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6화 〉 외전 1. 잠깐 들렸다
* * *
이른 시간부터 시작된 두 남녀의 대련은 밤이 다 되어서야 끝났다.
그동안 나타샤를 찾던 이들은 그야말로 땀투성이가 된 제 가주를 바라보면서 그녀가 얼마나 창과 검을 휘두르고 왔는지 대충 예상이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실상은 클라우스와 함께 질펀한 야외 플레이를 즐기다가 온 것이지만 말이다.
“얼굴 엄청 좋아 보이네. 그렇게 고팠던 거야?”
차를 마시면서 클라우스가 그리 물으니 나타샤가 히힛, 하고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그걸 알면서 왜 묻냐는 기운이 강하게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고프기도 했고요. 그리고 확 그냥 가져도 된다고 하셨으니까, 키워도 된다고 하셨으니까.”
제 배를 살살 어루만지면서 그리 속삭이는 요정 여인.
솔직히 다른 남자를 안을 생각은 전혀 없고.
그렇다고 후계자도 없이 가주 자리를 다른 놈한테 주기는 또 그렇고.
대체 어찌 해야 하나 한동안 많은 고민을 했었다.
그런데 그 고민을 클라우스가 찾아와서 단번에 해결해주지 않았던가.
‘또 마침 가임기였고. 몇 번을 했는데 설마 임신이 안 되겠어?’
클라우스한테는 미처 설명하지 않은 부분.
혹여나 가임기라는 말을 듣고 그가 난처한 기색을 보일까.
기껏 찾아와서 장난이나 좀 하다가 끝날까 무척 걱정했었다.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끝까지 말을 안 하고 있는, 조금은 앙큼한 요정 여인이었다.
‘표정에 다 보인다, 이 여자야.’
속을 들여다볼 필요도 없었다.
당장 표정에 다 드러나는데, 나 지금 당신한테 숨기는 게 있다고.
클라우스는 속으로 웃음을 터트리면서도 짐짓 모르는 체 해주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자신을 속일 정도로 다급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어차피 이제 클로디아도 품에 껴안고 매일 같이 안아줄 때는 지났다.
매일 제 엄마랑 투닥거리고, 그러다가 씩씩대면서 막 목검을 휘두르는 꼬마가 되었다.
여전히 부모 눈에는 그저 어리기만 한 귀여운 아이일 테지만.
클라우스는 제 딸을 한 번 살펴보고는 ‘역시 그 엄마에 그 딸이야.’ 라고 생각했다.
제 엄마와 제 아빠의 재능을 몽땅 가지고 태어난 그 아이는, 이미 완벽했다.
“이대로 더 머무실 건가요?”
잡생각을 떨쳐내게 해주는 나타샤의 질문.
그 말에 클라우스는 그녀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더 머물 생각이었다면 정식으로 찾아왔겠지. 대충 여행이나 암행 목적으로 왔다고 하면 알아서들 입을 다물어줄 테니까.”
“그러시다는 건….”
“내일 아침 중으로 떠날 거다.”
“행선지는 정하셨나요?”
“아마도 수인들 쪽으로 한 번 가지 않을까 싶다.”
그러자 나타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리로 갈 걸 다 알고 있었다는 눈치인데?”
“당연하죠. 얼마 전에 카엘라가 휴가를 얻어서는 그쪽으로 갔는걸요.”
“그 소식이 그 사이에 여기까지 닿았나?”
“본인은 최대한 조용히 움직여서 자신의 고향으로 갔다고 하지만, 주변 이들 관리까지는 철저하게 하지 않은 모양이에요. 금방 소식이 퍼지더라고요.”
“아마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걸 거다. 사정이 좀 있거든.”
“확실히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어요. 전사장이라 하면 어떤 경우에든 마왕의 곁을 지킨다고 들었는데 갑자기 휴가이니 뭐니 하면서 돌아온 게 말이 안 됐거든요.”
나타샤가 슬그머니 곁으로 다가온다.
