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2화 〉 30장 - 다가오고 있는 것은
이 저택의 주인은 벨라루스와 함께 사회의 일원을 차지하던 거대한 가문이었다.
허나 지금은 깨끗하게, 그 흔적이 전부 지워진 후였다.
그리고 현재는 마왕이 잠시 기거하는 일종의 별장 같은 곳이 되었다.
“아직도 믿기지가 않네요. 정말로 몇 년이 아니라 몇 달 만에 모든 걸 끝낼 줄이야.”
“이들이 강했던 게 아니라 그저 강해보였던 겁니다. 나는 약점을 파고들어서 그걸 놓지 않고 계속 물어뜯은 후 피가 흘러넘치기를 기다렸던 거죠.”
“냉혹하다고 해야 하나요? 그래도 모두가 과거 당신과 함께 싸운 전우들인데.”
“전우들은 나와 함께 할 것이고 나를 경계했던 자들은 인간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싸우려고 할 테죠. 자신들이 멀리 한 놈이 가장 끔직하다고 여기는 마족들과 함께 온다는데 누가 반기겠습니까. 덕분에 고민할 것도 없이 아주 싹 정리할 수 있었죠.”
실은 이전 회차들 덕분에 어떤 놈이 짐이고 또 어떤 놈이 선물인지 알고 있어서였지만.
굳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가 없었기에 대충 넘어가는 클라우스였다.
이전에 몇 번 회귀의 비밀을 털어놓은 적도 있었지만, 딱히 좋은 결과를 불러온 적은 없었기에 이후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절대 언급을 하고 있지 않았다.
계단을 오르면서 율리아는 저택을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인간 귀족들이 머물던 성이나 왕국 측의 왕성에 비하면 상당히 수수한 멋이 있었다.
과하게 화려하거나 눈에 띄는 것들을 딱히 선호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이런 부분에서 보면 차라리 인간 귀족들보다 요정들이 더 나은 것 같기도 했다.
‘그놈의 잘난 성격 맞춰주는 게 상당히 피곤했지만.’
누군가가 클라우스에게 인간 귀족이 나았냐, 요정이 나았냐고 묻는다면.
그래도 요정이 한 백 배는 낫지 않겠냐고, 클라우스는 그렇게 대답할 생각이었다.
최소한 그 요정들의 윗대가리들은 기본적인 생각이란 걸 해서 일을 행했다.
귀족들 마냥 말만 많고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헛짓거리는 상대적으로 적다고 할 수 있었다.
“하아. 절대 안 그럴 줄 알았는데, 몸이 묘하게 무거워진 느낌이란 말이에요.”
“당연한 겁니다. 홀몸이 아니잖아요, 율리아.”
“그래도 나는 훨훨 날아다닐 줄 알았어요. 설마 이 정도로 힘겨울 줄은 몰랐죠.”
초기에는 거의 티가 나지 않았을 테지만, 이제는 아이가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즉 안정기로 접어들었다는 소리인데 이 때부터 눈에 확 드러나고, 여인도 자신의 변화를 확실하게 인지하게 된다.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일단 의자 위에 조심스레 몸을 앉히는 율리아.
그리고는 살짝 고개를 숙여서는 부푼 모습이 역력한 배를 조심스레 쓰다듬는다.
“그거 알아요? 감히 어떤 놈이 왕을 이리 만들어놓고 코빼기도 안 비치는 건지. 도대체 차기 마왕의 아비가 되는 자가 누구인지. 아무도 묻지 않더라고요.”
율리아의 말에 클라우스는 저도 모르게 크흡, 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어떤 이는 단순히 마왕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 게 두려워서 입을 다물었을 수도 있고.
또 누구는 언젠가 자신들의 왕이 알려줄 때가 있을 터이니 기다리자고 생각했을 것이며.
다른 누군가는 이미 답을 알고 있기에 굳이 물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 했을 거다.
특히나 기존부터 율리아를 모셨던 마족들은 그런 질문을 하는 게 더 이상했을 거다.
다른 이들과는 명백하게 군주와 신하로서 선을 긋는 율리아이지만.
사적인 부분이나 공식 석상에서초차 묘하게 클라우스에게 기대는 걸 보인 적이 있다.
율리아가 아카데미에 가고 그 이후 왕국의 방패, 전쟁영웅이라는 남자가 따라나섰다.
여기까지만 봐도 둘 사이에 뭔가 있다는 걸 다 알 수가 있었다.
“다들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모양이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더 이상하다고 할까요?”
“뭐가 말입니까?”
