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1화 〉 외전 3. 잘들 지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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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에 의해 전 대륙이 통일된 지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여러 갈등이 있었고 사건사고도 많았다.
초기 그것들을 억누르느라 많은 이들이 고생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고생을 하던 이들 중 하나는 지금 클라우스 앞에 앉아있는 인간 남성이었다.
“요즘은 좀 어때. 다넬.”
“초기와 비교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이제 몇 년 만 지나면 더는 자치령이라는 것도 필요가 없을 것 같아.”
“그렇겠지. 말만 자치령이지 어느 순간부터 대문을 활짝 열고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마왕 폐하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있으니까.”
대륙을 막 통일했을 당시 인간 측 불안감이 꽤나 높았다.
그런 상황에서 무턱대고 안심하라고 말하며 다 껴안으려고 하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
때문에 율리아는 키엔마이어 후작령을 인간 측 자치령으로 삼았다.
이후 얼마간의 시간 동안 마족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인간들이 그곳에 모여 지냈다.
그리고 점차 시간이 흐르자 설치해두었던 자치령도 점점 흐릿해졌다.
이제는 마족들을 경계할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이전까지는 서로 다른 왕을 두고, 다른 지배층을 위에 두고 있었기에.
두 종족 사이가 명백한 ‘적’ 이었기에 적의를 품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의 왕, 하나의 세력만 위에 두고 있는 똑같은 백성들이 되었다.
자신들끼리 화합하고 서로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것이 훨씬 더 좋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초기에는 무척 조심스럽고 더뎠지만 이후 시간이 더 지나자 많은 부분이 개선되었다.
위에서 압박하지 않아도 아래서부터 필요성을 인식하고 서로 한 걸음씩 내딛기 시작했다.
“아, 조카 녀석은 잘 하고 있다나? 내가 어렵게 마련해준 자리인데.”
인간과 마족 측 화합을 위한 하나의 물밑 작업.
인간 측 귀족과 마족 측 귀족을 사돈 관계로 연결시켜 위에서부터 모범을 보이는 것.
율리아가 가장 먼저 클라우스와 이어지면서 그 시작을 열었고, 그 다음은 다넬 키엔마이어와 페르디난트 엘세가 뒤를 이었다.
서로의 아들과 딸을 이어줄 요량이었던 것인데, 그 사이에 클라우스가 다리를 놓아주었다.
다넬과 페르디난트 둘 모두와 가까운 사이이니 충분히 그러할 수 있었다.
“아아.”
클라우스의 질문에 다넬은 미소를 지었다.
“처음에는 영 내키지 않아하는 것 같았는데 말이야.”
“내키지 않아 했다고?”
“그래. 어찌 되었든 상대는 마족이고, 제 아비가 죽도록 싸웠던 상대도 마족이었으니까. 녀석이 영 달갑지 않게 여기던 건 어쩌면 오히려 당연한 일이지.”
“조금 아쉬운 말이군. 녀석이 내키지 않아 했다니.”
그러자 다넬은 ‘사람 말은 다 들어야지.’ 라고 고개를 내저었다.
“말했잖아. 처음에는 그러했다고.”
“그 말은?”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 마음이란 게 참 쉽게 변한다는 걸 알았지. 지금은 어떤 줄 알아? 그쪽 여인과 만난다고 하는 날만 아주 손꼽아 기다리더군. 처음에는 그렇게 싫다고 하던 놈이 말이야. 참나, 아무튼 자식이란 녀석들은 이해를 할 수가 없어.”
다넬의 불평불만에 클라우스는 크흡, 하고 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소개시켜준 여인은 엘세 가문의 딸.
그리고 그 여인의 아버지는 과거 1차 대륙 전쟁 시기에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음에도 자신을 찾아오기까지 했던 그 페르디난트다.
붙임성이나 성격 좋은 모습은 제 아버지를 분명 닮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부분들이 다넬 키엔마이어의 아들 마음을 흔든 모양이었다.
“남녀 관계라는 게 그런 법이지. 처음에는 아무 것도 아닌 듯 하다가 확 이끌리는 법이야.”
“자네와 마왕 폐하도 그러셨던 모양이지?”
“으음. 난 마왕 폐하께 확 끌려간 사례라고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어.”
“농담도 늘었군, 클라우스. 네가 끌려간다고? 네가 끌고 가는 게 아니라?”
1차 대륙 전쟁 시기부터 클라우스와 알고 지내던 다넬 키엔마이어다.
그가 보기에 이 남자는 누군가에게 절대 끌려 다닐 위인이 절대 아니었다.
상대가 설사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마왕이라고 해도.
겉으로만 끌려가줄 뿐이지 분명 실상은 알게 모르게 잡아끌고 있을 것이었다.
“세상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 이렇게 변할 줄은 정말 몰랐어.”
“이하동문이다.”
서로 말을 주고받으면서 두 남자는 커피를 한 모금씩 홀짝였다.
“이제야 겨우 틀이 잡혀가는 느낌이야.”
“그렇지. 그동안은 이것저것 바로 세우고 또 고치느라 바빴으니까.”
“폐하께서 무척 고생이 많으셨다지. 돌아가면 그 분 좀 잘 다독여드려.”
“다넬. 마왕 폐하가 무슨 아이도 아니고 뭘 다독이냐. 내가 다독일 건 오직 왕녀님뿐이다.”
“그러고 보니 왕녀 마마는 잘 계시나?”
“잘 계시지. 너무 잘 계셔서 탈이야. 매일 같이 제 엄마랑 싸우거든.”
그러자 다넬 키엔마이어가 푸훕! 하고 마시던 커피를 살짝 뿜고 만다.
자신이 기억하던 율리아라 하면 위엄 돋는 절대 군주의 모습이 전부였는데.
