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6화 〉 31장 - 귀환
율리아는 자신이 약속한 그대로 모든 것을 이행했다.
힘으로서, 병사들을 배치하는 것으로서 제어하는 것이 아닌 처음이자 마지막 신뢰.
그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모든 마족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뒤로 물린 것이었다.
“길어도 두 달이에요. 그동안 혹 이상한 일이 없도록 단단히 주의하세요.”
“걱정 마세요, 가주님. 이미 강경론을 펼치던 자들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렇습니다. 거기에 무엇을 하든 일단 ‘자금’ 이 있어야 가능한 일 아니겠습니까. 현재 우리 벨라루스가 모든 자금을 꽉 쥐고 있지요. 해서 다른 뜻을 품은 자들이 뭘 하려고 하는 순간 바로 소식이 들어올 겁니다. 그 즉시 조치를 취할 터이니 걱정 하실 건 없습니다.”
벨라루스 가문의 충직한 요정들과 대화를 나누는 나타샤.
그런 요정 여인을 바라보면서 클라우스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나타샤가 원래 저런 여자가 아닌데, 오히려 상당히 쿨한 면모를 지니고 있는데.
유독 지금에 와서 저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선택하기가 너무 힘들어서다.
만약 요정 사회에서 또 다시 율리아에게 반하는 움직임이 포착된다면.
필시 율리아는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요정들을 싹 다 정리하려고 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나타샤 자신은 동족 편을 들 것인가, 아니면 마왕 편을 들 것인가.
사실 답은 정해져있다. 그녀는 결국 마왕 편을 들게 될 것이다. 그곳에 클라우스가 있으니까.
하지만 동족들 사이에서 나름 당당하게 있고 싶다는 욕심도 있는 만큼.
일이 그렇게 흐른다면 분명 큰 스트레스와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 분명하다.
나타샤 입장에서는 클라우스, 율리아와 척을 지지 않으면서 동족들을 이끌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노력이 아니라 동족들의 노력도 역시 필요하다.
클라우스라면 몰라도 율리아는 한 번 더 말썽이 벌어진다면 말살을 택할 것이다.
그리고 나타샤 자신은 결국 그걸 막지 못 할 것임을.
동족들과 함께 죽지도 않을 것임을 알기에 더더욱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고 있는 중이다.
‘해서 그럴 건덕지가 있는 놈은 싹 다 죽여 없앴지.’
지금은 요정들과 수인들이 다루기 어려운 종족으로만 보이지만.
본격적으로 대륙이 하나의 왕 아래 돌아가기 시작하면 그들도 나름 쓸모가 있다.
일단 요정들이 본격적으로 흘러들기 시작하면서 마법에 비약적인 발전이 생기게 된다.
인간들이나 마족들이 쓰는 방식과는 다르게, 요정들은 조금 더 상향된 방법을 사용한다.
클라우스가 쓰는 마력 역시 요정들의 방식과 비슷하게 만든 것이다.
다만 거기에서 자신의 편의성을 위해 몇 가지를 수정하고 또 추가하거나 삭제한 것이다.
그 외에 요정들 역시 물건을 소비하는 소비자 형식으로 볼 수도 있다.
요정들이 가장 선호하는 기호 식품은 현재 차가 압도적이다.
헌데 앞으로 얼마 후 담배가 본격적으로 생산될 터인데 나중에 가게 되면 마족이나 인간들보다도 요정들이 그 담배를 더 많이 소모하는 종족이 되게 된다.
그 외에 요정 측에서 보유하고 있는 각종 차들이 세상으로 돌게 될 것이고 서로의 문화와 물건들이 섞이면서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수인들은 무(武)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게 해주지. 여태까지는 싸우는 것에 대해서 알게 모르게 반감을 지니고 있던 인간들과 요정들의 인식을 바꿔준다.’
마족들과 인간, 그리고 요정이 섞이는 부분에 있어 가장 큰 장애물.
그건 바로 힘이라는 것에 대한 인식 차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인간들이나 요정들은 앞에 나아가 싸우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고.
반대로 마족들은 그런 부분만이 자신들의 강함을 증명하는 방식이라고 여긴다.
그 차이가 충돌하면서 누구에게는 겁쟁이, 또 누구에게는 힘만 아는 무식쟁이.
