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0화 〉 30장 - 다가오고 있는 것은
“어리석은 자들… 결국 우리들은 고귀함을 잃고 추락하여 끝내….”
“끝내 망한 건 당신들이지 우리가 아니에요. 실패한 것도 당신들이고요.”
더 듣기 싫다는 듯 나타샤는 얼른 이것들 다 치우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에 벨라루스의 요정들은 차가운 표정으로 그들을 붙잡아 마족들에게로 인도했다.
이것으로 내부에서 저항을 계속하려고 하던 모든 세력들을 축출하는 데에 성공했다.
여기까지 밀고 들어온 마족들이 요정들을 깡그리 밟아 짓뭉갰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은 꿈도 꾸지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족들은, 그리고 그들을 이끌고 온 페르디난트와 에슐리는 이미 클라우스에게서 어떻게 말하고 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그래서 이들을 마왕 아래서 어떻게 얌전히 살아가게 하는지 전부 전해들은 후였다.
- 대우하고 인정하고, 한 발자국 물러나줘라. 처음에는 승자인 우리가 왜 그래야 하나 싶겠지. 하지만 생각해보면 필요한 부분이다 이곳은 동부와는 정 반대 방향이야. 거기에 인간들과는 또 다른 종족들이 살아가는 곳이지. 확실한지지 기반을 세워두지 않으면 몇 년 만에 다시금 마왕 전하께 반기를 드는 이들이 생겨난다. 싹을 자르고 뿌리를 뽑았는데도 결국 우리가 그 씨앗을 심어둔 꼴이 되는 거란 말이다. -
제국을 점령했을 때는 움직일 기미조차 없던 율리아인데.
왜 이곳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전하자마자 마왕이 만사 제쳐두고 여기로 온다고 하겠는가.
그만큼 앞으로 신경을 쓰기가 무척이나 힘든 곳이기에.
따라서 지금 기회에 아주 확실하게 민심을 잡아두어야 하기에 그리 하는 것이다.
헌데 신하라는 것들이 왕의 마음도 모르고 그냥 자존심이 상한다고 하여 함부로 움직인다면.
여태까지 흘린 피와 그리도 고생한 모든 것들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마족들은 어쩌고 있나요?”
“가주님의 말씀대로 자신들이 정한 구역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확실히 우리들의 편의를 봐주고 있는 게 느껴집니다. 다른 요정들도 마족들이라고 해서 경우를 모르는 자들이 아님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중에 마족들과 싸우자는, 저항하자는, 영광을 되찾자는 그런 헛소리가 나오지 않아야 해요. 저들이 저만큼 우리들을 대우해주는 건 뒤가 없다는 뜻. 무슨 말인지 알죠?”
나타샤의 말에 요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것은 단순히 승자의 자비가 아니다,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를 주는 것이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선에서 대우를 해줄 터이니 다른 마음을 품지 말라고.
만에 하나 그런 마음을 품는다면, 조금은 아쉽겠지만 그 끝이 그리 좋지 않을 것이라고.
지금은 아직 마왕의 통치력이 온 대륙에 확고하게 퍼져있는 게 아니다.
해서 대규모의 인원들에게 이주령을 내리는 것이 많은 부담이 된다.
그 때문에 지금은 왕국과 제국의 땅은 인간들에게.
그리고 요정들의 숲은 요정들에게, 수인들의 땅은 수인들에게 맡기는 게 좋다.
종족 하나를 그대로 지워버리면 당장 그 땅은 완전히 버려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버려진 땅은 다시 복구하는 데에 생각보다도 더 많은 시간이 들게 된다.
전쟁으로 그리 많은 피해를 보지는 않았지만 사회 분위기가 경직된 것은 사실이다.
그 경직된 부분을 얼른 풀어주고 전보다 훨씬 더 윤택한 삶을 제공해야만 대륙을 통일하고서 마왕가가 흔들리는 일을 없앨 수 있다.
‘나중에, 정말 나중에 마왕가가 확고해지면 또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런 생각이 문득 들기는 했지만, 나타샤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 때라면 율리아도, 클라우스도, 그리고 자신도 더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그리고 미래를 도맡을 이들에 대해서 간섭하고 싶지 않다, 그러고 싶음 마음은 추호도 없다.
여기까지 이렇게 해주었다면 그 이후는 그 때의 새로운 이들이 결정하는 게 맞다.
