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1화 〉 31장 - 귀환
“참으로 길고도 험난했던 여정들이었다.”
그래, 참으로 길고도 험난했던 여정들이었다.
벗어날 수 없는 굴레라는 걸 알고 난 후 다 내려놓고 걷는 것에 집중한 순간.
그렇게도 힘겨운 여정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게 어찌 나만의 공이겠는가. 남은 그대들 덕분에, 떠나간 자들 덕분에 이룬 것이다.”
아카데미의 외부 광장에 모인 이들은 제단 위에 선 율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첫 대륙 통일의 영광과 기쁨을 이곳에 모인 자들과, 먼저 간 자들과 함께 나누었다.
자신만의 공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임을 분명히 했다.
“하늘이시여. 부디 저와 제 모든 이들을 살피시길. 이 위대한 영광이 오래도록 길이 빛나기를. 그리고 분열되어 다투는 게 아니라 모두가 하나 되어 어떤 시련이라도 헤쳐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시기를. 저 또한 그런 왕으로서 살아가겠나이다.”
율리아가 딱히 신이니 초월적인 존재이니 따위를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건 개인적인 것, 지금은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는 신하와 백성들 앞에서.
그들 모두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 필요한 군주일 뿐이었다.
하늘에 대한 부탁과 맹세를 마친 율리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옆에 서있던 플랑슈가 조심스레 잔을 내밀었고 그 안에 술을 가득 부어주었다.
시종장에게서 그걸 받아든 율리아는 술잔을 들어보였다.
이후 앞에 모인 모두가 그녀를 따라서 잔을 들자 입을 연다.
“분열을 조장하지 말고, 편을 가르지 말며, 왜곡된 말을 하지 말지어다. 지킬 수 있는 말만 내뱉고 행할 수 있는 것만 행하며 무엇보다 나에게 지극히 엄해야 할 것이다.”
“….”
“이것은 그대들에게 내리는 명령이자 또한 부탁이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 앞에서 우리들 행동 하나, 하나가 이 영광이 몇 년 만에 흩어질지, 아니면 몇 십, 몇 백을 이어갈지 달려있다. 마족, 인간, 수인, 요정, 그런 것들은 전부 잊어라. 이제 그대들은 하나의 왕을 위에 두고 서로를 위해 살아가는 같은 백성들이다. 비록 다툴 수는 있을지언정 결국 그 모든 게 미래의 자손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걸 잊지 마라.”
“예, 마왕 폐하.”
“여기까지 따라와 준, 그리고 믿고 와준 그대들에게 심심한 감사의 뜻을 전한다. 다음 주부터는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바쁜 일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번 주말만이다. 푹 쉬고, 놀고, 마셔라. 약간의 소란은 넘어가주겠다. 그리고 다음 주부터는 새로운 시대를 위해 누구보다도 피땀을 흘려야 할 거다.”
대놓고 다음 주 블랙 기업화를 선언하는 느낌이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클라우스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큭큭, 웃음을 터트렸다.
실제로 정말 새로운 시대가 열린 후 율리아는 제 신하들을 무진장 굴려댔다.
클라우스가 어떻게든 뒤로 빠지려고 하는 이유에는 그것도 분명 영향을 끼쳤다.
여태까지도 엄청 힘들었는데 그것보다 배는 더 힘든 삶이 일상이 된다고?
절대 사절이다, 죽어도 사절하고 싶은 일이다.
“내 만수무강을 빌 필요는 없다. 그대들은 각자의 삶을 위해 건배하라. 그리고 내 왕국을 위해서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불철주야 노력해서 천 년을 가는 세상을 만들기 바란다.”
율리아는 그리 말한 후 깔끔하게 잔을 비워냈다.
그 뒤를 따라서 자리에 모여 있던 마족들이, 인간들이, 수인들, 요정들 모두가.
함성을 지르면서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의 내용물을 깔끔하게 비워버렸다.
그 모습을 확인한 율리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제단을 내려간다.
