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2화 〉 외전 3. 잘들 지내더라
* * *
누군가와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안젤리카는 반가운 소식에 환한 미소를 그렸다.
대륙 통일 이후 단 한 번도 보지 못 했던 은인이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마침 완벽하게 양지로 올라온 자신들을 보여줄 수 있었기에.
그가 구해준 한 여인이 더 많은 이들과 함께 이리 잘 살고 있음을 알려줄 수 있었기에.
무척이나 기대가 되는 마음이 점점 강해지고 있던 여인이었다.
“단장님. 클라우스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얼른 안으로 모셔.”
문이 열리고, 마침내 클라우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마주했던 당시와 거의 달라진 게 없는 겉모습이다.
하지만 그 겉모습 부분을 제외한다면.
클라우스도, 그리고 안젤리카 본인도 참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왕녀 마마는 잘 계시나요?”
“잘 있지. 아, 저번에 너희가 보내준 선물은 잘 받았다. 클로디아가 아주 좋아하더라고.”
“우후후. 그러시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또 괜한 선물을 보낸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안젤리카가 준비한 것은 최고급 초콜릿 세트.
대륙을 통일한 마왕의 딸이자 차기 마왕인 클로디아이지만.
그럼에도 몇 가지 물건들은 그런 클로디아조차도 쉽게 구하지 못 하는 것이었다.
그 중 하나가 안젤리카가 구해다 준 초콜릿이었고 말이다.
“덤으로 같이 보내준 커피도 잘 받았다. 마음에 들더군.”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마음이 놓이네요.”
“율리아랑 나랑 가끔 가다가 타마시곤 한다. 그럴 때마다 너희가 참 마음에 든다면서 율리아가 말하기도 했고 말이야.”
클라우스의 대답에 안젤리카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여태 음지에서 활동하던 자신들이 양지로 올라올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
대륙을 통일한 마왕이 그리 해도 된다고 선언했기에.
은밀히 뒤에서 자신들을 받쳐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때문에 마왕가에 납작 엎드리고 또 복종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
지금도 자신들의 생활에 집중하면서도 혹 마왕가에서 명령이 내려오면 만사 제쳐두고 그 일에 집중할 정도였다.
“그런데, 오늘 손님이 있는 모양이군.”
“아아. 구 제국 지역의 소식을 들고서 찾아왔습니다. 오늘이 정보 교류 기간인데 마침 클라우스님께서 찾아오셨군요. 리르님?”
안젤리카의 부름에 옆에서 조용히 커피만 마시고 있던 리르가 슬쩍 눈치를 살핀다.
죄인도 아니고 클라우스에게서 도망쳐야 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다른 이들 사이에 섞여서 클라우스를 접하는 걸 여전히 어려워했다.
“오랜만이네, 리르.”
“네, 넵. 클라우스님.”
“한동안 나도 나도 바빠서 얼굴 볼 일이 없었지.”
리르에게서 보고를 직접 받으려고 치면 다른 일들이 너무 많이 생겼다.
크게는 대륙의 사건사고들부터 작게는 칭얼거리는 클로디아와 놀아주는 일까지.
요새 클라우스는 제 몸이 한 다섯 개는 되어도 모자라다고 생각했었다.
“안젤리카를 만나러 온 건가?”
“네. 맞아요.”
“혹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걱정하시는 일은 없어요. 그냥 이번에는 작물 재배 현황이 아주 좋아서 식량 부족 사태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는 부분을 전달하려고요.”
“흐음. 그러고 보니 작년에 네가 미리 전국을 돌면서 상황을 살폈던 덕분에 일부 흉년이 들었을 때 바로바로 구휼에 들어갈 수 있었지. 마왕 폐하께서 무척이나 칭찬을 했었다.”
물론 그 당시에도 리르는 계속 외부 업무를 하고 있었기에 감사 인사를 직접 받지는 못 했다.
클라우스도 느끼고 리르 본인도 느끼듯 그녀는 현장 업무에 강점을 지닌 마족이었다.
“자, 그럼 제대로 된 이야기들 좀 해볼까.”
클라우스가 자리에 앉자 안젤리카는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창문을 가렸다.
이후 주변을 한 번 살핀 그녀는 책상 서랍 안쪽에 있던 비밀문서를 꺼냈다.
그 안에는 온갖 장소들과 이름, 그리고 그림들이 들어가 있었다.
“비밀 조직이 몇 개 만들어지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귀족들의 끄나풀인 것 같은데 다행히 세력은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세력이 크든 작든 벌레는 벌레다. 생기면 생기는 족족 다 쳐죽여야지.”
“저 또한 그리 생각합니다. 해서 놈들이 모이는 날 일망타진할 생각입니다.”
붉은 독거미는 표면적으로는 음지에서의 일에 전부 손을 뗐다.
지금은 정식으로 교역과 상업, 그리고 건설과 예술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본질까지 전부 세탁할 수는 없는 법.
그리고 마왕가 쪽에서도 그들의 음지 활동이 분명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붉은 독거미는 음지에서의 영역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만에 하나 생겨날 수 있는 사회적 혼란들을 전부 잠재우는 데에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대단들하군. 사면령이 내려져서 다들 대가리 박고 조용히 살 줄 알았는데.”