뭐 이런 식으로 서로를 헐뜯으면서 분위기가 사납게 변질되는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수인들이 폐쇄적인 삶을 거두고 사방으로 퍼져나가면서.
강하다는 이들을 만나서는 다짜고짜 대련을 청하면서 자신들을 단련시키는 모습을 보이면서.
여태까지 굳어있던 그들의 인식에 변화를 꾀하는 일종의 시작점이 되어준다.
“마왕이시여.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수인 측 인원들은? 가족들과 인사를 다 끝냈나?”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페르디난트의 말에 율리아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고향으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임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수인 전사들.
오히려 미미하게나마 흥미, 혹은 흥분이 그대로 서려있다고 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들을 마중하러 온 가족들은 슬퍼하기 보다는 기뻐하는 얼굴들.
그리고 이곳에 남게 된 다른 전사 수인들은 상당히 부럽다는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저들도 지금 이런 식으로 친위대로 지명되어 마왕을 따라가는 게 일종의 인질임을.
더 나아가 자신들의 미래를 마왕가에 대한 완벽한 조력자로 바꾸기 위함임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걸 거부하기에는 그 전사들이 얻게 될 가르침이나 훈련, 그리고 강함의 척도가 너무나도 탐이 날 수밖에 없었다.
마왕의 친위대라고 한다면 아무렇게나 관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친위대는 마왕이 직접 보면서 어떤 식으로 전투에 임해야 하는지 알려줄 수도 있다.
잃는 것만큼이나 얻는 것도 확실하기에.
그리고 얻을 수 있는 것이 무력을 숭상하는 수인들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것이기에.
거부를 할 생각도 없었고 그럴 이유도 없는 모양이었다.
“자, 그러면 슬슬 돌아가지. 집으로.”
마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비로소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오랫동안 비웠던 고향으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또 누군가는 전혀 상상하지 못 했던 새로운 세상에서 지내기 위해서.
이유는 다르지만 결국 한 명의 왕을 모시는 자들은 서쪽 끝자락을 떠나 왕국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클라우스와 페르디난트, 에슐리 이외에도 카엘라와 나타샤까지.
향후 실세 중의 실세라고 불릴 수 있는 자들을 전부 대동해서 나아가는 마왕이었다.
“좀 어때요, 율리아. 괜찮나요?”
율리아와 함께 마차에 오른 클라우스는 그렇게 말했다.
어제 밤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율리아가 했던 말이 떠오른 것이었다.
느껴진다고, 자신의 안에서 조금씩 움직이는 생명의 작지만 또렷한 움직임이.
“괜찮고 안 괜찮고 할 문제가 아니잖아요? 오히려 너무 좋은 일이잖아요, 클라우스.”
“그렇긴 하죠.”
“아직도 신기하네요. 내 안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이 느낌. 이걸 태동이라고 한다죠? 설마 내가 이런 걸 느낄 날이 올 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 매일이 그저 힘든 삶의 연속일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웃으면서 있을 수도 있고요.”
자신의 배를 연신 쓰다듬으면서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반응의 율리아.
몇 안 되는 이후 회차들의 기억을 찬찬히 떠올려보면….
일단 아기가 딸이면 제 엄마와 판박이인 지라 둘이 엄청 싸우는 걸로 클라우스는 기억했다.
반대로 아들이면 조용해도 너무 조용해서, 해서 그 속을 율리아조차 제대로 알 수가 없어서 속이 터져 죽겠다고 불평을 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딸이든 아들이든 확실히 능력은 출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딸은 외적인 부분으로, 아들은 내적인 부분으로 강점을 전부 물려받았다고 할까.
‘설마 아이들에게까지 이놈의 회귀 능력이 전해진 건 아닐까 걱정도 했었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걱정이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다.
본인부터 이놈의 회귀 능력 때문에 미치기 직전까지 몰린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이미 미쳐버렸을 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걸 느낄 수 없을 정도로도 완전히 비틀려서, 그래서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아이들에 대해서 확인을 조금 더 해보았지만 스킬을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는 건 회귀 능력 또한 물려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말.
하지만, 그럼에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
갑자기 움찔 몸을 떨면서 멍하니 제 배를 바라보는 율리아.