몇 년 후도 아니고 몇 십 년, 몇 백 년 후의 일들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만큼 미련한 짓은 또 없다고, 나타샤는 그렇게 생각했다.
“저에요, 들어갈게요. 나타샤 벨라루스.”
문 너머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벨라루스 안에서 나타샤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있는 요정이 없을 터인데.
너무나도 당당하게 이곳 가문의 주인 이름을 부르는 상대방.
놀라운 것은 안에 있던 나타샤가 미소를 지으면서 얼른 들어오라고 답한 것이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자 들어선 것은 요정이 아니었다.
그녀의 정체는 다름 아닌 마족, 그것도 보통 마족이 아니라 레블랑 가문의 가주, 세실리.
여전히 조금은 껄끄러운 사이인 마족과 요정인데, 그 요정 가문에 마족인 그녀가 너무나도 당당하게 오고갈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마법진 해제가 다 끝이 났나 보군요.”
“네. 벨라루스에서 지원해준 요정들 덕분에 조금 더 빨리 끝낼 수 있었어요. 이걸로 이제 모든 숲에 대해서 출입 금지령이 취소될 거예요.”
숲은 요정들에게 있어서 말 그대로 삶의 터전과 같은 곳이다.
그런 곳에 저항 세력들이 마족들을 노리는 함정이라고 마법진을 설치해버렸다.
덕분에 요정들까지 함부로 숲을 오고가지 못 했으니 오히려 그들 입장에서는 동족들을 위하여 투쟁을 벌인다는 명분마저 잃고 말았다.
물론 그들이 마족들에게 항복한 요정들을 동족이라고 보지는 않을 테지만.
어찌 되었든 마족들이 들어왔음에도 욕은 그 저항파 요정들이 먹고.
반대로 칭찬은 그 마법진을 해제해주고 있는 마족들과 벨라루스에게로 향했다.
자신들만의 놀이공원이자 천국이고 삶의 터전인 숲을 어서 거닐고 싶다는 마음.
그걸 클라우스가 아주 정확하게 잡아내서는 마족들에 대한 호의로 돌려놓았다.
“아, 맞다. 나타샤. 얼른 준비해서 나갈 준비해요.”
“왜요?”
“조금 전에 카엘라 전사장이 돌아왔다고 하네요. 들리는 말로는 수인 측 부족장들과 전사들을 죄다 때려눕히고 이견 없는 최강자가 되었다는데.”
“아하… 클라우스님께 직접 보고를 드리기 위해서 찾아온 모양이죠?”
“수인들에 대한 반응들도 전부 말씀드리려는 것 같아요. 거기에 우리도 가서 상황 보고를 해야죠. 이제는 모든 일이 다 끝나가서 모든 게 경계 대상이에요.”
“…그렇다면 혼자 가서 점수를 딸 수도 있었는데 저한테 다 알려주다니. 감동인데요?”
나타샤의 말에 세실리가 ‘으응?’ 하고 탄식을 흘린다.
그러더니 아, 그러고 보니 괜히 말한 건가, 라고 중얼거려서는 나타샤의 박장대소를 이끌어내고 말았다.
“뭐에요, 그 반응.”
“아, 몰라요. 이상하게 카엘라 전사장은 자꾸 긴장이 되네. 이전부터 클라우스님과 너무 잘 알던 사이라서 그러는 걸까요.”
“그럴 수도 있죠. 함께 한 시기를 따지자면 마왕 전하보다도 더 오래되었으니까.”
그렇게 말을 한 나타샤나, 그 말을 들은 세실리나 표정이 꽤나 모호하다.
어차피 클라우스의 가장 가까운 자리는 취할 수도 없고, 탐할 생각도 없다.
율리아를 밀어낼 자신은 없고 클라우스가 그 곁을 내어줄 것 같지도 않으니까.
다만 그보다 약간 떨어진 자리는 이제 누가 먼저 앉느냐, 가 중요했다.
“솔직히 나타샤, 당신도 경계가 되지만… 이런 저런 부분을 보니까 확실히 카엘라 전사장이 가장 경계가 되는 것 같아요. 우리는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거잖아요.”
“그래서요? 혹시 동맹 요청이라도 하는 거예요?”
