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8화 〉 30장 - 다가오고 있는 것은
거짓으로 항복하여 후일을 도모하려던 요정들을 색출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타샤가 이미 이전부터 요정 사회의 많은 부분에 알게 모르게 개입하고 있었다는 것.
제아무리 고귀하다니 프라이드가 높다니 해도 돈 앞에서는 장사가 없는 법이다.
수상한 낌새를 보이는 자들에 대한 제보가 몇 이어지자 바로 확인에 나선 나타샤는 클라우스가 알고 있던 것과 일치하게 거짓으로 항복한 자들을 골라냈다.
“나타샤 벨라루스! 이 배신자! 요정들을 마족들의 아가리에 집어 처넣는구나!”
“차라리 마족들의 입이 낫지 않겠어? 다 함께 손잡고 저승으로 가는 것보다는 나을 텐데.”
“멍청하다, 멍청하다! 요정으로서 부끄럽지도 않은가! 우리들은 고귀한 숲의….”
들어줄 수 있는 개소리가 있고 들어줄 수 없는 소리가 또 있는 법이다.
다른 녀석한테 저런 말을 하면 또 모를까.
나타샤에게 멍청하다느니 그런 소리를 하는데 클라우스가 참고 있을 리가 없었다.
어차피 살려줄 생각도 없는 것들, 그리고 살려둬서 이득이 될 것도 없는 놈들.
그냥 빠르게 죽이고서 깨끗하게 일을 덮어버리는 것이 속편했다.
“내 여자한테 멍청하다고 말하지 마. 보석에 흠집날까 무섭다.”
그렇게 귓가에 속삭이며 클라우스는 그대로 요정의 목을 꺾어버렸다.
거짓으로 항복해놓고 되레 큰소리를 내던 요정이 혀를 빼문 채 그대로 절명한다.
그 냉혹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같이 붙잡힌 요정들의 얼굴이 사색이 된다.
엄청난 벌이 내려질 것이라고는 예상했지만, 설마 이렇게 목을 꺾어서 죽일 줄은.
마족도 아니고 인간의 손에 비참하게 죽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나머지는 어찌 할 거냐, 나타샤. 이건 전적으로 네가 처리해야 함이 옳을 텐데.”
“…혹시 살려두기를 원하시나요?”
“전혀. 마왕 밑에서 충실히 따를 놈이 아니면 남겨둘 필요는 없어.”
“그러면 제가 알아서 처리하죠. 마침 대부분이 저랑 딱히 유쾌하지 않은 사이들이라서 말이에요. 아주 즐겁게 웃으면서 보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클라우스가 거둔 여인들 사이에 비슷한 점을 꼽자면.
그와 같이 본인들의 사회에서 제대로 섞이지 못 하거나 혹은 특이한 면이 있어서.
그래서 외부를 겉도는 경향이 좀 있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경험들이 있다면 자연스레 기존 세력들에게 적의를 품기 마련이다
괜스레 어쭙잖은 동정심을 가져 귀찮은 일을 만드는 어리석은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클라우스는 바로 그 부분을 알기에 굳이 그런 이들을 하나둘씩 곁에 둔 것이었다.
“세실리는 지금 어디까지 진행했다고 하지?”
“아무래도 도망친 놈들이 광범위하게 함정을 설치한 모양이에요. 심지어 마법진을 이중으로 깔아서 하나를 해제하려고 하면 다른 마법진리 발동하도록 설치했더군요.”
“고귀하다더니 별의별 더럽고 역겨운 짓은 가장 잘들 하는군.”
그 말에 나타샤는 괜스레 난감해져서는 헛기침만 내뱉었다.
설마 저 남자가 자신이 요정이라고 해서 멀리할 거라는 생각 따위는 전혀 들지 않지만.
그래도 결국 본인은 요정이라는 피를 버릴 수 없기에 그런 부분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을 무슨 최고의 종족이라고 떠드는 놈들, 잘난 맛에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놈들.
나타샤 본인은 그게 참으로 거슬려서 요정 사회에서 겉돌던 것인데.
이제는 거꾸로 요정 사회의 중심이 되어서 클라우스와 율리아가 원하는 대로 그들을 이끌고 또 밀어줘야만 했다.
“쉽지 않을 거다. 괜히 저항하는 놈들은 이번에 다 쳐내고, 남은 건 복종의 의지가 있는 요정들이지만. 그들이 보기에 너는 앞장서서 마족들에게 고개를 숙인 요정인 거야.”
“….”
“거기에 마왕과 친분도 있고, 나와도 꽤나 가까워 보이니 더더욱. 처음부터 요정들의 모든 것을 마족들에게 넘기려는 것 아니었냐는 평을 피할 수는 없을 테지.”
