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5화 〉 29장 - 머지않았다
수인들이 말도 없이 마족들에게 항복했다는 일이 뒤늦게 요정들에게 알려졌다.
당연히 자신들과 함께 끝까지 마족들에게 저항할 것이라고 믿었던 수인들인데.
자존심 강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그 전사들의 집단이었는데.
마치 겁에 잔뜩 질린 개새끼마냥 꼬리는 말고 귀는 붙인 채 바닥에 납작 엎드렸단다.
살려달라고, 용서해달라고, 복종하겠으니 부디 종의 보전을 허락해달라고.
이미 방어선까지 돌파 당하면서 이제는 정말 풍전등화 신세가 되어버린 요정들이다.
그 사이에서도 결사항전을 부르짖던 가문들은 수인들의 항복에 그만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 이대로 시간을 질질 끌다가는 이 대륙에서 요정이라는 종족 자체가 사라질 겁니다. -
- 우리 벨라루스는 이전에 말했듯이 독자노선을 걷겠습니다. 우리들은 마왕 전하께 고개를 조아리고 항복할 것이니 싸우고자 하는 이들은 알아서 싸우세요. 동족이 아니다, 뭐다 무슨 소리를 해도 좋습니다. 요정의 명예에 먹칠을 했다는 말들, 받아들이겠습니다. 차라리 먹칠을 할지언정 살아남아야겠습니다. -
여태까지 소극적으로나마 일단 저항의 의지를 보이던 나타샤와 그녀의 가문인 벨라루스는 그 날을 기점으로 완전히 돌아섰다.
항전을 주장하던 가문들의 요정들은 적으로 간주되어 벨라루스에 접근하려는 기색이 보일 경우 그 즉시 공격을 당할 정도였다.
처음에는 다른 가문들도 결국 그럴 줄 알았다면서, 역시 배신자가 확실했다면서.
벨라루스부터 정리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요정의 고귀함을 빛내며 싸우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게 시간이 지나면서, 정말 ‘멸족’ 할 수도 있다는 걱정이 현실이 되면서.
이제는 많은 요정들도 상황의 심각성을, 그리고 현실성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고귀함이니 명예이니 자존심이니 지껄이고 있지만 그게 목숨을 연명해주지는 않는다.
이미 스스로 그 고귀함이나 명예까지 인간들을 버리는 것으로 깎아 먹어놓고.
이제 와서 그것들을 위해 끝까지 싸우다가 죽자고 하는 건 너무나도 모순적인 것이었다.
-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절대 아니에요. -
- 우리 가문은 벨라루스와 함께 뜻을 함께 하겠습니다. -
- 우리 레인저들도 더는 무모한 싸움에 희생당하는 걸 거부합니다. -
가장 먼저 나타샤와 직접적으로 친분이 있던 자들이 요정들의 결정을 부정했다.
그렇게 죽는다고 해서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데, 이미 수인들조차 항복했는데.
우리들 손으로 명분까지 다 내다버리고 이제 와서 뭘 더 싸우려고 하냐고.
오히려 그만큼이나 마왕이라는 존재에 대한 뛰어낢이 증명된 것이니 우리 요정들도 고개를 숙이고 자비를 구하는 게 순리일 것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당연히 그 말들을 들은 요정들 사이에서는 극심한 소란이 일었다.
과거의 영광에 취해서 여전히 근거 없는 강경파들을 지지하는 세력들과.
1차 대륙 전쟁부터 시작해서 마족들의 강력함, 그리고 인간과 수인들의 지원, 거기에 마왕이라는 압도적인 능력의 군주와 그녀를 따르는 출중한 이들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는 합리적인 온건파들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부딪친 것이다.
여태껏 외부의 힘으로 인해 이런 위기를 겪은 적이 없는 자들이다.
해서 막상 그런 위기가 닥치자 단합을 하는 게 아니라 서로 물고 뜯기에 바빴다.
인간들이 상상하던 그 고귀하던 요정들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위기 상황이란 것을 조우한 적이 없기에, 그 경험 앞에 내던져지니 본성이란 게 튀어나왔다.
다른 이들은 그런 요정들의 본모습을 몰랐을 테지만, 상상도 하지 못 했을 테지만.
클라우스는 이미 몇 번이나 저들의 진짜 모습을 보아왔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
조금 강하게 흔들어주면 인간 귀족들보다도 더욱 추악하게 변하는 것들.
스스로를 고귀하다고 하지만 결국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은 오물만이 가득했다.
당연히 그들의 결정에 저항을 주장하던 요정들은 분노했을 것이다.
