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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가 비선실세-307화 (307/341)

〈 307화 〉 30장 - 다가오고 있는 것은

“살려주시오. 이렇게 부탁드리겠소. 클라우스.”

이튿날, 다시 한 번 포로수용소로 찾아가니 엉망진창이 된 요제프 대공이 그렇게 말했다.

이건 또 무슨 헛짓거리인가 싶어 클라우스가 침묵하니 요제프 대공은 쿵쿵, 하고 바닥에 머리통까지 찧으면서 다시 한 번 목숨을 구걸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클라우스는 킥, 하고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이지, 몇 번을 봐도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는 미친 것들이다.

자신들이 무슨 대단한 존재라도 되는 줄 아는가본데, 이미 마차는 지나갔고 배는 떠나갔다.

남은 건 이제 지옥으로 가는 급행열자가 전부인데 이제 와서 무슨 구걸이란 말인가.

“내가 조금 황당해서 그런데, 요제프 대공. 난 분명 어제 기회를 주었고 그 기회를 걷어찬 건 다른 이들도 아니고 바로 네놈이었지 않나? 이제 와서 살려달라고 빈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지.”

“그러면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한 내 목숨만 거두고 다른 이들은 살려주시오. 이제 무슨 수를 쓴다고 해도 재기가 불가능한 자들이오. 평민들에게 맞아 죽지만 않으면 다행이겠지. 감히 허튼 짓을 할 수도 없을 터이니 승자로서 자비를 한 번만 베풀어주시면 감사하겠소.”

그래도 죽을 때가 가까워지니 최소한 대가리 노릇은 좀 하고 죽으려는 건가 싶다.

여태까지 온갖 구멍을 내놓고서 이제 와서는 그 대가리 노릇을 하려고 하는 게 조금 우습기는 하지만, 어찌 되었든 뭐라도 책임을 지려는 자세는 그닥 나쁘지 않다.

다만 그 책임을 질 거, 그냥 왕국에서 다 같이 사이좋게 손잡고 죽었다면 훨씬 더 괜찮은 죽음이 되었을 테고 클라우스 본인도 이렇게 고생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만 죽고 저들은 살려 보내줘라? 어차피 더는 아무런 위협도 안 되는 자들인데 마족들의 자비로움을 보여주는 그런 장치가 되도록 해라, 이건가?”

클라우스의 질문에 요제프 대공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는데, 과연 그가 약속을 지킬까 그게 의문인 모양.

잠시 그 늙은이를 쳐다보던 클라우스는 입가에 미소를 그리고는 모든 이들을 감옥에서 꺼내서는 어딘가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요제프 대공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인지, 거부인지 전혀 말하지 않은 채로.

뒤를 따라오는 귀족들이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 하고 은근히 기대를 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수용소를 나서서 빛이 보이는 곳까지 당도하자 클라우스는 몸을 돌렸다.

“마왕의 자비로움을 보여주어라. 끌리기는 하는 말이야. 그렇게 저항했던 수인들과 요정들의 항복까지 받아주었는데 위협 따위 전혀 되지도 못 한 인간 귀족들을 용서하는 게 뭐 그리 어려울까. 아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

“그런데 말이야. 살려두어서 이용할 가치가 있어야 살 수 있는 거 아닐까?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을 방생해서 어디다가 써먹으라고. 오히려 깨끗이 청소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클라우스의 속내를 알게 되자 요제프 대공은 물론이고, 기대를 품고 있던 귀족들의 얼굴이 흙빛이 되어서는 모든 걸 다 잃은 표정이 되어간다.

그 얼굴들을 보면서 그래, 바로 그거야. 라고 중얼거린 클라우스는 입술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요제프 대공에게로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저 뒤에 있는 오물들을 풀어주는 것과, 저것들의 목을 들고서 왕국에 가 평민들에게 보여주는 것. 당신의 그 잘난 머리로 생각해보자면 과연 뭐가 더 이득이라고 생각하지?”

“…야, 약속과 전혀 다른….”

“누가 들으면 진짜 약속이라도 한 줄 알겠어. 그냥 아무 말도 없었고, 생각만 좀 해보겠다는 말이었는데 그걸 곧이곧대로 왜 믿은 건지 모르겠네.”

“결국 우리들을….”

“예전에 내게 했던 말이 있지. 기억나나? 나는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기억하는데.”