그러자 저 뒤에서 누군가가 ‘마왕 폐하 만세!’ 라고 크게 외치기 시작했다.
커다란 외침이 몇 번 반복되자 가장 근처에 있던 마족들이 그에 호응한다.
“마왕 폐하 만세!!”
뒤를 이어 그 옆에 있던 인간들이, 그리고 수인 측 친위대들이.
마지막으로 이곳까지 찾아온 요정들 모두가 새로운 시대를, 새로운 왕을 위해 축하를 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던 율리아는 무척이나 여유로운 발걸음을 떼었다.
마왕이 제단을 내려서자 본격적으로 대륙 통일을 축하하는 파티가 열렸다.
아카데미에서도 학생들을 주축으로 여러 번의 파티가 열리긴 했지만.
오늘만큼 성대하고 화려하며 빛나는 파티는 아마 다시는 없을 것이 확실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보면 적의를 드러내던 종족들인데.
이제는 이곳에 모여서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논의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마족들은 인간 측과 교역 재개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고.
인간들은 요정들과 마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요정들은 수인들과 대륙을 잇는 새로운 길을 건설하는 것에 대해서 의논하고.
수인들은 마족들과 함께 새로운 세상의 새로운 군대 창설을 고려했다.
대륙 통일을 축하하는 자리임과 동시에.
이제 그 미래를 책임질 인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친분을 다지는 곳.
동시에 어떤 방식으로 왕국을 경영해야 할지 논하는 곳이었다.
‘벌레 새끼들이 없으니 기분은 참 좋군.’
예전에는 파티하면 귀족 새끼들만 주구장창 몰려 있었다.
와서 하는 말이라곤 어떤 놈이 뭔 일을 꾸미고 있네.
요즘 평민들이 주제를 몰라도 너무 모르네.
언제 한 번 대대적으로 새로운 물갈이가 필요하네.
이런 쓰레기만도 못 한 주제의 대화를 하면서 말이다.
하도 역겨워서 일부러 다넬 키엔마이어가 부르는 파티장에도 가지 않았다.
괜히 가서 평민이니 뭐니 무시를 받을 게 뻔했으니까.
그리고 그 파티장이 가십거리나 물고 뜯기 바쁜 벌레 새끼들의 집합소였으니까.
“클라우스.”
이런 자리에서 또 여기저기 불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해서 최대한 구석에 박혀서 시간을 보내던 와중에 율리아가 다가왔다.
“잠시 이야기 좀 나눌까.”
“…그러시죠.”
율리아가 그리 말하자 주변에 있던 이들이 알게 모르게 두 남녀를 주시한다.
이미 마왕이 아이를, 차후 이 거대한 왕국을 이끌어갈 후계자를 뱃속에 품고 있음을.
자리에 모인 거의 대부분이 어렴풋이 알고 있다.
다만 율리아가 그 부분에 대해서 어떤 말도 하지 않았기에.
그녀가 때가 된다면 말을 해줄 것이라 믿고 모두가 입을 열지 않는 중이었다.
“…주변이 바라보는 눈빛들이 다들 궁금하다는 것들이군.”
그 부분을 율리아 역시 진작 알고 있었기에.
해서 이번에 그들에게 그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입을 연다.
“내 아이는 최고의 행운을 누리게 될 것이야. 어미는 대륙을 통일한 마왕이고 아비는 그 곁에 서서 모든 것을 도운 명실상부 최고의 인간 남자이니까. 어미와 아비의 좋은 모든 부분을 물려받을 테니까 말이야.”
마왕의 말에 주변에 모여 있던 이들이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클라우스를 바라본다.
도대체 어떤 이가 반려이기에 그 마왕이 여태껏 입을 다물고 있나 했다.
하지만 그 상대가 클라우스라면,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들이 들었다.
“그리고.”
만약 율리아이의 다음 말이 아니었다면.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은 계속해서 클라우스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지도 몰랐다.
