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9화 〉 31장 - 귀환
“클라우스 교수 왔는가?”
율리아가 다른 이들과 함께 잠시 도시들을 돌아보는 동안.
클라우스는 오랜만에 플랑슈와 함께 대륙 아카데미를 찾았다.
원래라면 전쟁의 여파를 피해가지 못 하거나, 설사 피해갔다고 해도 우중충한 분위기만 내고 있어야 할 곳이었는데.
“무척 바빠 보이시는군요.”
“이게 다 마왕 전하… 아니, 폐하와 다른 분들 덕분 아니겠는가. 하하하!!”
전쟁으로 인해 아카데미를 임시 휴교 할 때만 해도 우울해하던 루스칼 총장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껄껄거리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재 아카데미는 비록 수인들과 요정 측 학생들은 없다고 해도.
인간 측 학생들과 마족의 학생들을 받아서는 강의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서로에게 적의를 표하던 이들은 전부 사라지고.
이제 남은 건 하나의 왕 아래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이 모인 자리이다.
그렇기에 갈등도 많이 줄었고 오히려 이전보다 더 많은 교류를 하는 분위기가 그려졌다.
“마왕 폐하께 정말 몇 십 번의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하는지 모르겠어. 충분히 이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아카데미인데 이곳을 조금이라도 건드리는 자는 극형에 쳐하겠다고 엄포를 놓으셨다지. 그걸 듣고 어찌나 가슴이 뭉클하던지.”
아무래도 루스칼 총장은 율리아가 대륙 아카데미를 생각해주고서 그러는 줄 안 모양이다.
실상은 이곳이 자신과 클라우스가 만난 장소이기에.
그리고 그 남자와 처음으로 몸을 섞고 처음을 내주었던 장소이기에 소중히 여기는 것이지만.
클라우스는 딱히 그 부분까지 언급을 할 필요성은 전혀 느끼지 못 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꽤나 잘 돌아가는 것 같네요.”
“솔직히 말해서 마왕께서 오신 후 제대로 된 전투가 있긴 했나? 앞쪽의 요새들이 좀 버티는 건가 싶었지만 후방이 유린 당하자 전부 무너졌지. 이전처럼 7년을 싸운 것도 아니고 수만이 죽거나 다치지도 않았어. 전쟁이라고 하기 보다는 분쟁에 가까운 수준이었지.”
“그렇긴 합니다.”
“거기에 벌레만도 못 한 귀족 나부랭이들이 싹 다 죽지 않았던가? 덕분에 학생 수는 좀 줄었어도 이제야 좀 배움의 터 같은 느낌이 들어.”
루스칼 역시 같은 귀족 출신임에도 귀족파에 속해있던 자들을 벌레만도 못 하다고 한다.
그가 내심 마음속에 지니고 있었을 분노와 증오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가능한 부분이었다.
역시 이 남자는 귀족 작위보다는 그냥 아카데미의 총장이 어울리는 자였다.
“그리고 소식 들었나? 대륙 통일 선포식을….”
“이곳 아카데미에서 하신다고 했죠. 저도 들었습니다.”
“대단한 일이지 않은가! 해서 나는 당연히 마왕성으로 돌아가셔서 하실 줄 알았네. 그런데 다른 어느 곳도 아니고 우리 대륙 아카데미에서 그 선포식을 하시겠다니!”
루스칼 총장의 말에 클라우스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 부분 역시도, 이전에 율리아와 이야기를 나눈 것에서 비롯된 부분이었다.
대륙 통일의 위업을 완수하고 선포식을 거행해야 할 터인데.
그 선포식을 어디서 어떻게 거행하느냐, 이게 또 은근히 복잡한 문제였다.
‘원래는 고민 없이 마왕성에서 거행하려고 했으나, 너무 동쪽에 치우쳐져 있어. 대륙 통일의 선포식인데 그 장소가 동쪽으로 기울어있으면 영 좋지 않아.’
그렇다고 구 왕국의 왕성에서 거행하자니 그건 마족들 입장에서 무척 불편한 일이다.
이제는 조금씩 잊혀져가는 1차 대륙 전쟁이라고 하지만.
과거 피를 흘리면서 처절하게 싸웠던 곳이기도 하고 이번에도 역시나 전투를 벌였다.
그 부분의 적의는 뒤로 밀어둘 수 있다고 해도 마왕은 바로 이전까지 자신들의 왕이었다.
헌데 그 마왕이 마왕성이 아니라 인간들이 잔뜩 거주하고 있는 곳에서 선포식을 연다?