점점 더 섬뜩해지는 미소를 지으면서.

클라우스는 줄기줄기 뻗어지는 안광과 함께 씹어 내뱉듯 그 말을 흘려보냈다.

“각자의 사정이 있으니 부디 이해를 부탁한다.”

대륙 전쟁 시기, 온갖 힘든 일들이 겹쳐서 중앙의 지원을 받고자 했던 적이 있다.

그 순간에 되레 클라우스의 힘이 커질까 경계한 귀족 회의에서는 그 지원을 거절했다.

그리고 내놓은 답변이 바로 저것, 각자의 사정이 있으니 부디 이해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클라우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귀족들을 하나씩 끌어낸다.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든, 욕설을 내뱉으며 저항을 하든 개의치 않는다.

얼른 이 역겨운 것들의 팔다리를 자르고 교수대에 목을 매달고서 하루 일과를 끝내고 싶을 뿐이었다.

“참고로 요제프 대공, 당신은 여기서 안 죽는다.”

“뭐라고…?”

“저것들이, 너와 함께 하던 귀족들이 몰살당하는 것을 다 지켜본 후에, 그리고 저들의 목 앞에서 비명을 지르며 통곡하는 저들의 가족들까지 모조리 참살당하는 장면을 본 후에. 그리고 네 가족들까지 대롱대롱 목이 매달려서는 허공에 흔들리는 꼴을 본 후에. 그 다음에 죽는다.”

개인적인 악연으로만 따진다면 요제프 대공은 오히려 덜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보다는 차라리 클라우스가 직접 죽인 귀족들이 그에게 있어 훨씬 더 망나니 짓을 한 귀족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요제프 대공은 귀족파의 수장으로서 응당 져야 할 책임이 있다.

그것을 회피하고자 이 먼 곳까지 도망쳤고 그 와중에 또 바로 고개를 조아리지도 않고 간을 한 번 보기까지 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원래도 살려줄 마음 따위는 전혀 없었지만 그 꼴을 보고 있으니 더더욱 처참한 최후를 선사해주고 싶은 것이 클라우스의 솔직한 마음.

해서 죽는 그 순간까지 온갖 정신적 고통을 안겨준 후, 그 다음에 죽일 생각이었다.

“이 늙은이를 제외한 것들은 저번에 정해진 대로 다 죽여. 그리고 그 장면을 이 노인네가 똑똑히 보게 만들어라. 눈을 감으려고 하면 강제로 뜨게 해서라도 보게 만들어.”

마족 병사들에게 그렇게 명령한 후 클라우스는 개운한 미소를 지은 채로 몸을 돌렸다.

이제 저 뒤에서 귀족들이 무슨 소리를 하든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동안 계속 성가시게 굴던 귀족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지옥으로 보내버렸다는 점이다.

복수라는 건 언제 해도, 얼마가 걸려도 항상 이렇게나 달콤한 법이다.

가족들까지 해치는 건 조금 너무 하지 않냐고 한다면 그 말을 하는 놈까지 죽여서는 저들 옆에 매달아버릴 생각이기도 했다.

10년 묵은 체증이 아주 깨끗하게 내려가는 듯 상쾌하기 그지없다.

이제 남은 건 그 대단하신 요정들까지 싹 다 붙잡아서는 똑같은 꼴로 만들어주는 것.

그리고 이곳의 일을 마무리한 후 다시금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클라우스님. 조금 전 전사장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원래는 내일 중으로 도착하는 것이었는데 기어코 속도를 높여 오늘 안에 들어오고 만 카엘라.

그동안 꽤나 떨어져 있었으니 그 호랑이 여인이 아주 그냥 몸이 달았을 것이다.

다른 때 같았다면 클라우스 곁에서 마음껏 날뛰었을 텐데 인원 배치 문제 때문에 세실리와 함께 왕국의 귀족 잔당들을 소탕하던 그녀다.

심지어 그 일을 끝내고 진군하는 와중에 갑자기 나타난 클라우스가 세실리만 데리고서 훌쩍 사라졌으니 말은 안 해도 내심 서운한 마음을 지니고 있을 게 분명했다.

율리아만큼은 아니어도 카엘라 역시 일단 여인인지라 토라지만 꽤나 피곤하다.