“마왕가에 다른 고위 가문의 마족이 들어오는 게 아니라 인간이 들어오는 거잖아요. 혈통 문제는 어느 곳을 가도 항상 문제가 되는 부분 중 하나고요. 나는 솔직히 내 신하들이나 주변 마족들이 인간 남자를 곁에 두고, 또 그의 아이를 밴다는 사실에 거부감을 드러낼 거라고 생각했어요.”
“확실히 그랬을 겁니다. 그 인간이 보통의 남자였다면 분명 그랬을 거예요.”
괜히 자신이 귀족들에게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 그 명성을 쌓은 게 아니다.
또한 수도 없는 회차를 진행하면서 완벽에 가까운 사령관으로 활동한 게 아니다.
심지어 귀족들의 갖은 지랄을 참아내면서 몇몇 마족들에게 자비를 베푼 것도.
그냥 갑자기 마음이 동해서 한 일들이 결코 아니었다.
마족들이 인간들은 꽤나 가볍게, 그리고 만만하게 보았음에도.
자신만큼은 그런 인간들과 동일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 하게 만들었다.
오히려 적이었던 그들이 먼저 자신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칭송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도록 그들의 이상향에 비슷하게 자신의 모습을 설정했었다.
클라우스 자신에 대한 과한 자신감이라든가 그 비슷한 게 아니다.
철저하게 인간 측과 마족 측 모두를 겨냥하여 ‘만들어진’ 영웅의 모습으로 행세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사용하다가 버릴 수 있는,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이로 보지 못 하게.
그리고 세상 누군가와 엮이든 자신이 결코 부족한 이가 아님을 인지할 수 있도록.
“하긴. 1차 대륙 전쟁 때부터 해서 이번 전쟁까지, 클라우스 당신이 마족이었다면 아마 장담하건데 내게 충성하는 무리보다 당신을 추종하는 마족들이 더 많았을 거예요.”
“하지만 난 인간이기에 절대 그럴 수는 없죠. 동경하는 건 가능하지만, 존경하는 건 된다고 하지만. 결국 군주로서 충성을 바쳐야 하는 존재는 따로 있으니까.”
어쩌면 마족을 선택하지 못 했던 게 신의 한 수였을 지도 모르겠다.
마족이 아니었기에, 인간이기에 클라우스는 결국 마왕의 권위를 위협할 수 없었다.
이전 회차에서는 그 부분을 잘못 해석하여 너무 과하게 공을 세우는 원인이 되었고 결국 다른 마족들의 견제와 경계를 받아 몰락하고 말았던 적도 있다.
그 회차들의 일들을 교훈 삼아서 클라우스는 2차 대륙 전쟁에서 자신의 역할을 최소화했다.
필요한 순간에는 나서되 불필요한 때에는 율리아라던가 다른 이들을 앞세웠다.
그들의 뒤에 서서 필요한 순간에 도움을 주거나 조언을 해주기는 했지만.
괜히 앞에 서서 세간의 관심이나 이목을 끄는 짓은 무조건 지양했다.
자신의 역할을 어디까지나 마왕의 그림자로, 내지는 뒤를 따르는 이로만 정해둔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 왕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한다.
모든 영광과 명예, 그리고 공훈은 마왕에게,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돌린다.
어차피 자신의 활약은 율리아만 알고 있으면 모든 게 만사 오케이다.
그녀만 꽉 붙잡고 있어도 말년까지 편안해질 수 있는데 괜히 눈에 띌 필요는 없다.
“그리고 이제 그들도 어렴풋이 눈치를 챘을 겁니다. 요정들과 수인들과는 다르게, 마족들과 인간들은 결국 좋든 싫든 서로 섞일 수밖에 없다는 걸 말이죠.”
“…그 부분은 나도 이전부터 생각하던 일이었어요. 두 종족은 서부의 끝자락에 사는 것과 다르게 인간들은 마족들과 바로 이웃하고 있고 알게 모르게 영향도 많이 받았죠. 거기에 눈 색깔을 제외하면 솔직히 가장 비슷하게 생긴 사이이기도 하고요.”
요정들처럼 뾰족한 귀를 지녔다거나 수인들 마냥 짐승의 귀와 꼬리를 지니지도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굉장히 싫어하지만 따지고 보면 마족과 인간만큼 비슷하고 또 가까운 종족도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대륙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지닌 게 다름 아닌 인간일 텐데. 내 말이 맞죠?”
