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4화 〉 29장 - 머지않았다
수인들의 항복 절차는 아주 간단했다.
부족장들과 부족 내의 강하다는 전사들이 나와서는 꼬리를 말고, 귀를 바짝 접은 채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더는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원래는 페르디난트가 바로 그들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클라우스는 그를 말렸다.
수인들에게 있어서 저 항복 의사는 단순히 한 세력의 항복만이 아니라, 이제는 함부로 이를 드러내지 않겠다는 완벽한 굴복의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괜히 저걸 말리면 기껏 강자로 인정한 수인들이 이상하다고 여길 수 있다.
동물끼리 서로의 서열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이는 것은 넘어가서는 안 되는 문제, 무리의 중심이 되는 존재라면 응당 끝까지 전부 지켜봐야 하는 것이니 수인들을 말려서 좋을 게 없었다.
왕국이나 제국, 그리고 요정들에게는 자비심을 보이는 편이 좋다고 하지만.
수인들에게는 그 자비심이 오히려 독이 될 확률이 매우 높다.
반대로 이들에게는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빡빡하게 대하는 편이 좋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병사 전원이 완전 무장을 갖춘 채 살기가 가득한 상태로 수인들을 맞이했고.
페르디난트 옆에는 클라우스가 역시 창을 든 채 턱을 괸 채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마왕 전하 앞에서는 이보다 더 바짝 조아려야 할 것이다. 너희들의 항복 소식을 받으셨으니 아마 곧장 이곳까지 오시겠지. 허튼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페르디난트의 말에 수인들은 여부가 있겠냐는 듯 침묵으로 일관했다.
일단 서열이 확실해지면 절대 이빨을 드러내지 않는 게 저들의 본능이다.
클라우스는 그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기에 수인들에게만큼은 일절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저들보다 자신이, 동부가 압도적으로 위에 있음을 알려주고 빠르게 굴복시킨다.
괜히 연약한 마음이 들어 조금이라도 풀어주면 개는 주인을 물기 마련이다.
항복을 받아들인 페르디난트는 이제 요정들과 결판을 내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뒤를 따라 대부분의 부관들이 그를 따라나서고, 이제 남은 건 클라우스 하나뿐이었다.
“….”
“….”
여전히 수인들은 바짝 몸을 엎드린 채 미동도 하고 있지 않았다.
항복은 여기 있는 페르디난트에게 한 것이지만, 실상은 저 남자에게 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웃으면서 자신들을 무참하게 도륙한 저 무시무시한 괴물.
그 모습을 생각하면 부족장도, 전사들도 감히 더는 대항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저 남자가 가장 위도 아니고, 그가 따르는 왕이 따로 있단다.
마왕, 동부의 지배자, 이제는 서부마저 손에 쥐고 대륙 통일을 눈앞에 둔 여인.
그렇게 생각하니 수인들도 이제는 더 버틸 수가 없음을 직감했다.
단순히 살고 싶어서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절대 아니다.
싸워서 자신의 서열을 공고히 하고 싶다는 욕망과 함께 수인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욕망.
그건 자신들이 인정한 지배자에게 복종하고 안전을 꾀하고 싶은 것이기도 했다.
“알아서 잘 하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말한다.”
“….”
“잘 해라. 그녀의 뜻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짓을 한다면.”
텅-.
창대로 가볍게 땅을 내려치면서, 클라우스가 아주 환한 미소를 짓는다.
물론 수인들 입장에서는 그 웃음이 절대 좋은 뜻이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다 찢어죽일 거다. 한 놈도 빠짐없이. 말 그대로 멸종하는 거야. 사이좋게.”
종의 보전은 수인들이 특히 집착하는 부분 중 하나.
당장 카엘라도 다른 유혹들은 다 이겨내면서 발정기 때 찾아오는 종족 보전의 욕망은 이겨내지 못 하고 제 안에 씨를 남겨달라며 미친 듯이 달라붙곤 했다.
그렇기에 수인들은 더더욱 클라우스에게 공포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저 남자라면 분명 그리 할 것이다.
웃으면서 수인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죽여 없앨 것이다.
멸족하는 것이다, 여태껏 잘 살아온 수인이 저 창 앞에 핏덩이가 되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강해지며 그들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조아렸다.