“사실이잖아요. 제가 제 동족들을 배신한 건.”
“배신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네가 동족들을 반이라도 살린 거다. 장담하겠는데, 네가 아니었다면 반만 죽이는 게 아니라 그냥 싹 다 죽여 없앴을 거다. 그래, 멸족을 시켰겠지.”
싸늘한 남자의 목소리에 나타샤가 움찔 몸을 떨었다.
농담이나 장난 따위가 아니다, 저건 지금 진심을 다해서 하는 말이 분명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나타샤는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그만큼… 마왕 전하의 신경에 거슬리는 자들은 용서할 수 없다는 거군요.”
“난 왕의 신하이고, 신하는 왕이 걱정할 일을 처리해야 함이 옳지. 내 일을 다 할 뿐이다.”
“….”
“다만, 네가 있기에. 나타샤, 네가 내 옆에 있어서 너희 동족들을 살려주는 거야.”
클라우스의 말에 나타샤는 아, 하고 탄식을 흘려야만 했다.
지금 이 남자는 요정 따위는 싹 다 죽이든 말든 아무래도 좋다고.
그저 나타샤의 면을 세워주기 위해서, 널 생각해서 살리는 쪽으로 결정한 거라 말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이 되니 나타샤는 아주 조금은 들었던 서운한 마음이 다 사라졌다.
어차피 자신으로서는 첫 번째의 자리를 감히 탐할 수 없다.
그건 애당초 주인이 정해진 자리, 클라우스 스스로도 절대 누군가 대신할 수 없다고 공언한 자리이다.
그걸 욕심내는 것은 말 그대로 어리석은 짓, 주제에 맞지 않는 행동이다.
차라리 편하게 그걸 포기하고 그 다음을 도모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마왕 전하께서는 당신을 놓아주지 않으시겠죠?”
“그렇겠지. 아마도 품에 꼭 안고서 다른 여인들에게 절대 넘겨주려고 하지 않을 테지.”
“….”
“하지만 아이를 낳으면 아주 조금은 넉넉해질 수도 있어. 이제는 어떤 여인도 절대 점할 수 없는 고지를 차지한 셈이고 나 역시 자식이라는 올무에 붙잡힌 꼴이 된다고 생각할 테니까.”
“조금만 참으라는 말을 길게 하시네요. 그냥 기다리라고 하셔도 돼요. 여태까지 당신을 위해서 기다린 게 얼마인데 설마 그걸 못 기다릴까요.”
“그래, 넌 영리한 요정이니까. 그동안 율리아로서도 허락할 수밖에 없는 공로를 세우고서 당당하게 내 곁에 있으려고 할 테지. 하지만 그건 다른 여인들도 마찬가지야. 난 그걸 알려주려는 거다. 경쟁을 하되 율리아의 신경에 거슬릴 정도로는 하지 말라고.”
* * * * * * * * * *
패-앵!
“깩! 끄륵! 게헥!”
사지가 잘린 채 몸통만 남아서는 공중에 대롱대롱 흔들리는 귀족들.
클라우스는 자신의 말이 결코 거짓말이 아님을 아주 확실하게 알려주었다.
죽지 않을 선에서 사지를 잘라내 최악의 고통과 끔찍한 절망을 맛보여주고.
이후 교수대에 그들을 내몲으로서 마지막 희망까지 전부 박살내주었다.
“자자, 잘 보라고. 요제프 대공님. 저게 왕국에 돌아가면 겪게 될 당신의 미래인데. 한때는 당신을 그래도 머리라고 열심히 받치고 떠받들던 자들의 최후를 눈에 담아줘야지.”
“끄윽….”
마족 병사들이 요제프 대공을 단단히 붙잡은 채로, 귀족들이 하나둘씩 교수대에 매달리는 것을 피할 수도 없이 아주 제대로 지켜보도록 하고 있었다.
한 때 왕국의 왕보다도 더 한 권세를 누렸던 대공의 말로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다고 끔찍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자비를 조금 베풀어서 형 집행을 조금 늦게 한 건 알아줬으면 좋겠어. 다른 종족도 아니고 요정들이 교수대에 매달려서 똥오줌을 지리며 죽어가는, 아주 좋은 구경을 했잖아?”
“미, 미친놈….”
“미친 거 맞아. 악마도 맞아. 그걸 만든 게 너희들이었지. 그러니까 탓할 생각이라면 너희 본인들을 탓하는 게 맞을 거다. 내가 왜 여기까지 내몰렸는지 조금만 생각해본다면, 너희들은 지하에 가서도 입 꾹 다물고 팔다리나 찾는 게 나을 거다.”
