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2화 〉 에필로그
카엘라는 클라우스와 함께 꽤나 오랜 시간을 함께 했다.
1차 대륙 전쟁 초기부터 그 곁에 있었으니 10년도 훨씬 더 넘는 시간이었다.
그 격변의 시기를 겪는 동안 클라우스가 초조해하는 모습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적들의 공세 앞에 놓일 때도, 귀족들의 모함에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때도.
그 외에 참 많은 부분에서 긴장할 만도 한 때임에도 그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
그래서 지금, 율리아의 방 앞에서 저리 초조한 얼굴로 서성이는 클라우스의 모습은.
카엘라에게 있어서 충격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클라우스님. 차 한 잔 타다드리겠습니다.”
하도 클라우스가 긴장한 낯을 내보이자 플랑슈가 차를 내어오겠다고 했다.
별 일 없을 터이니, 큰 탈이 없을 터이니 마음을 놓으라는 뜻.
그러자 클라우스는 비로소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멈춰 섰다.
‘이건 몇 번을 반복해도 적응이 안 되는군.’
여인으로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분명 큰 축복.
하지만 동시에, 여인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 위험한 순간이기도 하다.
저 안에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출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 생각하니.
아무리 클라우스라고 해도 초조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따금 들려오는 율리아의 신음 소리가 겨우 진정되려던 마음을 뒤집어 놓는다.
회차를 반복하면서 이제는 이런 부분도 좀 적응이 될 줄 알았는데.
제 곁의 누군가가 이리 괴로워하는 건 여전히 싫었고, 적응도 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작스레 긴 비명이 들리더니 안에서부터 소란이 일었다.
직후 방문이 조심스레 열리더니 시녀가 조심스레 고개를 내민다.
“클라우스님.”
그 말을 들은 클라우스가 벌떡 일어나서 방 안으로 들어간다.
바로 율리아의 곁으로 다가가려고 했지만, 갑자기 시녀들이 그를 제지한다.
그녀들 너머로 보니 율리아가 손을 들어 자신을 제지하고 있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흐트러진 제 모습을 정리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한 것이리라.
“예쁜 왕녀님이십니다.”
그러는 사이 시녀가 이제 막 세상 빛을 본 아이를 보여준다.
갓 태어난 아기는 원래 조금은 예쁘지 않은 것이 정상이다.
그럼에도 시녀가 안고 있는 아이는, 너무나도 예뻤다.
아마 율리아의 아이 시절을 본다면 딱 이러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클라우스는 미소를 지으면서 제 아이를 쳐다보았다.
내가 이 세상에 나왔노라고 선언하듯 우렁차게 울어대는 제 딸을 바라보면서.
원하던 일이 하나씩, 하나씩 이뤄져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클라우스님. 마왕께서 이제 다가오셔도 된다고 합니다.”
허락이 떨어지자 클라우스는 바로 제 여인의 곁으로 다가갔다.
평소의 그 위엄 돋는 모습, 아찔하게 매력적인 모습들로 가득한 율리아였는데.
출산의 고통과 험난한 여정은 그 모습들을 조금 갉아먹은 상태였다.
하지만 살짝 병약해 보이는 모습은 또 그거대로 아름다웠다.
저리 연약해보이니 시녀들이 곁에 있음을 알면서도.
그냥 확 안아주고 싶은 마음을 참느라 아주 고생을 해야만 했다.
“안 죽어. 그렇게 쳐다볼 필요 없어. 그냥 좀 피곤한 것뿐이니까.”
제 반려의 눈동자에 깃든 걱정을 알아차린 것일까.
율리아는 다 쉰 목소리로 그렇기 속삭였다.
이후 ‘어디, 왕을 이리도 힘겹게 한 대역죄인 좀 보자.’ 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어린 생명을 제 품에 안게 되었다.
“…딸이네.”
“딸이네요.”
“그러면 이름은 클로디아, 겠군. 내심 아들을 기대했는데.”
“저는 딸이라서 좋습니다. 마왕 폐하와 너무 닮아서.”
“나랑 닮았다니, 벌써부터 걱정이야. 얼마나 왈가닥이 될까.”
혀를 쯧쯧 차지만, 입꼬리는 당장이라도 승천할 듯 올라가있다.
눈가에는 눈물까지 그렁그렁한 것을 보니 아무 탈 없이 이리 세상에 나와 준 제 딸에게.
너무나도 고맙다고, 만나서 반갑다고, 그리 말하고 있는 듯 했다.
“아가. 내 딸아. 내 딸 클로디아. 만나서 반갑다. 네 어머니가 누군지 아니? 이 대륙을 손에 쥔 마왕이란다. 그리고 너는, 장차 내 뒤를 이어 그 거대한 땅을 이어받을 왕이란다.”
그러자 마치 그 말에 반응이라도 하듯.
아이가 조그마한 손을 꼼지락거리더니 율리아의 손가락을 붙잡는다.
아이의 그 행동이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우연으로 일어난 것인지.
그런 것 따위는 부모에게 하등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대륙을 통일했던 순간보다도 더 기뻐하는 모습의 율리아였다.
가장 사랑하는 이와 함께, 또 그만큼 사랑할 소중한 무언가를 얻었기에.
그녀는 정말 오랜만에 무척이나 순수하고 밝은 웃음을 내보일 수 있었다.
* * * * * * * * * *
“클로디아!!!”
만약 그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처음 제 딸을 만나던 그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율리아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제발 엄마 말 좀 잘 들으라고, 엄마 속 좀 뒤집지 말라고.
“흥!”