자신이 모르는 뭔가를 알고 싶어 하는 눈치.
그 부분에 대해서 조금만 말해주면 안 되는 것이냐고.
“아시는 거 분명 있잖아요? 혹시 카엘라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건가요?”
“설마. 네가 보기에 카엘라가 뭘 잘못 할 것 같은 여자로 보였어?”
“그건 아니죠. 어지간해서는 실수 따위 절대 안 할 호랑이였어요.”
“그래. 덤으로 만약 실수를 했다면 휴가를 가장한 근신을 받기 전에 본인이 먼저 나서서 중형을 내려달라고 했을 거다. 갑자기 수인들의 땅으로 돌아갈 여자도 아니야.”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타샤는 도통 이해를 할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클라우스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전보다 더 가까워진 사이인데.
비록 율리아와 클라우스만큼은 아니어도 분명 숨기는 게 거의 없다고 생각하는데.
조금 더 진솔한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건 아니냐고 조르는 듯 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고만 해두마. 이 이상 말해주면 카엘라한테 실례야.”
“…정말 무슨 큰 문제라도 있는 건 아니죠?”
“아니라니까. 딸아이가 제 아빠와 엄마 다음으로 믿고 따르는 게 바로 카엘라다. 제 주군의 아이라고 녀석이 얼마나 애지중지했는데. 율리아가 클로디아를 봐서라도 카엘라를 내치는 일은 아마도 거의 없을 거다.”
카엘라가 반역에 해당하는 중죄만 짓지 않는다면 아마 죽는 순간까지 마왕가에 있을 거다.
그만큼 강하고 또 충성스러운 인재는 찾기가 매우 힘들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런 카엘라라고 해도 쉽게 넘겨줄 수 없는 일이 하나 있지.’
그것은 바로 발정기.
수인들이라면 응당 겪는 시기, 성체로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신체 반응.
하지만 마왕가에서 전사장으로 임하는 카엘라에게는 무척 난감한 것이었다.
왕가를 호위하고 충성을 다 해야 하는 전사장이 갑자기 정욕에 미쳐 날뛴다.
심지어 그 대상이 마왕의 반려라고 생각하면 일든 더 커진다.
결정적으로 아직 꼬꼬마인 클로디아가 곁에 있는데 그걸 다 지켜본다고 생각하면….
“굳이 말해주자면 마왕가에 두기 모호한 때라고 해두마.”
“…음, 대충 예상이 가는 것 같으니까 더는 말 안 할게요.”
수인들과 인접해있는 터라 바로 이해를 한 듯한 나타샤였다.
이 이상 묻는 게 왜 카엘라한테 실례인지 바로 알아차린 그녀는 헛기침을 하고서는 급히 주제를 다른 방향으로 옮기기로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지금 당장이 아니라 내일 오전이라고 하셨네요?”
“그렇지.”
“혹시 밤에 더 하실 생각이시라던가.”
나타샤가 그리 말하면서 슬쩍 다리를 뻗어서는 남자의 허벅지를 콕콕 찔러댄다.
늘씬하게 뻗은 여인의 희고 고운 다리, 거기에 셔츠 한 장만 걸치고서 있으니 야릇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확 되살아난다.
클라우스는 대놓고 자신을 유혹하려고 하는 나타샤를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도 그런 식으로 유혹 좀 해보겠다고 하다가 된통 당했었지?”
“음… 글쎄요? 된통 당한 게 아니라 아주 맛있게 잡아먹혔던 것만 기억하는데.”
“한동안 안 본 사이에 꽤나 요망해졌어. 그런 말도 서슴없이 하고.”
“라이벌이 너무 많잖아요. 뭐라도 어떻게 하려면 부끄럽다고 낑낑댈 시간이 없어요.”
옆으로 슬쩍 다가와서는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요정이었다.
잠시 나타샤를 쳐다보던 클라우스는 좋다는 듯 그녀의 손을 와락 잡아끌었다.
“아아!”
행복에 겨워 죽겠다는 듯 탄식을 흘리는 나타샤와 함께.