“원래 뭔가를 쥐고 있던 자들에게서 그걸 빼앗으면 원귀가 되는 법이죠. 욕망이란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욕망으로 인해 제 목숨 산산이 으스러질 건 생각도 못 하겠군.”
다른 놈들도 아니고 귀족의 끄나풀 때문에 혼란이 생기는 건 절대 사절이다.
일단은 사회적으로 안정기를 위해서 그들을 용서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율리아의 결정이었고 행동이었다.
그에 반해 클라우스는 언제든지 그 반대로 결정하고 또 행동할 수 있었다.
“혹시 그 벌레들 처리하는 데에 뭐 필요한 거라도 있나?”
“음… 딱히 필요한 건 없고 그냥 작업을 할 도시의 경비만 평소처럼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느슨해지는 티를 내면 아무리 초짜들이라고 해도 눈치를 채는 법이거든요.”
“그렇게 하지. 그거 외에는 정말로 더 없나?”
“네. 없습니다. 이 정도도 저희 혼자서 해내지 못 한다면 붉은 독거미 이름 떼야죠.”
그렇게 말한 후 안젤리카는 슬쩍 리르를 살폈다.
여전히 말을 최대한 아낀 채 커피만 홀짝이고 있는 마족 여인.
그 리르를 잠시 쳐다보던 안젤리카는 허락도 받았겠다, 얼른 움직여야겠다고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생이 많아, 안젤리카 단장.”
“당신께서 구해주신 이 목숨, 이러기 위해서 살아있는 것인데요. 힘들지도 않고 다른 생각도 없습니다. 그냥 이 일 자체가 제 천성인 것 같아요.”
안젤리카는 그 말을 끝으로 먼저 방을 나섰다.
그녀가 사라진 곳을 잠시 바라보던 클라우스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뭐하냐, 리르.”
“네?”
“주인도 갔는데 손님들도 알아서 나가야지. 그래야 남은 집사람들이 여기를 치울 거 아니냐.”
“아, 넵. 알겠습니다!”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선 리르를 데리고서 클라우스도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상점 주인으로 위장 중인 제니와도 인사를 나누고 바깥으로 나왔다.
“가자.”
“예?”
“가자고.”
“어, 어디로 가자는 말씀이신지?”
“네 은신처.”
헌데 은신처로 가자고 해놓고서는 왜 클라우스가 앞장을 선단 말인가.
리르는 ‘잠깐만요! 제, 제 은신처는 거기가….’ 라고 말하려고 했다가.
‘어?’
하고 탄식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클라우스가 막 향하고 있는 것 같은 곳이, 진짜로 제 은신처였던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거기까지 알고 있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을 뒤로 한 채.
클라우스의 손에 이끌려서 지극히 평범한 집 안으로 들어서게 된 리르였다.
“이곳에서 지내는 건가?”
“오랫동안 지내는 건 아니에요. 파견 업무가 끝나고 이곳으로 돌아오면 잠시 머무는 곳이죠.”
“혼자서 외로웠겠네.”
“아니에요. 붉은 독거미 측의 인원들이 찾아와서 말벗도 해주고, 저도 이제는 혼자 지내는 게 익숙해졌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리리는. 네 동생은 여전히 제 언니를 걱정하더라고.”
그러자 리르는 아아, 하고 말끝을 흐렸다.
동생을 위해서 힘든 업무에 자원한 자신.
그리고 그녀 덕분에 마왕의, 그리고 왕녀의 시녀로서 살아가고 있는 제 동생.
어릴 적에는 철이 없어서 세상 물정을 잘 몰랐을 테지만 이제는 다 알 것이다.
자신이 이리 살 수 있는 건 다 언니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그렇기에 이제라도 하나뿐인 언니에 대해서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시녀 일은 잘 하고 있나요?”
“그렇지. 아마 클로디아가 마왕 자리에 오르면 네 동생이 시종장이 될 걸.”
“그, 그 정도인가요? 시종장까지는 전혀 예상치 못 했는데.”
“본인이 한 일과 거기에 따르는 성과가 있으니 당연히 보상을 받는 거지.”
“….”
“그리고 지금은, 네가 보상을 받을 차례고.”
클라우스가 천천히 리르를 벽 쪽으로 몬다.
한 걸음, 한 걸음 뒤로 물러나던 리르는 더는 뒤로 물러설 곳이 없자 탄식을 흘렸다.
“미리 하나 말해두자면.”
“네.”
“너는 아이를 가져서는 안 돼. 다른 여인들은 몰라도 너는 말이 많을 거다. 그리고 그 말들은 너와 네 아이를 가장 힘들게 할 거야.”
“알고 있어요. 그래서 원하지 않습니다. 아이는요.”
“그래. 다행이네.”
“…대신에. 있잖아요, 클라우스님. 그러니까… 그, 그 사랑. 그 관심….”
“떨지 말고 말해. 안 잡아먹어.”
“그, 그것들을 제게만. 제게만 주세요. 아이한테까지 가야 할 것 전부. 전부 제게….”
어려울 것 하나 없는 부탁이네.
그리 말하면서 여인의 입술을 가득 훔쳐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