“아마 그럴 겁니다. 마족이 평균이라고 한다면 요정과 수인은 평균 이하의 종족 수를. 반대로 인간들은 그보다 훨씬 많은 평균 이상의 인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인간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이후 대륙의 안정을 확실히 꾀할 수 있는 지름길이겠죠. 그리고 그 인간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 정복을 당했음에도 안심하고 자신들의 본래 업무에 충실하면서 이 마왕가에 충성을 다 할 수 있도록 만드는 방법.”
그렇게 속삭이면서 율리아가 의자에 몸을 기대고는 클라우스를 살짝 잡아당긴다.
정말 오랜만에, 그동안 꿈에서만 보던 남자를 바로 앞에 두고서.
율리아는 달콤한 냄새가 확 끼쳐오는 입술을 열고서는 속삭였다.
“간단하잖아요? 이 마왕가에 자연스레 섞여들게 만들면 되는 것. 마족인 나와 인간인 당신이 엮여서 이 다음 마왕은 마족과 인간의 피를 모두 지닌 자로 만드는 것. 그렇게 해서 동부와 서부 절반이 넘어가는 그 넓은 땅의 합법적인 군주가 된 다음 나중에 가서는 요정들과 수인들까지 전부 완벽하게 흡수하는 거죠.”
“….”
“지금은 인간들을 안정시키고 흡수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게 현실이에요. 요정들과 수인들? 그나마 당신과 다른 이들이 이 정도로 해준 게 다행일 정도죠. 만약 그들이 끝까지 내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면 나는 미련 한 톨 가지지 않고 정말 싸그리 다 죽였을 지도 몰라요.”
저건 절대 빈말이 아니다. 지나가는 말이라든가 협박성 발언도 아니다.
실제로 율리아는 대학살을 벌인 적도 있는데 한 번은 전쟁 포로들에게 자행되었고.
다른 한 번은 전쟁이 한창 진행될 때 저항했다는 이유로 성 다섯 채를 지워버리기도 했다.
그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마왕가와 그녀의 동족인 마족들이다.
다른 부분들은 그것들의 안위를 위하여 선택되는 부차적인 부분이라고 보는 게 옳다.
그렇기에 마왕가와 마족들에게 해가 된다면 율리아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또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다행히도 요정은 당신이 미리 손을 써둔 나타샤가. 그리고 수인들은 카엘라 전사장이 맡아서 내부 정리를 마쳤죠. 덕분에 꽤 오랜 시간동안 나와 내 후계자는 마족들과 인간들의 일에 집중할 수 있고 말이에요.”
“그렇죠.”
“그렇기에 더더욱 당신이 내 반려라는 거에 대해서 내 동족들도, 인간들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 아닐까 싶어요. 혈통을 문제 삼으려고 하는 놈이 있다면 어떻게 될지 뻔히 알 테니까. 마족과 인간들이 서로 섞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가장 위에서부터 그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야 하니까. 그리고….”
자신의 배 위로 클라우스의 손을 조심스레 올려두면서.
율리아는 마치 이 안에 새근새근 잠들어있는 아이의 기운을 느껴보라는 듯 웃으면서.
“여기까지 온 마당에 당신 이외의 어느 누구도 내게 어울릴 만한 이는 없다는 걸 아니까.”
그 말을 한 직후, 율리아가 다시금 클라우스의 손을 붙잡는다.
그리고는 자신의 상의를 붙잡게 만들면서, 언제든 이 거추장스러운 옷을 끌어당겨도 좋다고 말하면서, 두 다리로 슬그머니 남자의 몸을 붙잡는다.
“이제 안정기에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고 있죠?”
“그동안 참 많이 참았던 모양이네요. 그렇게나 고픈 겁니까?”
“당연한 거 아니에요? 이렇게 오랫동안 못 하니까 가슴이 답답하다 못 해 타는 것 같아요. 그리고 내가 얼른 안겨야 당신도 아주 조금은 더 자유롭게 다른 여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 테고 말이죠. 내 말이 틀린가요?”
클라우스와 다른 여인들의 관계를 이 영리한 마왕이 모를 리가 없다.
독점욕 강하고 소유욕도 강한 율리아가 그걸 애써 묵인하는 이유.
그게 자신을 위해서, 마왕에게 충성을 다 하기 위함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 그러니까 얼른. 당신이 하고 싶은 일, 당신이 해야 하는 일들이 아직도 많으니까, 얼른.”
당신을 보기 위해서, 당신에게 안기기 위해서 이 먼 길을 달려온 자신을 실망시키지 말라고.
클라우스를 한가득 끌어안은 채 율리아는 그렇게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