불이 붙은 두 남녀는 밖에서보다도 더욱 뜨겁게 서로의 몸을 탐하기 시작했다.
* * * * * * * * * *
새벽, 서늘한 공기가 안으로 들어온다.
그 선선한 기운을 가득 느끼면서 클라우스는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늦장을 부리다가는 괜히 쓸데없이 이곳의 요정들과 마주할 수도 있다.
자신의 행선지는 아는 이가 적으면 적을수록 좋기에 그런 눈들은 줄여두는 게 좋다.
“…가시려고요?”
창문 밖으로 몸을 날리려다 말고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슬쩍 몸을 돌려본다.
여전히 잠에 취한 듯, 졸려 죽겠다는 듯 두 눈을 비비적거리는 나체의 여인.
희미한 빛을 받으면서 그 뽀얀 살결이 빛을 발하니 수그렸던 성욕이 또 확 인다.
“가야지. 휴가가 그리 길지 않아.”
“…아쉽네요. 고작 하루인데.”
“일이 끝나면 잠깐 중앙 지역으로 나와. 저번처럼 또 둘이서 한 며칠 거닐면 되지.”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라고요.”
천천히 몸을 일으킨 나타샤가 맨발로 걸음을 뗀다.
클라우스 앞에 다다른 그녀는 잠시 상대를 쳐다보다가 살며시 그를 안아주었다.
“다음에 봐요.”
“그래, 다음에 또 보자. 이제는 자주 만날 수 있을 거야. 이제는 정말 안정기에 들어섰으니까. 대륙 정세도, 그리고 내 반려도.”
“그 반려한테 조금이라도 잘 보이려면 저는 더욱 열심히 일해 두어야겠네요.”
나타샤의 말에 클라우스는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요정들을 잘 다독이고 또 이끈다면 율리아도 계속 나타샤를 이용하려고 할 거다.
그리고 그 이용 방법으로 가장 효과적인 클라우스를 조금씩 내어주려고 할 터이고.
솔직히 여인들에게 이리저리 이용당하는 느낌이 들어 조금 찝찝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또한 결국 본인이 선택한 것이고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예상이야 다 하지 않았던가.
“나중에 또 보자, 나타샤.”
최대한 부드럽고 나긋한 어조로, 그렇게 속삭여준다.
자신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도 못 했고, 매번 기다리기만 했던 여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결 같은 마음으로 이리 기다려주었고, 또 그만큼 기다리겠다고 하니 클라우스라고 해도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다.
“다녀오세요. 전 항상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 마중을 새겨두고는 새벽하늘 너머로 박차고 나아간다.
벨라루스의 거주지를 넘어선 클라우스는 세상 그 어떤 존재도 감히 따를 수 없는 속도로.
그리고 어느 누구도 감지할 수 없는 은밀함을 두른 채 발걸음을 떼었다.
‘이 앙칼진 고양이는 지금쯤 뭐하고 있으려나.’
발정기가 찾아오면 카엘라는 휴가를 받은 후 제 고향으로 돌아가서 죽은 듯이 집에 박혔다.
단순히 짝찟기에 대한 욕망만 차오르는 게 아니라 그냥 전체적으로 흥분 모드 돌입니다.
그렇다는 건 조그마한 도발이나 자극에도 살육에 미친 괴물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해서 카엘라는 괜스레 일을 벌일까 스스로를 봉인에 가까운 식으로 두었었다.
‘그런 부분들이 여태까지의 발정기 때 카엘라의 모습이었는데….’
클라우스는 수인들의 영토에 들어선 순간 이상한 것을 알아차렸다.
지극히 조용하던 그들의 땅이 이상할 정도로,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던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조심스레 곳곳을 살피던 클라우스는 곧 상황을 파악했다.
“그대에게 정식으로 도전합니다, 카엘라 티거!”
“….”
어느 겁 대가리를 상실한 젊은 수인 남성이 카엘라에게 청혼을 위한 도전장을 내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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