이건 마족들 입장에서 절대 받아들일 수가 없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수인들과 요정들 역시 마왕성이 아니라면 다른 곳도 많은데 왜 하필 인간의 왕성이냐고 하고.
율리아는 이런저런 정치적인 이유들로 참 많은 고민을 했다.
이제 와서 선포식을 위한 장소를 따로 만들자니 비용이 또 만만치 않다.
거기에 시간도 시간대로 잡아먹어야 할 터인데, 병사들을 얼른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부분을 생각하면 더는 시간적 여유가 없다고 할 수 있었다.
‘해서 장소를 제안했지. 따로 시간을 들여서 멋진 뭔가를 만들 필요도 없고. 마족들은 물론이고 인간과 수인, 요정들까지 바로 수긍할 수 있는 곳. 그곳에서 선포식을 하는 나름의 의미도 찾을 수 있고 무엇보다 율리아에게 특별한 장소까지 되는 그런 곳 말이야.’
대륙 아카데미는 과거 동부와 서부의 평화 모색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그렇기에 대륙의 모든 종족들 입장에서 어디 한 곳에 치우쳤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또 건설이 완료된 지 오래 지나지 않았기에 멋이나 아름다움 부분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덤으로 부지까지 넓어서 많은 이들이 머물러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마왕이 아카데미의 학생이기도 했으니 그 학생으로서 대륙 통일을 완수했다는 위업을 아카데미에 아로새기는 것이기도 했다.
클라우스의 의견에 율리아는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그런 훌륭한 제안이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고.
다른 신하들 역시 크게 고민하지 않고 따를 수 있을 거라고 말할 거라면서.
- 클라우스. 당신도 그곳이 무척 특별하게 느껴지는 모양이네요? -
그런 와중에 은근한 눈길을 하면서 슬그머니 다가오는 율리아였다.
아무래도 그가 아카데미를 자신과 만나게 된 무척 중요한 곳으로 여기고 있어서.
그래서 그 아카데미를 대륙 통일 선포식을 거행하는 장소로 추천한 것 같다고.
율리아는 분명 그렇게 여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또 한 번 뒹굴어야했지. 아이를 가지니 전보다 더 고파하는 느낌이란 말이야.’
1년 전까지만 해도 여인이라기보다는 약간 소녀스러운 느낌이 강했는데.
비를 잔뜩 맞고 버려져서는 애처롭게 울고 있는 고양이 같은 마왕님이었는데.
이제는 원하는 것이 있으면 힘을 쓰든 칼을 휘두르든 해서 얻고야 마는 무서운 여인.
그럴 만한 권력이 있고 그럴 만한 힘과 자격이 있는 마왕이 되었다.
클라우스가 옆에서 많은 부분을 돕기는 했지만, 그녀의 의지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거다.
당장 다른 이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강해진 점이 가장 대표적인 증거였다.
만난 지 1년 만에 클라우스조차 뛰어넘는 무력을 갖춘 율리아.
아이를 밴 상태에서도 카엘라와 대련을 하면서 숨조차 차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클라우스?”
“아… 네, 루스칼 총장님. 뭐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하네. 정말 고마운 일이지.”
“무엇이 말입니까?”
“자네가 힘써준 걸 알고 있어. 마왕 폐하께서도 생각이 있으셨겠지만 분명 자네가 조언을 드렸을 거야. 마왕성이나 왕국의 다른 곳보다 이곳이 더 나을 거라고. 여러 의미를 지닌 곳이니 다른 종족들도 반대할 이유가 없을 거라고.”
“그냥 갑자기 이곳이 생각나서 한 번 말씀을 드려본 겁니다. 결정은 오롯이 마왕께서 했으니 공은 그 분께 돌리는 게 당연하고요.”
“그런가. 아무튼 좋은 일이야. 덕분에 자칫 완전히 문을 닫을 뻔 했던 아카데미도 다시금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고, 무엇보다 마왕께서 있으셨던 곳이기도 하니 위상도 올라갔지. 이전에 왕국이나 귀족 머저리들이 지원 좀 한다고 거들먹거리던 시절보다 훨씬 나아.”
루스칼 총장에게 있어 자신의 귀족 혈통은 어디까지나 아카데미의 지원을 조금 더 쉽게 받기 위한 지름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정말 머리부터 발끝까지 교육자의 모습만 지니고 있는 남자.
그렇기에 클라우스는 아카데미를 절대 건드리지 말라는 명령을 내놓도록.