요정으로서 마족에게 고개를 숙이자고 하는 것들은 명백한 배신자요, 같은 요정이라고 불리는 것조차 치욕인 자들이라고 하면서 적이라고 규정했을 것이다.
해서 방어선이 돌파당하고 위급한 상황이 바로 앞인데도 역으로 남은 병사들을 되레 안으로 불러들여 안으로 들어오는 입구를 활짝 열어준 셈이 되었다.
“페르디난트 엘세 사령관님을 뵙습니다.”
그리고 벨라루스의 가주인 나타샤는 드디어 ‘공식적’ 으로 동부군을 맞이하게 되었다.
뒤를 이어서 그녀를 따라 항복을 하기로 결정한 요정들이 무장을 해제한 채 공손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
한 번의 전투 이후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없이 말 그대로 무혈입성을 하게 된 페르디난트.
수인들에 이어서 요정들 일부까지 더는 항전을 포기하자 그는 일이 막바지에 다다랐음을 깨달았다.
말에서 내린 그는 수인들을 맞이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항복 의사를 내비치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으려던 나타샤와 다른 요정들을 말린 것.
이 또한 클라우스의 조언이었는데, 수인들과는 다르게 요정들은 적당하게 그들 자신의 자존심을 챙겨주면 오히려 더욱 활발하게 협조하는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했다.
대우를 받고 싶어 하는 자들이니, 그에 맞는 대우를 해준다면 그걸 더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이상한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벨라루스 가문의 가주, 나타샤. 페르디난트 엘세입니다.”
“제대로 싸우지 조차 못 하고 항복을 하려 하는 저희들을 맞이해주셔서 감사해요.”
“아닙니다. 오히려 이길 가능성이 전혀 없는 싸움에서 가문의 요정들과 다른 이들을 구하기 위해 참으로 힘든 결정을 내렸음에 우리가 더 감사함을 표하고 싶습니다.”
페르디난트와 나타샤는 서로의 세력을 대표하여 잠시나마 덕담을 나누었다.
하지만 아직 이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다, 여전히 항전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요정들이 있다.
그들을 정리하지 않는다면 이 넓은 숲에 꺼지지 않은 불길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
해서 페르디난트는 다시금 병력을 모아 자신의 일을 마무리하고자 했다.
“페르디난트님. 수인 측에서 병력을 지원할 수도 있다고 하는데 어찌 할까요.”
“필요 없다고 전해라. 그리고 괜히 까불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고 덧붙여.”
“알겠습니다. 그대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클라우스가 말한 것을 잊지 않고 그대로 행하는 페르디난트였다.
수인들에게는 괜히 약한 모습을 보여서 좋을 것이 단 하나도 없다.
상대방이 나보다 강하다고 생각되면 무조건 고개를 숙이지만, 알고 보니 영 아니라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거꾸로 돌아설 수도 있는 게 바로 그 수인들이다.
카엘라처럼 특별히 충성심이 강한 자들도 물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위로 모시는 이가 강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는다.
클라우스가 그냥 보통의 인간에 불과했다면 아무리 뛰어난 사령관이라고 해도 카엘라가 지금처럼 목숨을 다 바쳐 따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강하기에, 자신을 보호하고 또 따라서 이득을 얻을 수 있기에.
그런 이유로 수인들이 지금의 마족들에게 항복을 했으니 그들의 도움을 받는 건 시기상조다.
“클라우스. 부탁 하나만 하지. 며칠 안으로 카엘라 전사장의 지원 병력이 도착할 거다. 그들을 수인 측 영토로 보내서 확실하게 우리들의 힘을 보이라고 좀 전해주었으면 하는데.”
“그러도록 하지. 넌 얼른 요정들을 전부 마무리하고 오도록 해. 더 늦으면 마왕 전하께 보낼 좋은 소식들에 요정들의 정리 부분을 실을 수가 없거든.”
그 말에 페르디난트는 며칠 안으로 끝내겠다고 하며 병사들을 이끌었다.
이제 이곳에 남은 건 약간의 마족 병사들과 클라우스, 그리고 나타샤와 휘하 요정들이었다.
클라우스가 가장 먼저 지휘 막사로 발걸음을 옮기고. 그 뒤를 따라 나타샤가 들어온다.
그러자 이미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실리가 탄식을 흘리면서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요정 측 지인에게 먼저 다가간다.
“나타샤. 잘 지냈나요?”
“그럼요. 그것보다 분위기가 좀 많이 바뀐 것 같네요. 처음 아카데미에서 봤을 때는 뭐라고 해야 할까, 상당히 본인 멋대로 하려는 기질이 강한 소녀처럼 보였는데.”
