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3화 〉 외전 1. 잠깐 들렸다
* * *
“후우.”
정신없이 뭔가를 작성하고 확인하던 나타샤가 작은 한숨을 내뱉는다.
그리고는 끄으으! 하고 기지개를 켜면서 찌뿌둥했던 몸을 살짝 풀어준다.
‘예상은 했지만… 이거 진짜 너무 힘드네.’
지금의 자신은 한 가문만을 대표하는 가주가 아니다.
더 나아가 요정이라는 종족 전체를 대변하는 인물.
자연스럽게 가주 직책 때 하던 일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업무를 봐야 했다.
본인의 성격 상 일단 창이나 검을 휘두르는 게 더 편하다고 여기는 것을.
이렇게 책상 앞에 앉아 온갖 문제로 낑낑거리고 있는 건 맞지 않음을 잘 안다.
그러나 이게 바로 나타샤 본인이 선택한 삶이었다.
때문에 불평은 좀 할 수 있을지언정 관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예전이 훨씬 편했는데.’
율리아의 대륙 통일 선포식을 함께 하는 영광스러운 때를 보냈다.
이후 아카데미에서 약간의 시간을 더 보내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행히도 그녀가 염려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요정들 역시 지배자에 대한 무의미한 저항은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자신들을 마구 억압한다면 또 모를까, 대우를 해주는데도 저항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렇게 다시금 찾아온 고요함 속에서 요정들은 성장 가도를 달렸다.
자신들만의 마법을 조금 더 쉽게 변형해서 다른 종족들에게 알려주기도 하고.
반대로 근접 전투에 대한 여러 부분들을 다른 종족들에게서 전수 받았다.
제대로 된 교류와 무역을 시작하면서 몇 개의 가문만 누리던 부도 모두가 누리게 되었다.
자신들의 모습을 지키면서도 세상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게 나타샤가 돌아온 지도 어언 수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가끔씩 짬을 내어서 대륙 중앙으로 몇 번 가기는 했었다.
이유야 당연히 클라우스를 만나기 위해서.
그게 아니면 율리아의 호출을 받고 나가서는 여러 중요한 문제를 논하기 위해.
‘…하지만 뭐가 되었든 클라우스님이랑은 오랫동안 같이 있을 수가 없었지.’
율리아가 아이를 가지고, 점점 더 배가 불러 마침내 출산을 하게 되었을 때.
클라우스가 그리도 초조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게 신기하기도 했고, 또 조금은 서운하기도 했다.
자신에게는 절대 보여주지 않던 모습인데 율리아는 그걸 너무나도 쉽게 차지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은 그저 요정들의 수장, 그리고 클라우스가 잠깐 안았던 여인.
그에 비해 율리아는 대륙을 발 아래 두고 있는 마왕이다.
더해서 클라우스와 정식으로 혼인을 올린 단 하나뿐인 반려다.
자신과 그녀 사이에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음을.
그걸 인정하고 괜히 뛰어넘겠다고 허튼 짓을 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던가.
‘서운해 하면 안 돼. 약속했잖아.’
율리아와, 클라우스와, 그리고 자기 자신과 분명 약속을 했다.
욕심을 내서 지금의 이 자리까지 다 내놓지 말라고.
한 발자국 더 다가가겠다고 하다가 열 발자국 물러나게 하지 말라고.
클라우스는 마왕의 반려, 대륙을 통일한 군주의 부군이다.
공식적으로는 율리아가 그보다 더 위에 있는 존재.
때문에 클라우스가 율리아 이외에 다른 여자를 품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율리아 또한 그런 부분을 이용해서 주변의 여인들을 다 쳐낼 수 있었다.
마왕이 아닌 여인으로서 지닌 독점욕이 어찌 없겠는가.
그러나 율리아는 일단 자신이 한 발 물러서주었다.
대놓고 다른 여인들을 안는 건 불허하나, 조용히 만나는 것은 허락하겠다고.