아무래도 안에 있는 아이가 또 한 번 움직인 듯 했다.
잘 보이지 않던 반응이 이렇게 휙휙 나오니 클라우스가 보기에도 꽤나 새로웠다.
이전부터 몇 번 보던 장면이지만, 그래서 자신으로서는 적응이 되었다고 하지만.
율리아 입장에서는 모든 게 처음일 테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몇 십 번의 회차를 반복해도 변하지 않는 모습들.
그 중에는 저렇게 제 뱃속의 아이를 생각하며 행복해 하는 율리아도 있었다.
때로는 사소한 일로, 또 때로는 중요한 일로 부딪치고 조금은 다투기도 했지만.
그리고 어느 회차에서는 결국 자신이 버려지는 일까지 겪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필요 이상으로 정이 들어서 이제는 율리아 없이 뭔가를 한다는 것조차 이상했다.
“클라우스.”
“네. 율리아.”
“내가 왜 나타샤를 데리고 가는지 알고 있나요?”
“요정들의 진짜 속내를 확인하고자 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거 말고요. 왕으로서 그럴 수도 있다고 하지만… 실은 그것만 있는 게 아니었거든요.”
은근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마왕이다.
대답을 말하라고 하고 있지만, 정말로 말을 하면 역으로 또 토라지는 율리아다.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잠시 생각하다가 잘 모르겠다고 하는 것이다.
“잘 모르겠는데요. 왕으로서 그럴 수도 있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라니.”
“실은 나 심술 좀 부린 거예요. 분명 나타샤가 정치적으로 필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그리고 나와 함께 이런저런 일을 겪었던 친우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그 요정의 눈에 당신이 비치는 걸 보니까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카엘라나 세실리한테는 그런 모습을 잘 보이지 않던데요.”
“다르잖아요. 그 여자들이랑 나타샤는. 많이 달라요.”
많이 다르다는 게 과연 무슨 말인지, 그 또한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 한다.
두 눈을 깜빡이면서 속내를 모르겠다는 뜻을 내비치니 율리아는 난처하다는 미소를 짓고서는 제 배를 만지작거리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카엘라는 당신에게 충성을 다 하는 여인이죠. 당신을 흠모하는 부분도 물론 있지만 그게 충성심을 앞지르지는 않을 거예요. 아마도 자신이 정해둔 ‘선’을 지키려고 하겠죠.”
“….”
“그리고 세실리 레블랑. 그녀는 뭐라고 해야 할까. 당신을 원하는 것 같은데 또 무서워하는 모습도 같이 보이고 있어요. 그리고 뭐라고 해야 할까? 당신 옆에 있고 싶어 하는 건 맞는데 그게 뭔가 상당히 비틀려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요.”
역시 마왕이 되고 나서 각성이라고 불러도 모자람이 없는 격변을 맞이한 율리아답다.
그걸 또 다 파악해서는 계속 주시를 하고 있었다는 말인데.
이래서 내가 마왕님을 버릴 수가 없단 말이야, 하고 중얼거리는 클라우스였다.
“하지만 나타샤는 그들과는 달라요. 딱히 당신에게 충성심으로 묶인 것도 아니고 뭔가 강렬한 육체적 뭔가를 원하는 것도 아니죠. 그 여자는 나와 비슷해요. 기댈 곳을 필요로 하고, 의지하고 싶어 하죠. 나는 그게 상당히 거슬렸던 거구요.”
“거슬릴 이유가 있나요? 나타샤와 당신 사이에는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는데.”
“알아요. 알고 있어요. 그리고 나타샤에게도 이미 말을 했죠. 가능한 선에서 넘어가주겠다. 그런데 막상 그걸 지켜본다고 생각하니 심사가 뒤틀려서 말이에요.”
아무튼 잘 하다가 꼭 독점욕이랑 소유욕 때문에 조금씩 일이 꼬이는 때가 있었는데.
지금도 그와 비슷한 상황인 모양이었다.
나타샤와는 지금보다도 더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서로에게 좋은데.
그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사이에 낀 클라우스만 생각하면 화가 난다고 하니….
‘확신을 주어야겠지.’
내게 있어 사랑하는 여인은 무조건 너라는 확신.
그걸 마음과 몸 모두에 확실히 박아둘 심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