자신을 빼닮은 아이였기에,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동시에 클라우스의 아이이기도 하기에 진중한 모습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가장 무서운 미운 세 살, 네 살에 도달하니 그야말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너! 엄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다시 한 번 말해봐!”
“흐응!!”
아이 앞에서는 왕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
그냥 화가 난 엄마와 말 안 듣는 아이가 있을 뿐.
체통이고 뭐고 다 내던지고 와악!! 화를 내는 엄마일 뿐이었다.
클라우스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역시나, 우리 딸은 제 엄마랑 참 즐겁게 지낼 것 같다고.
벌써부터 이러면 나중에는 어떨지 참 걱정도 되고 기대도 되었다.
“바보! 엄마 바보야! 바보!!”
“이 녀석이 진짜?! 클라우스! 쟤 안 혼낼 거예요!? 엄마한테 말하는 버릇 봐요!!”
“…으음.”
평소라면 클라우스가 먼저 나서서 제 딸을 혼냈을 것이다.
아무리 어리다고 하지만 벌써부터 부모를 무시하는 건 절대 넘어가서는 안 될 일이니까.
하지만 그 이유를 생각하자면, 왜 저 귀엽고 예쁜 아이가 잔뜩 화가 났는지 떠올리면.
무턱대고 아이를 혼낼 수도, 율리아의 편만 들 수도 없는 일이었다.
“율리아. 우리 지금 잠시 휴가 나온 건 알고 있죠?”
“당연하죠. 그래서 이렇게 다른 이들 시선도 신경 안 쓰고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당신은 여기서도 업무를 보고 있죠. 바로 직전까지 말이에요.”
“그건 급한 일이….”
“급한 일은 휴가를 떠나기 전 내가 당신과 함께 진작 다 봤어요. 그리고 유능한 인재들이야 얼마든지 있어요. 그들에게 잠시 믿고 맡기면 되는 일들이죠. 한 며칠 왕이 쉰다고 무너질 세상이었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
“클로디아가 몇 달 전부터 엄마랑 하루 종일 붙어서 놀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해했던 건 아나요?”
뭔가 엄마와 아빠의 위치가 뒤바뀐 것 같기는 하지만.
자신은 은밀하게 뒤에서 일을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남는 것에 반해.
율리아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왕의 삶을 보내는 중이었다.
덕분에 클로디아는 엄마의 품보다는 아빠의 품에 더 많이 안겨있었다.
그게 아니면 플랑슈나 카엘라, 그리고 클로디아의 직속 시녀 역할을 맡고 있는 리르의 동생 품에서 또 지냈고 말이다.
“….”
율리아는 그 말에 조심스레 클로디아 곁으로 다가갔다.
잔뜩 토라져서는 양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있는 아이.
조금 더 다가가서는 얼굴을 살펴보니 뭔가 무척 실망했다는 듯.
당장이라도 울고 싶은데 그건 또 자존심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듯.
바들바들 떨고 있는 아주 조그마한 공주님이었다.
“…클로디아.”
그 모습을 보면서, 율리아는 예전의 자신과 비슷하다는 걸 느꼈다.
뭔가를 간절히 원해도 결국 닿을 수 없었던 이전의 자신을.
그래서 제 아이에게는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려고 했음을.
헌데 그게 역으로 이 아이에게 다른 상처가 될 수도 있음을.
“아가. 우리 아가.”
“…네.”
“엄마가 안아줄까?”
“….”
대답 대신, 클로디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의 위엄 때문에, 그리고 업무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그런 이유들로 율리아는 생각보다 제 딸을 많이 안아주지 못 했다.
참 바보 같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율리아는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한 자신의 보물을.
제 반려와 자신이 이룬 사랑의 결실을 제 품에 꼭 끌어안았다.
“우리 공주님, 오늘 엄마랑 뭐가 하고 싶니?”
“…진짜로 할 거예요?”
“응. 진짜로 할게.”
“…엄마랑 같이 낮잠 자고 싶어요.”
참 별 볼일 없는 부탁, 그럼에도 아이에게는 무척 이루고 싶었던 소원.
율리아는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클로디아를 안은 채 안락의자에 몸을 앉혔다.
그리고 연신 제 딸의 머리를, 얼굴을 사랑스레 쓰다듬어주면서 아가, 아가, 라고 중얼거렸다.
“….”
그러는 사이, 클라우스는 모녀의 바로 옆에 와서 앉았다.
당신들이 잠든 동안 내가 곁을 지켜주겠다고.
무슨 일이 생겨도 내가 다 알아서 할 터이니 푹 자라고, 좋은 꿈꾸라고.
그리 말하는 것 같아 율리아는 자신의 딸과 함께 정말 오랜만에.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자신의 소중한 이들 곁에서 잠이 들었다.
“…좋은 꿈꾸길.”
행복한 미소를 지은 채 잠이 든 제 아내와 딸을 바라보면서.
클라우스는 여태 지었던 그 어떤 미소보다도 더 환한 웃음을 지어냈다.
그래, 어쩌면 그동안의 모든 시간들은.
바로 이 순간, 이 장면 하나를 위해서.
저 모습을 눈에 담고, 머릿속에 깊이 박아두기 위해서
그래서 그렇게 처절하게도 살아왔던 것일 지도 모르겠다.
‘이제 더는… 돌아갈 필요가 없겠지.’
클라우스는 제 아내와 제 딸의 이마에, 그리고 볼에 입술을 맞췄다.
부디 가장 행복하고 가장 즐거운 꿈이 될 수 있기를, 다시 한 번 바래본다.
-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