제 딸과 투닥거리는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크흠, 흠. 미안하다. 클라우스. 갑자기 왜 웃음이 터진 건지 모르겠군.”
“왜겠어. 상상이 안 가니까 그렇지. 나도 처음에는 내가 뭘 보나 싶었다. 그 여자가 처음 딸이랑 투닥일 때 나도 그랬거든.”
물론 그 직후 율리아한테 바로 등짝을 한 대 맞았지만 말이다.
뭐가 그리 재미있어서 딸을 말리지 않고 그냥 웃고 있는 거냐고.
“휴가라고 했지?”
“그래. 이번에는 조금 길어. 한 달 정도?”
“한 달? 클로디아가 자네를 엄청 찾을 터인데?”
참고로 지금의 왕녀이자 차기 마왕인 클로디아가 제 아비를 엄청 챙긴다는 사실은 중앙 권력에 닿아있는 이라면 거의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율리아가 클로디아를 낳고서 육아보다는 통치에 조금 더 집중을 했다.
대륙 통일 초기인 터라 하루라도 자리를 더 비울 수가 없었던 게 이유였다.
그로 인해 대신 육아를 맡았던 이는 클라우스와 카엘라, 그리고 리르의 여동생인 시녀 리리.
때문에 지금 클로디아는 그 셋을 가장 잘 따르고 있었다.
제 엄마도 분명 좋아하긴 하지만, 거리감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는 단계랄까.
“제 엄마랑도 이제 슬슬 사이좋게 지내야지. 그리고 이제는 이전만큼 바쁘지 않아서 율리아도 시간이 좀 남을 거야. 엄마랑도 좀 지내야 아빠인 나도 속이 편한 법이야.”
“밖으로 나다니고 싶다는 말을 요상하게 돌려 말하는 것 같은데, 클라우스?”
다넬의 지적에 클라우스는 ‘들켰네?’ 하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다음 행선지는 어디로 잡아두었나? 혹 요정 영토나 수인들….”
“거기는 이미 다녀왔어.”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지금 뭐라고?”
“이미 다녀왔다고.”
그러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마는 다넬 키엔마이어였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도 아니고, 가는 데에만 아무리 빨라도 몇 주가 걸리는 곳이다.
헌데 눈앞의 이 남자는 이미 두 곳을 전부 돌고 왔단다.
“…설마 자네가 그런 걸로 농담을 할 인물은 아닐 테고. 정말 다녀왔나?”
“그렇다니까. 벌써 그쪽 민심들은 전부 확인하고 왔다.”
“허면 요정들이랑 수인들은 어땠어. 혹 문제라도 생긴 건가?”
“전혀. 오히려 인간들보다 더 잠잠해.”
“…난 당연히 그 두 종족이 가장 많은 반발을 보일 줄 알았는데 말이야.”
“처음에는 다들 그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정작 시간이 흐르다보면 그 두 종족만큼 쉬운 이들도 없어. 강점이 확실한 만큼 들어갈 구석도 확실하거든.”
요정들의 그 높디높은 자존심은 적당하게 타협을 해서 쳐내고.
수인들의 굴하지 않는 정신은 그냥 압도적으로 깨부숴서 강자에 대한 예우를 지키게 하면 그만이다.
다른 방법들도 써보았지만 그것들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슬슬 가봐야겠어.”
“이제 돌아가는 건가?”
“아니. 그건 아니고. 그 전에 몇 군데 더 들를 곳이 있거든.”
“휴가라는 사람이 어째 평소보다 더 바빠 보이는데.”
“그건 아니야. 오히려 마왕성에 있을 때가 지옥 중의 지옥이었지. 다넬, 너도 알잖아? 나는 책상머리보다는 그냥 어디 바깥을 나돌면서 행동하는 걸 더 즐기는 거 말이야.”
자리에서 일어난 클라우스는 간단한 인사 이후 키엔마이어의 성을 벗어났다.
특벼히 많은 공을 들인 인간 쪽 친구답게 본인의 일을 아주 잘 해내고 있었다.
자치령을 책임지면서 괜스레 더 많은 말이 터져 나오지 않게 처신도 잘 했고 말이다.
엄청난 속도로 내달리던 클라우스가 다다른 곳은 어느 도시의 한 상점.
안으로 들어선 그를 보자 한 여인이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다가온다.
“어서 오세요, 손님. 찾으시는 게 있나요?”
“예전에는 여관 종업원이더니 이제는 사장이라도 된 건가, 제니?”
“…무슨 말씀이신지?”
“뭐 암구호 대는 거나 그 비슷한 건 이제 그만 좀 하자. 나 다 알면서 그렇게 해야 하나?”
클라우스의 말에 상점을 맡고 있는 여인, 아니 붉은 독거미의 1조장을 맡고 있는 제니가 침음을 내뱉고는 살짝 고개를 숙인다.
자신들을 찾는 데에 있어서 예외를 둘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서 딱 둘.
하나는 마왕 율리아이고, 다른 하나는 단장의 은인인 눈앞의 남자였다.
“단장님을 만나러 오신 건가요?”
“내가 그녀를 만나러 오는 게 아니면 여기를 찾을 이유가 있나?”
“…마침 그 여자도 와있어서요. 혹 그 분을 찾는 건가 싶었죠.”
제니가 말하는 그 여자가 누구인지, 클라우스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짐짓 모르는 체 하면서 안내하라는 말만 했다.
“따라오세요.”
“아직도 지하로 다녀야 하나? 마왕 폐하께서 기껏 양지로 꺼내주셨는데.”
“걱정 마세요. 저희도 매번 지하 통로를 이용하는 게 무척 불편했거든요.”
그거 참 반가운 소식이네.
클라우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제니의 뒤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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