“그건 아니에요. 동맹을 맺어서 뭐 해요. 어차피 결국에는 서로 싸워야 할 텐데. 클라우스님을 두고서 웃으면서 양보할 생각 따위 전혀 없잖아요?”
세실리의 솔직한 말에 나타샤가 큭큭, 웃음을 흘린다.
둘 모두 클라우스 앞에서 보이던 모습과는 상당히 상반되었다.
부끄러워한다거나 자신을 감추려는 그런 건 온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지금 남은 건 상대방을 경계하는 날카로운 눈빛만 가득했다.
“어서 가요. 이러다가 괜히 늦으면 난감하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나타샤는 세실리와 함께 클라우스를 찾아갔다.
이제 이곳에서 할 일이 다 끝났음에도 이들이 계속 여기에 머무는 이유는 단 하나.
현재 여기로 향하고 있다는 마왕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클라우스님.”
“어서 와. 앉아. 마침 카엘라한테 차를 타주고 있었거든.”
요정들이 선물로 내어준 차를 직접 타서 대접하는 클라우스였다.
어지간해서는 대부분의 심부름을 플랑슈가 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뭐라도 해보려는 여인들이 하곤 했는데 이렇게 그가 직접 타주는 경우는 절대 흔한 게 아니었다.
덕분에 세 여인이 자리에 둘러앉아서 서로를 마주보게 되었다.
클라우스가 잠깐 자리를 비운 동안 그녀들은 현재 상황에 대해서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수인 쪽은 어떤가요?”
“큰 문제없이 잘 해결되었습니다. 저는 저들의 강자, 그리고 마왕 전하는 저의 강자. 그렇다면 수인들은 결국 가장 위에 있는 마왕 전하를 모신다. 이건 아마 제가 꺾이지 않는 그 순간까지 지켜질 것 같습니다.”
“…이런 말을 하기 좀 미안하지만….”
“제가 패배한다, 그 말씀을 하시는 거라면 이렇게 생각해보시죠. 저를 꺾고 그 다음으로 마왕 전하를 꺾을 수 있는 수인 전사가 과연 나올 수 있을까?”
카엘라의 질문에 나타샤와 세실리는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차라리 율리아가 죽고 나서 그 이후를 논한다면 또 모를까.
자신들이 곁에서 지켜봤던 율리아는 분명 괴물, 그 자체라고 말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배우는 속도, 흡입하는 능력, 그리고 본인을 얼마나 무섭게 채찍질하던지.
수인들은 물론이고 요정들도 그녀가 살아있는 한 뭔가를 해보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무슨 이야기들을 그렇게 재미나게 하는 거냐.”
김이 피어오르는 차를 가져온 클라우스가 여인들 앞에 각각 잔을 놓아준다.
그의 질문에 여인들은 그 차를 홀짝이면서 내심 지니고 있던 걱정을 내보였다.
지금이야 힘의 논리가 적용되고 있지만 만약 그게 깨지면 어떻게 되는 거냐고.
“우리 다음 세대들이 알아서 해야지.”
그 질문에 클라우스는 아주 냉정한 목소리로 그렇게 답했다.
능력이 없는 녀석에게 아무리 거대한 것을 넘겨줘도 10년은 고사하고 1년도 가지 못 할 거다.
그런 놈들 아무리 챙겨준다고 해서, 설사 자식이라고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준비를 하고, 또 교육도 하겠지만 그럼에도 일이 터진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 순간부터는 후대의 존재들이 알아서 헤쳐 나가야 하는 순간인 것이다.
“지금 여기까지 오는 것만 해도 너무 힘들었는데, 거기까지 생각하면 내 머리가 터질 거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진심을 다해서.
여기까지 오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지랄을 하고.
또 얼마나 많은 개고생을 하면서 당도했던가.
그 이후를 생각하기에는 그동안 치른 대가가 너무나도 막심했다.
당장은 그냥 아무 것도 안 하고 쉬면서 한량처럼 살고 싶을 뿐이었다.
“아, 그리고 클라우스님. 조금 전 들어온 소식인데, 마왕 전하께서 제국에 진입하셨다고 합니다.”
“…벌써?”
“네. 아무래도 빨리 일들을 마치고 클라우스님과 함께 돌아가고 싶어 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긴, 그래야 자신도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나 왕국이든 동부든 향할 수 있겠지.
이후로는 율리아 뒤에 숨어서 자신이 필요한 때에만 나서면 될 테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