심지어 토라져서도 명령도 잘 따르고 하라는 일도 잘 하는데 표정인 엉망에 대답도 안 하는 꼴을 보고 있으면 당연히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해서 얼른 풀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클라우스는 카엘라가 페르디난트와 만나서 간단한 보고를 마치기를 기다린 후 그녀를 자신의 막사로 불러냈다.

“들어가겠습니다.”

이미 바깥에 있는 병사들에게 카엘라는 그냥 들이면 된다고 말을 해두었다.

그럼에도 굳이 들어가겠다고 알리면서까지 들어오는 호랑이 여인.

상당히 초췌한 모습이 아무래도 왕국 잔당 토벌 후에 쉬지도 않고 곧장 진군하느라.

거기에 세실리만 덜컥 데리고 사라진 클라우스를 만나기 위해서 아주 바쁘게 내달려서 이곳까지 온 모양이었다.

“오느라 고생했다, 카엘라.”

“아닙니다. 오히려 저를 따르던 이들이 더 고생했지요. 제게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대답을 하는 방식도 평소와는 약간 다르다.

원래라면 고생했다, 라는 말에 미소를 지으면서 감사하다고 말을 했을 터인데.

지금은 반응하는 모습이나 흘러나오는 목소리, 그리고 표정 변화까지.

클라우스가 아니라 다른 누가 봐도 ‘무슨 일 있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 하고 있겠지만 저게 바로 투정을 부리는 것인데.

클라우스는 귀족들을 가지고 놀 때와는 전혀 다른, 말 그대로 따뜻한 미소를 그린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카엘라 옆으로 다가갔다.

“여기까지 오느라 많이 힘들겠지만, 실은 부탁할 게 좀 더 있어.”

“….”

“이제 수인들은 스스로를 강자라고 생각하는 걸 포기했다. 꼬리를 내리고, 이빨을 감추고, 알아서 배를 보이고 있지. 마족들이 먼저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는 이상 그들의 군주인 율리아가 그들에게 있어서는 대장일 거다. 하지만 율리아는 마족인지라 어쩔 수 없이 다른 누군가가 중심이 되어서 마왕에게 고개를 숙이는 그림을 그려야 해. 당연히 그 누군가는 수인이어야 하고, 동시에 그 수인들 사이에서 최강자가 되어야만 하지.”

“이해했습니다. 그들을 휘어잡아서 절대 허튼 짓을 하지 못 하도록 만들겠습니다.”

평소와 같은 것 같으면서도, 또 평소와 묘하게 다른 목소리다.

역시 이 녀석, 토라져도 아주 단단히 토라졌군.

클라우스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이 여인의 마음을 풀어주기로 했다.

어려울 것 없다, 그냥 이 여자가 평소에 가장 좋아하는 방식으로 대해주면 그만이다.

스윽-.

천천히 카엘라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서는 조심스레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고생했다는 듯, 그리고 앞으로 더 고생을 해야 하는 부분에 미안하다는 듯.

그런 느낌을 담아서 아주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머리를 만져주면 된다.

“….”

클라우스의 그런 손길에도 카엘라는 딱히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냥 여전히 자리에 앉아서 묵묵히 앞만 바라보고 있을 뿐.

“그 일까지 마무리가 되고, 율리아가 이곳으로 당도하여 수인들과 요정들을 달랜 후 마침내 우리가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면 그 때부터는 나도, 너도 여유가 좀 생길 거다.”

“….”

“마침 그 때가 되면 율리아는 품속의 아이 때문에 정신이 없을 터이니 네가 원하는 뭔가를 얻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어. 내가 알기로 딱 그 때가 발정기 아니었던가?”

“….”

노골적인 질문에도 카엘라는 끝까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뭔가 너무 쉽게 풀리고 싶지는 않다는 것 같은데….

살랑살랑-.

안타깝게도 엉덩이 부근에서 흔들리고 있는 꼬리는 그녀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클라우스는 속으로 푸흣, 하고 웃음을 흘리면서도 겉으로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어나갔다.

“기대해도 좋아. 나도 요즘 들어서 어쩌다 보니 금욕 생활 중인 지라 쌓인 게 많거든.”

쫑긋-.

그 말에 이번에는 귀까지 귀엽게 쫑긋거리는 카엘라였다.

아닌 척 해도, 역시나 수컷에 고픈 호랑이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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