허튼짓을 하려던 요정들과 붙잡힌 인간 귀족들을 모조리 죽여 없앤 뒤.
진땀을 흘리면서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마법진들을 거의 대부분 해제하는 데에 성공한 세실리를 찾아간다.
아직 일이 다 끝나지 않았지만 이렇게 도중에 찾아가서 동기 부여를 해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아. 클라우스님. 언제….”
“마법진을 다 정리하고 쉬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네. 아직도 남은 건가?”
“네. 아직 조, 조금 남았어요. 이게 워낙 많고 복잡해서….”
“그래? 흠… 조금 실망인데. 지금쯤이면 다 해제하고 당당하게 쉬고 있을 줄 알았더니.”
그렇게 말하며 세실리의 방으로 들어온 클라우스가 와락 세실리를 붙잡는다.
이후 그녀의 가슴을 아주 세게 움켜쥐자 여인의 입에서 ‘아앗!’ 하고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늦장을 부리는 건 아니겠지?”
“저, 절대 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그런 짓을….”
“그러면 속도를 더 높여. 소식 들었을 텐데? 페르디난트가 요정들을 거의 격멸했고, 에슐 리가 후발대를 이끌고 가서는 숲에 숨어든 잔당들을 소탕하고 있는 중이야. 적들에 대한 공격이 거의 다 끝난 마당에 우리에게 고개를 숙인 요정들이 그 마법진 때문에 함부로 돌아다니지 못 하고 있어. 마음 같아서는 그들에게도 일을 시키고 싶지만, 그들의 실력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작업이 늦는 것에 대한 책망을 하면서.
동시에 요정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실력을 지닌 게 바로 세실리 너라고.
클라우스는 그렇게 은근한 어조로 돌려서 그녀를 치켜세워주고 있었다.
덕분에 울상이 되었던 세실리의 표정에 다시금 환희가 피어오른다.
물론 이렇게 좋게 끝내서는 이 변태 마족의 효율성을 더 끌어낼 수 없기에.
“하앗!”
여인의 가랑이 사이로 다리를 확 집어넣고서는 살살 마찰을 시켜준다.
그러자 세실리의 몸은 너무나도 솔직하게 그 자극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구석까지 몰려서는 사납게 다뤄지고 있는 상황에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이 이상으로 뭔가 더 자극적이고, 조금은 고통스럽고, 그렇지만 환희에 가득 찬 뭔가가 있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사흘.”
“아아….”
“사흘 준다. 그 안에 마무리해. 그 이상은 못 기다려줘. 남은 요정들의 삶을 안정시키고 빠르게 군이 철수할 준비를 마쳐야 역으로 이곳이 이전보다도 훨씬 더 통치가 잘 될 거다.”
수인들은 아주 꽉꽉 짓밟아야 하지만 반대로 요정들은 적당하게 풀어주는 게 낫다.
너희들을 믿고 있다, 우리가 믿을 건 너희뿐이다, 이런 뉘앙스의 기운을 조금 넣어주면 금상첨화라고 할 수 있기도 하고.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일단 조금만….”
“조금만 뭐. 떨어져 달라고?”
그렇게 속삭이면서 여인의 가랑이를 더욱 벌리고, 가슴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더 한다.
그 바람에 완전히 뒤로 밀려난 세실리가 가쁜 숨을 내뱉더니 마치 뭔가를 참아내듯 학학거리는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울음을 참으려고 하는 것일까, 아니면 환희에 겨운 신음을 참으려고 하는 것일까.
무엇이든 좋다, 어차피 그게 무엇이 되었든 클라우스가 원하는 것이니까.
“열심히 해야지, 세실리. 당장 여기에 나타샤와 카엘라가 있는데 뒤로 쳐질 수는 없잖아?”
“네, 네! 맞아요. 뒤로 쳐질 수는 없어요. 그럴 수는….”
“그러니까 지금 한 거에 만족하지 말고 더 달려. 더 채찍질 해. 너는 여기서 멈출 만한 멍청이가 아니야. 마법으로는 어느 누구도 닿지 못 한 선에까지 오르란 말이다.”
“무조건, 무조건 그럴게요. 반드시 그럴게요.”
클라우스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그리고 자신은 왜 긴장해서는 그런 대답을 하는지.
세실리 입장에서는 신경을 쓸 겨를도 없었고 솔직히 말해서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에게는 그냥 이 남자가 있으면, 그리고 그가 옆에서 계속 채찍질을 해주면서 나아가야 할 방향만 제시해준다면 될 뿐이었다.
그것만이 자신에게 남겨진 삶의 의의이고, 살아있는 목적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