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0화 〉 31장 - 귀환
선포식이 한창 준비 중인 때.
클라우스는 한 발 물러나서 다른 이들이 준비하고 있는 행사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마족 측에서는 페르디난트가, 그리고 인간 측에서는 다넬 키엔마이어가 나섰다.
수인들과 요정들도 선포식 준비를 돕긴 했지만 저 둘에 비견되는 인물은 저 자리에 없었다.
‘저 둘이 나중에 또 나름 합이 잘 맞는 사이가 되었던가.’
무를 아예 배척하는 것도 아니지만 너무 숭상하지도 않는 인물들이다.
거기에 본인이 가지고 있는 재능도 확실하고 적과 아군을 잘 구별하기도 한다.
그 와중에 웃긴 건, 둘 모두가 클라우스 자신과 꽤나 친분이 있다는 점이었다.
나중에 자신이 나서서는 다넬 키엔마이어의 딸과 페르디난트 엘세의 아들을 엮어주기도 했다.
당장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 사이인 인간들과 마족.
그들의 사이가 빠르게 회복되고 더는 경계심이나 적의를 품지 않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건 윗대가리들의 모범을 보일 필요가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나 두 종족이 서로 조금씩 섞여 들어가는 것.
교역이나 자유로운 왕래, 그리고 사랑과 혼인이라는 부분이 최고라는 말이었다.
“….”
저 앞에 서서 준비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율리아가 눈에 들어온다.
부푼 배를 안고서도 전혀 힘든 기색 없이 온갖 일을 직접 처리하고 있는 마왕.
심지어는 오는 길에 카엘라와 또 대련을 해서 주변을 놀라게 했다.
아무래도 수인 측 친위대 일원들에게 자신의 강함을 확실하게 각인시키려는 모양인데.
아무리 철혈 그 자체라고 해도 보는 이들은 상당히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너는 괜찮겠지만 안의 아이를 좀 생각해라, 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난 우리 아이를 약하게 키울 생각 없어요.’ 였다.
강하게 키우는 건 일단 태어나고 나서, 그 다음에 해도 되는 일인데.
아무튼 이상한 부분에서 고집이 또 은근 강한 율리아였다.
창가에서 떨어진 후 제 교수실의 책상 앞에 앉아본다.
그리고 잠시 방을 살피면서 멍하니 예전 생각에 잠긴다.
여기 이 자리에 앉기 위해 10년을 넘게 고생했었다.
아니, 이번 회차들까지 합치면 그 몇 백배는 더 고생하기도 했다.
초기 회차들마냥 치명적인 실수도 없었고, 적응한 후 자잘한 흠집도 없었다.
완벽에 가깝게 다듬고 또 다듬다보니 어느덧 여기까지 이르렀다.
‘이번 회차는 정말 괜찮았나?’
이 정도면 괜찮았다, 완벽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죽거나 다친 이도 없고 죽이지 못 한 놈도 없다.
원한을 지닐 만 한 놈도 다 처리했고 후일 필요해질 수 있는 자들도 남겨두었다.
이제 남은 건 마음 편히 이번 회차의 남은 부분들을 즐기는 것.
비로소 흘러가는 세월 위에 배 한 대 띄워놓고 그 흐름을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시나요?”
앞에 앉아있던 나타샤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렇게 질문한다.
조금 전부터 창가에 기대서, 그리고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서.
두 눈을 감은 채 한 마디 말도 없는 클라우스가 왠지 모르게 낯설게 느껴졌다.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다고 해야 할까?
“별 거 아니다. 그냥 옛날 생각 좀 하느라.”
“1차 대륙 전쟁 때를 생각하고 계신 거였습니까?”
클라우스의 대답에 나타샤 옆에 앉아있던 카엘라가 조심스레 입을 연다.
그녀에게 있어 클라우스가 말하는 옛날 생각이라 하면 그게 전부이니 당연한 것.
하지만 그가 생각하던 옛날은 그녀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여러분. 커피와 차, 그리고 다과를 내어왔습니다.”
쟁반 가득 다과와 마실 것을 준비한 플랑슈가 앞쪽으로 다가왔다.
