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5화 〉 외전 4. 식사하세요
* * *
“….”
차 한 잔을 마시면서, 율리아는 자신 앞에 놓인 서류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여전히 엄청난 양을 자랑하는 업무량이었지만 그나마 이 정도면 많이 나아진 것이다.
대륙을 통일하고 지난 몇 년 동안 얼마나 바빴는지 말도 못 할 정도였다.
일국의 왕이자, 한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데 제 아이한테 신경조차 제대로 못 썼다.
그 덕분에 하나뿐인 제 딸이 잔뜩 토라져서는 많이 싸우기도 했다.
다행히도 지금은 많이 나아진 편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똑똑.
“폐하. 시종장입니다.”
“들어와.”
허락이 떨어지자 한 여인이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좀처럼 보기 힘든 은빛 머리칼과 보라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마족.
시녀로 시작하여 몇 년 만에 시종장 자리에까지 오른 플랑슈였다.
그녀에 관해서는 초기 약간의 말들이 오고간 적이 있었다.
다른 자리도 아니고 마왕 곁을 지키는 시종장 자리인데.
여태껏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알 수도 없는 이에게 그걸 맡기기는 좀 그렇다고.
허나 플랑슈는 그런 의문들을 자신의 위치에 대한 충실함과 압도적인 실력으로 치워냈다.
“차 한 잔 타왔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누구 하나를 불러 차 한 잔을 부탁하려던 참이었다.
플랑슈는 마치 그걸 느끼기라도 한 듯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걸 가져왔다.
이래서 클라우스가 이 여자를 시녀로 삼으라고 한 것일까, 생각을 하면서.
율리아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녀가 내민 차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클로디아는?”
“클라우스님과 함께 정원에서 산책 중이십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휴가에서 복귀를 했지.”
과연 자신이 내어준 한 달의 기간 동안 무엇을 하고 왔을까.
율리아는 당장이라도 클라우스를 붙잡고서 그 질문을 하고 싶었다.
어디로 가서 누구를 만났는지, 그 누구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어떤 일을 했는지.
한 남자의 아내이자 한 신하의 주군으로서 무조건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율리아는 클라우스가 휴가에서 복귀한 날 그를 부르지 않았다.
다만 다음날에 잘 쉬다 왔냐고 그를 안아주면서 나긋하게 속삭였을 뿐이었다.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알고 싶었지만 애써 그걸 억눌렀다.
‘손에 쥐려고 하면 할수록 빠져나가는 법이야.’
어린 시절의 불우한 경험 때문일까, 그게 아니면 철이 덜 들었던 터일까.
자신의 것은 무조건 제 손에 쥐고 있어야만 안심이 되었었다.
조금이라도 빠져나가려고 치면 그건 자신에 대한 배신처럼 받아들여졌다.
이러지 말자, 하고 스스로에게 몇 백 번을 중얼거려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가까운 이들에게 당했던 배신, 그 기억들이 율리아를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잡고 있지 않으면 떠날 수도 있는 자들이라는 마음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해서 클라우스와 처음 만나고 그와 점점 가까워지던 사이에 집착과 독점욕도 점점 강해졌다.
이 남자가 자신 이외에는 더 나은 이를 만날 수 없다는 확신이 생겼음에도.
그는 아빠가 되고 자신은 엄마가 되어 둘의 사이에 아주 예쁜 딸이 탄생했음에도.
클라우스가 헌신적으로 자신을 보살피고 따름에도 그 마음을 쉽사리 가라앉히지 못 했다.
그러다가 겨우 그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곁에 두고 싶지만 그의 모든 것을 쥐고 싶다는 마음은 거두었다.
자신이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상대방의 마음은 더 쉽게 떠난다는 것을 누군가가 일깨워주었다.
“플랑슈.”
“네, 폐하.”
“지난 번 네 조언은 참 고마웠다. 덕분에 많은 도움이 되었어.”
“그리 말씀해주시니 그저 영광일 따름입니다.”
여유를 가져야만 진정 자신이 지니고 있는 최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플랑슈가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율리아는 다시 한 번 차를 홀짝였다.
“따로 보고할 사항은?”
“키엔마이어에서 서신이 두 통, 그리고 붉은 독거미 측에서 보고서 세 장이 도착했습니다.”
“다넬은 안부 서신을 보낸 듯 하고, 붉은 독거미는 또 그 사이에 일 하나 한 모양이군.”
“그런 것 같습니다. 바로 가서 가져올까요?”
“아니야. 급한 일이었다면 리르를 통해서 바로 보냈겠지. 오늘 업무량도 충분히 많으니 그 정도는 내일로 미뤄두고 싶어졌어.”
“알겠습니다, 폐하. 허면 그리 하겠습니다.”
그 후로 잠시 침묵이 흐른다.
율리아는 차를 마시기 때문에, 그리고 플랑슈는 그런 마왕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당연한 침묵이나 또 둘만 있으니 어색한 기운이 날 수밖에 없었다.
“요 며칠 보니까 말이야.”
마침내 찻잔을 다 비운 후, 율리아가 다시금 입을 연다.