“내 후계자는 후일 자신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누군가와 또 혼인을 하겠지. 그게 요정일 수도 있고, 수인일 수도 있을 거야. 멍청한 자는 혈통을 고집하겠지만, 지혜로운 자는 실용적인 부분을 보는 법이지. 누가 더 도움이 되었느냐, 그래서 누가 더 왕의 옆에 있을 자격이 있느냐.”
마왕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것.
특히나 마족만이 아니라 인간들, 요정들, 수인들 모두가 두 눈을 홉뜰 수밖에 없었다.
이제부터 본인들이 세운 공로만큼 미래의 왕의 바로 옆에 다가갈 수 있다는 확신.
그렇게 된다면 더더욱 열과 성을 다해서 마왕가에 충성심을 바쳐야만 했다.
대륙을 발 아래 두고 있는 왕의 반려를 낼 수 있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왕의 신하들이 꿈꿀 수 있는 최고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 그러면 나는 이만. 내 반려와 이야기 좀 나누어야 할 듯 싶어서.”
마왕의 대륙 통일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마왕이 벌써 빠져나간다니.
신하들 입장에서는 조금 당황스러울 수도 있는 일이지만 부부의 일에는 더 관여할 수도 없다.
해서 그들이 자리를 비켜서자 율리아는 클라우스를 붙잡고서 발걸음을 옮겼다.
“….”
슬쩍 주변을 훑은 율리아는 비로소 제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오직 클라우스만이 자신 곁에 있음을 확인했다.
처음 만난 때와 같이, 오직 그만이 자신 옆에 있어주던 그 때와 같았다.
‘아. 아닌가. 그 때는 아이가 없었구나.’
제 배를 만지작거리면서 율리아는 클라우스가 지내던 교수실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예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그의 책상 위에 올라가서는 다리를 꼬고 앉으려고 했다.
“그러지 마요.”
클라우스가 그녀의 다리를 붙잡으면서 말리기 전까지는.
“다리까지 꼬지 말라는 거예요? 아이한테 이것도 안 좋다는 건가요?”
“아뇨. 당신한테 안 좋아서, 불편해서 하지 말라는 거예요. 뭐, 겸사겸사 아이한테도 안 좋고. 그리고 그냥 그렇게 있는 게 더 보기 좋아요.”
그리 속삭인 클라우스는 그녀의 앞에 섰다.
두 팔을 뻗어 제 여인을, 자신의 왕을. 그리고 제 아이를 껴안아준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나도 잘 모르겠네요.”
“모른다고요? 당신이요? 거짓말. 이 다음 뭘 해야 하는지 전부 머릿속에 그리고 있을 거잖아요. 마치 미래를 다 아는 사람처럼, 내게 항상 최고의 조언만 해줬잖아요.”
율리아의 말에 클라우스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말대로 여태까지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해서 최고의 상황으로 나아갈 수 있는 조언을 해주었다.
앞으로도 그럴 수야 있다, 아직 알고 있는 게 많으니까.
하지만 이 이상 적극적으로 나서는 건 자신에게도, 율리아에게도 독이다.
이제 본인이 해야 할 일은 그녀의 뒤에 서서 가끔씩 도움을 주면 될 뿐이다.
“난 그냥 당신 뒤에 있을게요, 율리아. 그러다가 당신이 힘들어하거나 고민이 있을 때. 그 때 도와줄게요. 왕은 당신이니까. 나의 왕이니까.”
“그래요. 난 왕이에요. 모든 이들의 위에 군림하는 존재. 하지만 당신만은 예외로 해둔다고 했잖아요. 내가 원하지 않아도 언제든 조언을 할 수 있는 남자로. 내가 뭔가를 택했을 때 그게 아니라 다른 걸 택하게 할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이로. 왕인 내가 허락할게요.”
마왕은 그렇게 말하면서, 제 남자를 조금씩 안으로 당겨왔다.
처음과 같이, 그 순간처럼, 오직 둘 만이 남은 이 방에서.
비로소 모든 게 끝난 이때를 조용히 만끽하고 싶었다.
서로에게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두 남녀는 서로의 온기에 젖어 들어갔다.
““영원히 내 곁에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