율리아가 꽤나 많은 부분을 양보했음을 알고 있는 여인들도 수긍했고 말이다.
‘…나가서 땀 좀 흘리고 와야 하나?’
아무래도 지루한 일상이 계속되다보니 잡생각이 늘은 것 같다.
특히 보고만 있어도 머리가 다 아파오는 이 서류들.
매일매일 이 짓만 하고 있으니 아주 정신머리가 다 나가버리는 것 같았다.
후우, 한숨을 흘린 나타샤는 잠깐 고민을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른 나가서 창칼 좀 휘두르고, 땀을 뺀 후 샤워까지 마친 다음에 책상 앞에 앉아야만.
그렇게 해야만 머리가 좀 정리되고 집중을 더 할 수 있을 듯 했다.
“업무 땡땡이 치고 어디를 가려고.”
갑작스레 창문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핫?!”
요정의 뾰족한 귀가 쫑긋거림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나타샤가 뒤로 훌쩍 물러난다.
물론 상대방이 누구인지 눈치를 채지 못 한 건 아닌 듯.
몸이 절로 반응하기는 했으나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빛이 잔뜩 서려있었다.
“클라우스님?!”
“조용히 말해. 여기 녀석들 아무도 몰래 들어온 거니까.”
“어, 어떻게? 아니, 그보다 소식도 없이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휴가.”
“네?”
“휴가라고. 이제 큰일들은 얼추 다 끝났고, 클로디아랑도 실컷 놀아줬고. 그동안 이래저래 한 일이 많아서 율리아한테 요청했지. 한 한 달 정도만 좀 쉬겠다고.”
“그래서요? 마왕께서 클라우스님께 자리를 뜨는 걸 허락하셨어요?”
클로디아를 낳고 나서 한 1, 2년 동안은 율리아의 독점욕이 오히려 훨씬 심해졌다.
아이까지 낳았으니 이제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여겼던 여인들에게는 날벼락 그 자체.
클라우스도 그런 율리아의 고집에 어떤 반발도 없이 항상 그녀의 곁을 지켰다.
그 정성이 통했는지 마침내 율리아도 천천히 그 욕심을 거두었다.
“요즘에는 클로디아 때문에 정신이 없을 거다. 아기 때야 다 천사인데 거기서 또 나이 좀 먹으면 세상에서 가장 밉다는 때가 시작되거든.”
“아아….”
“특히나 다른 여자도 아니고 율리아의 딸이야. 성격이 어떨지는 너도 잘 알 텐데.”
그 말에 나타샤는 마왕의 흉을 보는 것임에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왕으로서, 그리고 여인으로서 참 많은 부분에서 대단한 율리아이지만.
또 은근한 구석에서 속이 좁고 변덕도 좀 부리며 감정 기복이 심할 때도 있었다.
그런 부분들을 딸이 고스란히 물려받았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한창 말을 잘 안 들을 나이 때가 겹친다면….
“클라우스님께서 엄청 고생을 하셨을 것 같네요.”
“난 그나마 괜찮았던 편이야. 하도 아빠랑 붙어있고 엄마랑은 시간을 많이 못 보내서 그런지 내 말을 더 잘 듣더라고. 요즘 들어서 율리아랑 으르렁거리던데 나중에 크면 괜찮을까 몰라.”
클라우스의 말을 들으면서 나타샤는 확실히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깨달았다.
그동안 자신은 여기 갇혀서 온갖 일들에 파묻혀 지냈는데.
그 사이 클라우스와 율리아의 아이는 미운 세 살, 네 살에 다다랐다고 한다.
지겹기만 했던 시간들이었음에도 그 시간마저 정말 착실하게 흘러갔다고 생각하니.
나타샤는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서운하고 또 야속하다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나가서 뭐 하려고 했던 거 아닌가?”
“네? 아… 네. 너무 답답해서, 몸이 좀 찌뿌둥해서요.”