원래는 카엘라와 플랑슈 모두 율리아의 곁에 있는 것이 맞다.
하지만 지금은 율리아가 다른 업무를 보고 있고, 아카데미 내부에서 다른 이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게 불편하다고 했기에 그녀들을 잠깐 물린 것이었다.
‘뭐, 실상은 그냥 내 곁에 잠시 있으라는 거겠지. 그동안 둘이 고생 많았으니까.’
카엘라와 플랑슈 모두 굳이 따지자면 클라우스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 율리아가 그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기에 둘을 같이 모시고 있는 거다.
해서 율리아는 그 둘에게 여유가 되면 잠시나마 클라우스 곁에 있도록 배려를 해준 거였다.
“다들 오셔서 좀 들어요. 클라우스님도요.”
“세실리님. 어서 오시죠.”
그러자 책장 앞에 서서 클라우스가 보던 마법 서적들을 살피던 세실리가 다가왔다.
근접 전투 능력은 평균에서 조금 더 위라고 보는 게 전부일 테지만.
마법을 다루는 능력은 이제 클라우스와 맞먹을 정도로 성장한 레블랑 가문의 가주.
물론 클라우스와 마법 실력을 겨룰 때마다 일부러 지는 게 일상인 세실리였다.
특히나 클라우스가 순수하게 마력들을 응집하여 몸을 두들길 때마다.
일부러 방어 마법을 전개하지 않고 눈물이 쏙 빠지도록 맞는 걸 즐기기도 했다.
클라우스도 클라우스지만 세실리 본인도 무척이나 바쁘다.
레블랑 가주의 일에 율리아 곁의 측근으로서 맡아야 하는 업무들.
그리고 이제는 요정들과 새로운 마법들까지 연구할 터이니 당연히 시간이 부족했다.
무슨 시간이 부족하느냐고? 당연히 클라우스에게 벌을 받는 시간 아니겠는가.
해서 마법 대련을 핑계로 일부를 풀어내곤 하는 세실리였다.
그걸 클라우스도 잘 알고 있기에 굳이 원거리 싸움으로 대련을 끝내는 게 아니라.
마력을 응집시켜 육체에 직접적으로 데미지를 주고 있었다.
“이거 플랑슈 시종장이 직접 만든 쿠키인건가요?”
세실리의 질문에 플랑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녀가 만든 수제 쿠키는 율리아마저 훌륭하다고 말을 했을 정도.
그러니 세실리 입장에서는 왕이나 먹을 수 있는 다과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타샤와 세실리, 그리고 카엘라까지.
요정에 마족에 수인이서 저렇게 붙어 앉아서는 다과를 즐기는 모습이 퍽 재미났다.
“플랑슈.”
“네, 클라우스님.”
“너도 앉아서 같이 쉬어. 어차피 율리아 곁에 가면 또 주구장창 일일 텐데.”
클라우스의 말에 플랑슈는 거절하지 않고 얌전히 그녀들의 곁에 앉았다.
물론 다과를 즐기기보다는 혹 차나 커피가 부족하지는 않을까 항시 주전자를 들고 있고.
쿠키가 떨어지자마자 바로 일어나서는 미리 구워두었던 쿠키들을 더 가져왔다.
“리르. 너도 앉아.”
“에? 아, 아니에요. 저는….”
이 방에 있는 모두가 마왕 율리아의 최측근들이다.
나타샤와 카엘라는 각각 요정들과 수인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자리에 있기에 정치적 파트너라고도 볼 수 있고.
세실리와 플랑슈는 마족 사회 내부에서, 혹은 마왕성 내부에서 무척 중요한 일들을 맡고 있다.
마지막으로 클라우스는, 더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율리아에게 있어 절대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
그와 반대로 리르 자신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인물이다.
외부의 정보들을 수집하며 그걸 마왕가에 보고하는 역할을 맡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건 얼마든지 다른 인물들에게 시킬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타샤, 카엘라, 세실리, 심지어 플랑슈까지.
모두가 근접 전투 능력이나 마법으로 거의 최고 수준에 이른 고강한 실력자들이다.