율리아를 설득해서 에슐리와 페르디난트의 병력을 움직이게 한 것이었다.
전쟁의 기운이 사라지고 평화가 자리를 잡게 되면.
가장 중요한 것은 미래를 이끌 젊은 세대들이 서로 어울리고 뭉치는 것이다.
젊은 자들이 반목하면 아무리 윗세대가 화합한다고 해도 평화는 오래 가지 못 한다.
반대로 젊은 자들이 화합하면 아무리 윗세대가 갈등을 일으켜도 결국 평화를 맞이한다.
그런 부분에서 볼 때 대륙 아카데미는 그런 부분에 완전히 어울리는 곳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왕께서는 늦어도 사흘 후면 도착하실 겁니다. 그 때가 마침 토요일이니까요.”
“굳이 주말에 오시는 이유를 알겠군. 학생들 강의에 방해가 되지 않겠다는 거 아닌가.”
“대충 그렇죠. 그보다 학생들도 학생들이지만 교수진들이 많이 비었을 텐데요.”
당연한 말이지만 아카데미의 인간 교수진 중에 귀족들이 다수 끼어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반수 이상이 귀족파의 충실한 앞잡이들이었고.
현재 동부가 왕국을 휩쓸고 지나가면서 그 귀족파가 전부 사라진 상황에서.
당연하게도 그들의 끄나풀이었던 교수진들까지 전부 갈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으음… 사실 그렇긴 한데, 아직 학생들 수도 많지 않아서 말이야.”
“아직은 그렇겠죠. 하지만 선포식이 끝나고 아카데미를 재가동하기 위해 편입 기간을 재조정하면 순식간에 여러 이들이 몰릴 겁니다. 귀족들도 사라지고 상황이 좋아진 마당에 평민들도 모두 아카데미에 입학하려고 할 테니까요. 거기에 요정들과 수인 쪽 학생들도 배는 많아질 겁니다. 당장 방부터 충분한지, 그것부터 걱정해야 할 정도로요.”
“그 정도인가? 난 거기까지는 예상하지 못 했는데… 그리 된다면 조금 난감하군.”
낭패라는 듯 볼을 긁적이는 루스칼 총장.
학생들이야 그렇다고 쳐도 교수들까지 아무나 뽑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보충한다고 해서 쏟아지는 게 아니니 확실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해서 하는 말인데, 교수들을 새로 임용하기 전까지 제가 좀 도와드리고 싶은데요.”
“정말인가? 자네는 이제 마왕 폐하의 최측근으로서 업무를….”
“아뇨. 그런 업무들은 다른 이들이 볼 겁니다. 뭘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전 여전히 직분도 없는 그냥 일종의 조언자 역할이 전부에요.”
직급이나 위치에 얽매이면 피곤하기만 하다.
더해서 괜히 다른 자들의 견제를 받을 터이니 아무 것도 없는 척, 아무 일도 안 하는 척.
그렇게 조용히 지내는 척 하면서 뒤에서 율리아와 함께 밀회를 즐기면 충분했다.
“여기저기 아는 녀석들도 좀 있으니 그들로 교수진을 채워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래주면 나야 정말 고맙지. 이거 자네에게 몇 번이나 빚을 지는군.”
“예전에 절 도와주신 걸 이제 갚는다고 여겨주시면 되겠군요.”
1차 대륙 전쟁 당시, 귀족들에게 온갖 견제와 모함을 받던 시절.
아직 귀족 자리에 머물던 루스칼 총장은 다넬 키엔마이어와 같은 진짜배기 귀족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자리도 위험함에도 열심히 클라우스를 대변해주었다.
클라우스는 그런 제 편을 절대 잊지 않았고, 계속 도와주었고 말이다.
“그러면 선포식 때 뵙도록 하겠습니다. 또 할 일이 많아서 말입니다.”
“그래. 그 때 보도록 하지.”
클라우스가 총장실을 나서고 플랑슈가 얌전히 뒤를 따른다.
그러다 말고 은발의 메이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클라우스님.”
“왜 그러냐, 플랑슈.”
“기분이 무척 좋아 보이시네요.”
“…그런가?”
“네. 그런 미소는 저로서도 처음 보는 것입니다. 무척이나 후련하고, 그러면서도 잔잔한 미소. 돌아오신 게 무척이나 즐거우신 모양입니다.”
“그렇지. 그럴 수밖에 없지.”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맞게 흘러가고 있으니까.
그 긴 시간 속에서 비로소 원하는 때를 고를 수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