“자리가 그곳에 앉는 이의 모습을 만든다고 하잖아요. 언제까지 그런 모습으로 있을 수는 없었어요. 나타샤 말대로, 나는 동부의 레블랑 가문을 책임지는 가주이니까.”
“그렇군요.”
“나야말로 소식 들었어요. 벨라루스 측 가주가 되었다고요?”
세실리의 말에 나타샤는 미소를 지으면서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종족은 다르지만, 하나의 거대한 가문을 책임져야 하는 의무를 지니게 된 서로다.
거기에서 나오는 동질감, 그리고 같은 남자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부분까지 겹치니 이상하게 둘은 서로가 예전보다도 조금 더 가깝게 느껴졌다.
“둘이서 뭐하냐. 난 이상한 취향에 눈 뜬 여자들 데리고 있는 취미 따위는 없어.”
상석에 앉아서 나타샤와 세실리를 바라보며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그리 중얼거리는 클라우스.
그 바람에 두 여인은 아! 하고 탄식을 흘리더니 다급히 서로에게서 멀어져서는 제각각 클라우스의 오른쪽과 왼쪽에 자리했다.
덕분에 잠깐이나마 마음에 머물던 동질감은 사라지고, 곧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지분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해야 하는 사이임을 직감하게 되었다.
“세실리.”
“네, 클라우스님.”
“일대를 돌면서 요정들이 미리 설치해두었을 마법진부터 해제해라. 분명 뭐라도 어떻게 해보겠다고 허튼짓을 한 놈들이 있다. 예로 들자면 숲에 불을 내는 마법이라던가.”
“아… 어쩐지 아까부터 일대에서 상당히 이상한 기운이 느껴진다 했는데, 그것이었군요.”
“그 말이 사실인가요? 숲에 불을 내는 마법진을 설치했다고요?”
화들짝 놀란 나타샤가 그게 정말이냐는 듯 반문한다.
클라우스나 세실리와는 다르게 나타샤는 아직 마법 부분에 있어 최고의 실력을 지녔다고 하기에는 모자란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해서 요정들이 몰래 설치해둔 마법진의 존재를 모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극악의 상황을 맞이한 적이 없으니 별짓을 다 하게 되는 거지. 그렇게 스스로를 고귀하다, 대단하다 뭐 온갖 미사어구를 가져다 붙였지만 이게 한계인 거다.”
“…멍청한 놈들. 어찌 되었든 결국 요정들이 살아갈 터전인데 불을 지르겠다니….”
“그러니 더더욱 이렇게 사이를 갈라서 확실하게 나눠야지. 그래야 죽여 없애야 할 놈과 살아서 요정들의 세상을 다시금 가꿀 이들로 볼 수 있을 테니까.”
나타샤를 이용해 요정들의 사회를 최대한 흔들고 분열시킨 이유.
대륙 통일 이후 율리아의 통치가 아직 닿기 전에 그 틈을 노려 허튼 짓을 할 수 있는 자들을 미리 솎아내기 위함이었다.
왕국은 비교적 거리가 가깝기에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바로 대비할 수 있지만 이곳, 수인들과 요정들이 머무는 서부의 끝자락은 다르다.
병력이 출발해도 최소한 몇 주는 걸리는 거리이고, 거기에 이곳에 병력을 상시배치하자니 고향과 너무 멀어진 병사들이 자칫 흐트러질 수도 있다.
때문에 반란의 가능성이 제로에 수렴하도록 만들어 두어야 한다.
수인들에게는 확실한 충성을 받아내고, 요정들에게는 협조를 얻어낸다.
어차피 이들도 왕국처럼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보장받게 될 터이니 문제는 없다.
종족이 다른 세상을 억지로 하나로 뒤섞으려고 해봤자 반발심만 살 뿐이다.
가장 먼저 비록 종족은 다르나 결국 하나의 왕을 모시는 하나의 국가 아래 하나의 일원이라는 인식응 심어주는 게 최선이었다.
“나타샤. 마법진 해제는 세실리에게 맡기고 다른 일에 집중해라. 당장은 고개를 숙였지만 또 어떤 요정이 앙큼한 생각을 품고 다른 짓을 하려고 할지 모르니까.”
“네, 알겠습니다.”
알려져 있는 것과 달리, 요정들은 상당히 구린내가 진동하는 자들이다.
항복한 자들 사이에 끼어들어서 뭔가를 노리고 있는 요정들이 있음을, 클라우스는 알고 있다.
지금 당장 그들을 잡아 족칠 수도 있지만 그리 하면 기껏 항복한 나타샤와 그 곁의 요정들이 무척 난감해지니 그들이 끝을 맺을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