그에 반해 리르는 어느 부분으로도 겨우 평균에 다다르는 것이 전부다.
때문에 그녀가 클라우스의 제안에 손사래를 치며 거부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자신은 그냥 이렇게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기니까.
저들과 같은 자리에 서서, 같은 공간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 같았다.
“또 두 번 말하게 하려고?”
하지만 클라우스의 입에서 저 말이 나오자, 리르는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아카데미에서 몇 차례 조교를 당한 후 클라우스가 자신을 거칠게 다룬 적은 없었다.
오히려 너무 부드럽게 대해줘서 괜스레 불안했던 적이 몇 번 있었다고 할까.
그 와중에 아카데미에서 들었던 그 무서운 말을 다시 아카데미에서 듣게 되었다.
해서 잔뜩 겁을 먹은 얼굴로 클라우스를 바라보는 리르였다.
그리고 곧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게 되었다.
“…아.”
목소리는 분명 그때와 다른 것이 없었지만.
눈매도, 그리고 입가에도 분명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제야 클라우스가 장난조로 그렇게 한 번 말을 한 것임을.
내심 자신을 챙겨주고 있음을 알아차린 리르는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옆에 다다르다 다른 여인들도 너무나 당연하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리르가 귀족도 아니고 그냥 일반 마족이라는 부분도,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도 묻지 않았다.
여인들은 그냥 클라우스가 리르를 받아들이자 당연하게도 그녀가 다가오는 걸 허락했다.
“어쩌다 보니 아카데미에서 만나게 된 이들이 전부 모였군.”
“그러게요. 처음 클라우스님을 만났을 때는 저희 가문에 어떻게든 끌어들이겠다고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려고 했었죠. 그 때만 생각하면… 으으, 제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건지.”
“그런 짓을 했기에 지금 여기 있는 거 아닐까 싶은데? 그게 아니었다면 신경도 안 썼을 거다.”
클라우스의 말에 나타샤가 ‘그런가요?’ 라고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전 그 때 클라우스님 무서운 줄도 모르고 마법 대련을….”
“맞아. 세실리, 당신 그 때 클라우스님한테 호되게 당했었죠.”
“그랬습니까? 지금이라면 몰라도 그 때는 상당히 약하다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아카데미에서 꽤나 많이 부딪친 사이여서 그럴까.
나타샤와 세실리, 카엘라는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리르는 얌전히 옆에 앉아서 이야기를 듣다가 재미난 이야기에는 웃고 또 조금 위험한 주제가 튀어나오면 ‘으어어?’ 하고 탄식을 흘렸다.
마지막으로 플랑슈는 그 와중에 잔과 접시를 치우고 있었고 말이다.
“….”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클라우스는 잠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는 더 바짝 긴장해라.”
“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거든. 아마 이전까지의 일들은 휴가처럼 느껴질 거다.”
당연한 일이다.
율리아의 영토가 순식간에 두 배 가까이 늘어났으니 자연스레 밑의 신하들에게 가는 일도 두 배로 늘어나기 마련이다.
더해서 신경 써야 할 것이 한 둘이 아니기까지 하니 정신이 없을 수밖에 없다.
“그래고 저희에게는 클라우스님이….”
“난 쉴 거다. 이제부터 그냥 한량이 된 것 마냥. 마왕 반려라는 타이틀 하나 달고.”
“에? 아니, 클라우스님?! 당장 엄청 바빠진다는데 클라우스님이 쉬시겠다니….”
그러려고 너희들을, 그리고 다른 이들을 깔끔하게 모아서 율리아 곁에 박아둔 거야.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클라우스는 슬쩍 두 눈을 감았다.
물론 여인들에게 말한 대로, 정말로 아무 것도 안 하고 죽은 듯이 지낼 생각은 없다.
저들은 남들의 시야가 닿는 곳에서, 양지에서 활동하면 되는 것이고.
자신은 다른 자들의 시야가 닿을 수 없는 곳에서.
율리아의 뒤에서 그 그림자를 양산 삼아 조용히 마왕을 이끌면 될 뿐이다.
그리고 다음날, 마침내 대륙 통일을 공표하는 마왕의 선포식이 거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