“그래. 다른 요정들이라면 또 모를까, 나타샤 너는 원래부터 창칼을 휘두르면서 아주 동적으로 살아가는 여자였으니까. 지금의 이 책상 놀음이 아주 신물이 나는 건 당연하겠지.”
“네. 어쩔 수 없… 긴 하지만! 그렇다고 절대 싫은 건 아니에요! 이것도 할 만해요!”
혹 벨라루스 가주 직이 싫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질까.
클라우스가 나름 생각을 해주고 도와준 것인데 투덜거리는 것으로 보일까.
나타샤는 손까지 휘휘 내저으면서 절대 아니라고 하는 중이었다.
“누가 뭐라고 했냐. 따라 나와.”
“네?”
“몸 좀 풀고 싶다면서. 그러면 상대가 되는 놈이랑 붙어야 좀 풀리지 않겠어? 내가 알기로 네 상대가 될 수 있는 이들이 여기서는 아예 없을 텐데.”
율리아나 다른 여인들이 최고 전성기에 도달한 것처럼.
나타샤 역시 지금이 딱 최고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때였다.
특히나 그녀가 휘두르는 창은 단순한 창이 아니라 한 마리 뱀과 같은 수준이었다.
점으로 날아오는 듯 하다가 경로를 바꾸고, 찌르는 듯 하다가 갑자기 후려친다.
그렇기에 요정들 사이에서 근접 전투로 그녀를 이길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이조차 없다.
해서 나타샤는 몸 좀 풀리려고 하면 대련이 끝나버려 아쉬울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와중에 자신을 상대로 충분히 승리할 수 있는 강자가 앞에 나타났다.
이럴 진데 당연히 이 요정 여인이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얼른 가요. 괜히 다른 이들이 오기 전에.”
나타샤만을 위한 연무장이 있기에 다른 이들의 눈을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심지어 서로가 이미 초월적인 강자이기에 상대가 죽을까봐 나무 봉 같은 애들 장난감으로 대련을 할 이유도 없었다.
“먼저 들어와.”
창의 머리 부분을 내린 채 상당히 오만한 투로 그리 말하는 클라우스.
원래는 자존심 강한 요정들을 상대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도발이었으나.
“그러면 사양하지 않고 먼저 들어갈게요.”
클라우스의 실력을 잘 아는 나타샤는 활짝 웃으면서 창을 들었다.
그리고 한 줄기 광풍과 함께, 그대로 클라우스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가는 나타샤.
물론 그 공격은 바로 앞에서 클라우스가 휘두른 창대에 그대로 막히고 말았다.
“….”
나름 살벌한 공격이었는데, 표정 변화 하나도 없는 클라우스다.
그런 클라우스를 바라보면서 나타샤는 오히려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로 상대가 버거워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아마 많이 실망했을 지도 모른다.
그만큼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이 남자에게, 나탸사는 엄청난 기대감을 걸고 있었다.
“아, 그리고.”
“네?”
“말했다시피, 이건 율리아한테 허락을 받은 휴가다. 비록 ‘비공식적’ 인 휴가이지만 어찌 되었든 그녀에게서 허락은 받은 거야. 이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어?”
“…잘 모르겠는데요?”
“내가 휴가 나가서 뭘 하든 관여치 않겠다는 거야. 본인이 허락을 했으니까. 무슨 일을 하든 신경을 쓰지 않겠다는 뜻인 거지.”
“그게 무슨… 아.”
그제야 이해를 했다는 듯 탄식을 흘리는 나타샤.
그리고 그런 여인의 마음에 불을 지르듯 클라우스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 대련에서 나를 만족시키면, 나는 침대 위에서 널 만족시켜줄게. 어때, 이 정도면 최선을 다해서 대련에 임할 생각이 좀 드려나?”
클라우스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는 순간.
나타샤의 두 눈에 시뻘건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꾸욱.
창대를 우악스럽게 쥐면서, 나타샤가 천천히 입을 연다.
“…조심하세요, 클라우스님.”
“오호.”
“그리 말씀하시니까… 저 스스로도 제어를 못 할 것 같아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