“클라우스의 식사량이 많이 줄었어.”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혹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단순히 식사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라면 좋겠지만.”
“메뉴는 평소 즐기시던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주방장도 바뀌지 않았고 재료에 대한 문제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제가 전부 확인했습니다.”
“그런데도 식사량이 줄었다는 건 아주 이상한 일인데.”
이건 클라우스한테 집착하는 일이라기보다는 남편의 건강을 신경 쓰는 여인의 모습이야.
율리아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이면서 슬쩍 플랑슈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 역시 이런 자신의 걱정에 동조한다는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덕분에 또 자신이 괜한 욕심이나 집착을 부리고 있다는 게 아님을 확신한 율리아는 말을 이어나갔다.
“식사 시간에 클로디아가 자꾸 그 이에게 달라붙곤 했지.”
“왕녀 마마께서 먹여달라고 떼를 쓰기는 했었습니다. 하지만 시녀 리리가 주의를 주고 클라우스님께서도 이제는 왕녀의 체통을 지켜야한다고 설득을 하셔서 더는 그러시지 않습니다.”
“녀석이… 이 어미가 그리도 주의를 줄 때는 들은 체도 안 하더니.”
율리아의 투덜거림에 플랑슈는 잠깐 고민을 했다.
그건 아무래도 마왕 폐하께서 옆에 달라붙어서는 자신도 먹여달라고 클라우스님께 요구를 하셔서 그런 게 아닐까요, 라는 말을 할까 말까로 말이다.
아이에게 엄마나 아빠가 경쟁자가 되면 그것만큼 피곤하고 힘든 일이 없는데.
율리아는 제 남자에 대한 독점욕이 워낙 커서 다른 여인들은 물론이고 딸까지 무의식 중에 자꾸만 밀어내려고 하고 있었다.
다행히 요즘에는 그런 부분이 많이 수그러들었기에 따로 언급을 하지 않았다.
“가장 빠른 방법은 역시나 직접 물어보는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그렇겠지. 허면 플랑슈. 네가 기회가 되거든 한 번 물어봐. 넌 마왕가의 식솔들을 책임지는 시종장이니 그런 걸 묻는다고 해서 실례가 되지 않는다.”
“폐하의 명령 곧바로 시행하겠습니다.”
그리 대답한 플랑슈가 찻잔을 정리한다.
더 할 말이 없다면 자신도 이만 물러가겠다는 뜻을 표명한 것.
시종장의 그 행보를 가만히 바라보던 율리아가 천천히 입을 연다.
“사실 말이다.”
“네, 폐하.”
“그가 휴가를 받아서 어디로 갔는지, 무엇을 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대충은 예상이 가. 그걸 직접 확인하고 싶었지만 애써 억누르고 말았지.”
“현명하신 선택이셨습니다.”
“그래. 그에게도 그렇고, 다른 여인들에게도 그게 좋은 일이겠지. 나 원, 처음에는 그 여자들에게 자비로운 마왕처럼 말해놓고 이렇게 욕심을 불태워서야. 본처 자존심이 안 서네.”
“클라우스님은 마왕 폐하의 반려입니다. 그 분과 하루의 시간을 주시는 것마저 대단한 자비이고 크나큰 영광이니 그 분들도 따로 불만을 표시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넌 어떠냐, 플랑슈?”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율리아의 질문에 플랑슈가 그녀답지 않게 살짝 놀란다.
율리아가 어떤 의도로, 무슨 대답을 원해서 저런 말을 하는지 예상이 갔다.
“…저는 제 일에 소임을 다 할 뿐입니다.”
“너 역시 다른 여인들과, 그리고 나와 같은 마음 아닌가? 그의 곁에 있고 싶은 것이지. 더 가까이, 더 따스하게, 더 욕심을 부려서.”
“….”
“솔직히 말해. 이건 명령이야, 플랑슈.”
“그러합니다.”
대답하라는 명령에 바로 긍정을 표하는 플랑슈였다.
그에 피식, 미소를 지은 율리아는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기대었다.
“다른 여인들은 몰라도, 너는 더 많이 힘들었겠지. 클라우스가 바로 옆에 있고, 매일 같이 부딪치고 대화를 나누고 하는데 정작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까 말이야.”
“…송구합니다.”
“내가 조금 전 뭘 하라고 했지?”
“클라우스님의 식사량이 줄은 이유를 물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그거 가서 오늘 제대로 묻고, 제대로 답을 들어와. 아주 궁금하니까.”
“네, 알겠습….”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알아서 오라는 말이야, 플랑슈. 이해했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말.
그에 플랑슈는 진심이냐는 뜻으로 율리아를 잠시 쳐다보았다.
“다른 여인들은 거의 다 만나고 왔을 터인데, 혹은 만나러 갈 터인데. 너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을 테잖아. 나 때문에 눈치도 좀 보일 테고. 명분을 줄 테니까, 이번은 눈 감고 넘어가주겠다는 말이다, 플랑슈.”
자신을 힘껏 모시던 시종장에게 주는 일종의 포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