‘이걸 여태 요정들도, 인간들도, 마족들도 전부 못 했지. 수인들은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빠져서 정작 그 녀석들이 어떤 본능에 따르는 건지 알지 못 했어.’
몇 번의 회차를 거치며, 그리고 카엘라라는 좋은 표본을 옆에 두고 있었기에.
클라우스는 보다 먼저 그 점들을 알아차릴 수 있었고 가장 적절한 시기에 극악의 공포를 알려주는 것으로서 저들의 굴복을 받아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아직도 자신들에게 희망이 있다고 믿는 요정들을 깔아뭉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요정들에게는 수인들과 같은 자비가, 아쉽게도 없을 예정이었다.
나타샤나 그녀를 지지하는 요정들은 물론 기회를 얻을 테지만, 그녀에게 속하기를 거부한 자들은 결국 시한폭탄과도 같은 존재들이니 깡그리 말살하는 게 최고였다.
수인들의 항복과 동시에 페르디난트는 다시금 진격 명령을 내렸다.
이번에도 요정들은 평소와 똑같이 저항을 했지만 이제는 승부를 봐야 하는 시기였기에 마족 측도 물러서지 않고 계속해서 병력을 투입했다.
적들이 이번 기회에 완전히 끝을 내려한다는 걸 깨달은 요정들이 마법을 준비하던 찰나.
그들의 마법사들이 있는 곳에 그대로 시퍼런 마력들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갑작스러운 대마법 전개에 사방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고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경계를 넘은 마족 병사들은 진형을 유지한 채 이제는 눈으로 보일 정도까지 가까워진 요정들에게로 육박해 들어갔다.
“고생했네. 밤새 달려서 데리고 온 보람이 있어.”
“아, 네, 네. 업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대마법이라면 클라우스 역시 어렵지 않게 펼쳐낼 수 있다.
하지만 이 전쟁 이후로 딱히 커다란 전쟁이 벌어질 일은 없고, 그 전에 저마다 자신만의 공훈을 확실하게 세워두어야 차후 흔들림 없이 지낼 수 있다.
해서 클라우스는 수인 전사들을 격멸한 직후 이쪽으로 오고 있을 카엘라와 세실리에게로 달려가서 일단 세실리부터 데리고 오는 방법을 택했다.
‘마법’ 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 세실리가 가장 먼저 떠오르게 한다.
그렇게 해서 그녀만의 공고한 위치를 확립시키는 것이 클라우스의 진정한 목적.
때문에 밤새 달리는 수고마저 감내하고 만 것이었다.
“….”
레블랑 가문의 가주라고 해서 복식을 차려입으니 이전의 소녀스러운 기운은 거의 다 사라지고 이제는 완연한 여인의 느낌이 물씬 풍기고 있다.
그럼에도 세실리는 여전히 부끄러워 죽겠다는 듯 몸을 배배 꼬고 있었다.
물론 저 모습은 클라우스 앞에서만 보이는 것, 나머지 이들에게는 약간은 드센 모습을 유감없이 보이곤 하는 레블랑의 신임 가주라고 할 수 있었다.
“요정들의 마법사들은 얼마나 제거된 것 같지?”
“방금 전 공격으로 최소한 반수는 운신 불가일 거예요. 이쪽이 대마법 전개를 할 줄 몰랐던 탓인지 마력들을 너무 확실하게 모아서 정확하게 위치를 포착할 수 있었거든요.”
“조금 아쉽네. 반이 아니라 거의 전부를 원했는데. 그동안 노력한다고 하더니 늦장이라도 부린 건 아니겠지? 믿고 왕국 잔당 소탕을 보냈는데 시간을 허비한 것 같단 말이야.”
“저, 절대 아니에요! 그, 그건….”
“그러니까 네가 골라, 세실리. 네 성장에 대한 칭찬을 받고 싶은지. 아니면 여전히 내 기대에 못 미치는 것에 대한 벌을 받고 싶은지.”
무슨 답이 나올지 뻔한 것임에도, 클라우스는 굳이 질문을 던졌다.
그 은근한 어조에 세실리는 잠시 으으으! 하고 신음을 흘리다가 조심스레 주변을 살핀다.
이제는 레블랑 가문의 철부지 막내도 아니고, 그 거대한 가문을 이끄는 가주에.
