슬쩍 가장 최근에 올린 저렴한 글을 클릭해보니…정말 별 것도 없는 글이 나왔다.
[최면해서 자위하기]
[실제로 제가 해 보지는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최면을 걸어서 자위하면 쾌감을 느끼는 것을 극대화해 본래의 오르가즘보다도 더욱 질 높은 쾌락을 얻는 것으로도, 전혀 쾌감을 느끼지 않는 자위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통해서는 높은 수준의 자기최면이 필요하며 자기 자신을 유도한다는 방법을 해결하기 위해선….]
무언가 고급스러운 정보를다루는 글들에 섞여 있어서는 안될 것 같은 저급한 내용이었는데, 그냥 슬쩍 쭈욱 내려보니…신기하게도 2동박사의 댓글이 달려있었다.
-2동박사 : 이거 기분 좋네요…대박, 좋은 글 잘 봤어요.
└방위구닌조아 : 박사님, 혹시2동에 계신…그 머리 묶으신….
└2동박사 : 현실 발언하시면 신고할 거에요.
└방위구닌조아 : 아니 닉네임 너무 대놓고 지으신 것 아니십니까. 저 얼마 전에 밤에 커피 가져다 드린 그놈입니다…다름이 아니고 혹시 그때 이 글 보고 계셨던 건지….
└2동박사 : …연구실로 올라오세요.
└방위구닌조아 : 네?! 이 시간에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이트 내에서 회원 간 현실의 신상정보를 언급하는 것은 금지되어있다.
때문에 현장에서 마주치는 일이 종종 발생하는 ‘수집가’ 들도 서로에 대한 얘기는 사이트에서 절대 하지 않았고, 2동박사의 말대로 저렇게 현실과 관련된 발언을 하는 건 매너 위반이었다.
겨우 글 세 개를 읽은 걸로 지금까지 쌓아온 포인트의 1/3을 날려버린 나는 설정덕후들을 저주하며 지금껏 본 글을 통해 얻은 정보를 정리했다.
애쉬는…일단 최면을 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건다고 해도 아마 영상 속의 최면어플 전 주인처럼 반으로 갈라져서 죽게 될 가능성이 높다.
즉, 이 최면 어플은 래피드에게 쓸 수는 있지만…애쉬에게는 쓰기 힘들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지도에는 애쉬의 위치도 같이 나온다.
그 말은…최면으로 한 번에 걸 수 있는 명령의 횟수가 제한되어있으며, 래피드에게 최면을 걸다가 혹시라도 애쉬와 만나지 않도록 지도를 통해 애쉬의 위치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였다.
래피드에게 최면을 걸어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내다가 애쉬와 만나면 반으로 갈라져서 죽는다.
영상에서처럼 애쉬도, 래피드도 제정신을 차렸을 때 모르는 남자가 정신침식 같은 걸 하고있다면…래피드도 말리지 않을 테고 애쉬도 멈추지 않는 게 당연하다.
불안한 미래가 약속되어 있는 듯 했지만…그런데도 그만둘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내 비전폰에 저장되어 있는 그날 화장실에서 촬영된 래피드의 사진들과 최면에 당해 다른 남자의 자지를 빨아대고 엉덩이를 내밀던 영상, 그리고 진짜인 게 확실해진 최면어플이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런 유혹을이겨내고 최면어플을 삭제할테지만…나는 다르다.
나는 그런 겁쟁이와는 달랐다.
정보를 얻은 내가 제일 먼저 하기 시작한 건 최면어플의 규칙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명령은 한번에 5개. 10번이 되기 전에 래피드가 저항하기 시작했으니…안전하게 그 정도로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최면은 래피드에게만, 애쉬에게 죽고 싶지 않다.
최면이 갑자기 풀리거나 들켰을 때를 대비해, 내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게끔 하고 도망갈 준비를 해둔다.
데이터로 추적당하거나 감시당하지 않을 종이노트를 펼쳐 이 비밀스러운 계획을 정리해 넣는다. 화장실에서 래피드의 가슴을 만진 후 며칠 동안 계속해서 어플의 추적기능을 통해 그녀의 위치를 확인하며 자주 가는 장소를 체크해뒀다.
결국, 이건 래피드와 얼마나 많이 즐기고 애쉬를 피해 다니느냐 하는 게임 같은 거였다.
나는 기대감에 젖은 와중에도 철저하게 준비하다가…문득 한가지 이상한 생각이 들어 펜을 멈췄다.
생각해보니 왜 도망쳐야 하지…?
처음 A구역으로 이사를 하며 내가 가졌던 꿈은 그저 래피드를 보기만 하는 거였지만, 때때로 래피드와 친해져서 친구가 된다거나 남자친구가 되는 망상도 하고는 했다.
그건 누구나 다 하는 망상이며 비전넷에 올려도 검열당하지 않는 공공연한 상상이 되어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의 망상에 불과했다.
하지만…최면어플이 있는 지금의 나는 다르지 않을까?
영업사원으로서 사람과 친해지는 게 그렇게 자신이 없는 것도 아니다.
최면어플을 잘 이용해서…그녀와 친해지고 멍한 눈으로 의식 없을 때의 래피드를 만지고 끝나는 게 아닌, 그녀의 일상의 한 부분이 되는 것….
바로 이거다.
“래, 래피드랑…사귄다!”
나는 계획의 방향성을 바꾸고 밤늦게까지 노트 위에서 펜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