심지어 마왕 휘하에서 마법으로는 제일가는 실력을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자신의 성향을 버리지 못 한 모양이었다.
“제, 제가 못 한 건 사실이니까… 칭찬보다는 벌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정말이냐? 후회하지 않겠어? 그냥 칭찬 좀 받고 싶다고 해도 괜찮아.”
“아니에요. 제 부족한 점을 지적해주시는 건 클라우스님 밖에 없으니까… 칭찬은 마왕 전하께 듣고, 지적은 클라우스님한테 들을게요. 그러니까 벌을 내려주세요.”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그렇게 중얼거리는 세실리였다.
충성은 마왕에게 바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클라우스를 뒤로 밀어두는 건 절대 아니다.
그런 말을 세실리는 애써 돌려서 말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타샤는 물론이고 리르보다도 덜 건드렸음에도 오히려 그녀들보다 더 한 존재가 되었다.
아무튼 안에 잠들어 있는 성향을 끄집어내서 각성을 시키면 그게 누가 되었든 꼼짝도 못 하게 할 수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자각하면서.
클라우스는 요정들까지 전부 마무리가 되고 율리아가 공식적으로 대륙 통일을 선포했을 때 그동안의 부족한 점까지 전부 합산해서 벌을 주겠다고 차갑게 중얼거렸다.
원래 이런 식이라면 다른 이들 같은 경우 겁을 먹는다거나.
그게 아니면 조금은 축 늘어진 표정이라도 짓는 게 당연할 터인데.
세실리는 그 말에 네! 하고 빙긋 웃음을 짓더니 무척이나 기대가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쟤는 아마도 저 상태에서 영원히 안 바뀌겠지.’
고개를 내저으면서 클라우스는 페르디난트 휘하 동부군의 진격을 바라보았다.
세실리가 요정 측 마법사들을 일격에 반 이상 행동 불가로 만들어 버리면서 기껏 화살들로 뭉친 마족 병사들을 일격에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이 전부 사라졌다.
마족 병사들이 진격해오자 요정들은 그래도 아직은 제정신을 차리고 있는 듯 일부는 그들의 진격을 방해하면서, 나머지는 일사불란하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저기까지 보면 요정들이 쉽사리 무너질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자존심이 강한 자들은 대부분이 끝까지 패배를 인정하지 못 하고 그냥 끝까지 싸우다가 죽는 방법을 택하기도 하고,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 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내부가 똘똘 뭉쳐있다거나, 아니면 그냥 사회 전체가 미쳐있다거나.
이 둘 중 하나가 되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현재 요정들 쪽에는 클라우스가 예전부터 심어둔 이쪽의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나서는 요정 사회라는 거대하고 단단한 바위에 금을 가게 만든 후였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클라우스님?”
“나타샤가 움직일 거다. 수인들도 항복했고, 본인들 손으로 인간들까지 쳐내서 명분까지 잃었는데 여기서 더 싸워서 뭐하느냐고. 당신네들이 계속 이 미련한 짓을 할 거라면 차라리 동족임을 포기하겠다고 말하면서 벨라루스의 이들을 데리고 항복할 거라고 말이야.”
“다른 요정들이 그걸 가만히 지켜볼까요? 자신들의 고귀함을 위해서는 동족도 해친다는 소리를 얼핏 들은 것 같은데.”
“벨라루스만 그렇게 행동하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타샤가 알게 모르게 여기저기 손을 많이 뻗쳐두었거든. 장담하건데 그 말이 흘러나가면 많은 요정들이 그에 동조할 거다. 원래 사회에 휩쓸려서 하는 이들 중에는, 본인들 목숨이 가장 소중한 이들이 많은 법이거든.”
“…뭔가 일이 엄청나게 빠르고 또 쉽게 진행되는 것 같아요. 왕국도 그렇고, 수인에 요정들까지. 이렇게 쉽게 무너질 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
쉽게, 쉽게라. 클라우스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확실히 지금의 저들에게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의 이 모든 상황은 여태까지의 ‘실패’ 로 인해 축적된 경험의 결과물들.
누군가에는 이상하리만큼 쉬워 보이는 일들이, 자신에게는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면서 몇 번이고 절망하고 고통스러워하면서 끝내 도달하고야 만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모든 일들이 쉽게 풀리지 않으면, 내가 억울해서 죽어버릴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