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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가 비선실세-303화 (303/341)

〈 303화 〉 29장 - 머지않았다

페르디난트는 며칠 사이에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보다 더 심각하고, 보다 더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거라고 했던 클라우스가 떠오른다.

처음에는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데, 이제 보니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게 되었다.

살려달라고 온갖 괴성을 지르면서 질질 끌려온 인간 귀족들.

왕국이 무너질 때 본인들만 살겠다고 약간의 기사들과 병사들, 그리고 식솔들을 챙겨서 제국을 지나 요정들의 영토까지 도망쳤던 자들이 분명했다.

제 땅과 재산들은 물론이고 귀족 자리와 왕까지 내던지고 도망친 자들.

이 전쟁에서 패해도 죽고 설사 승리한다고 해도 결코 설 자리가 없을 터인데.

그저 살겠다고 모든 걸 내팽겨 치고 내뺀 자들을 대다수의 마족들과 인간들이 비웃었다.

거기까지만 본다면 형편없는 멍청이들이 분명하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들은 왕국의 실질적인 지배층이었고 나름 정통성도 있었다.

최소한 무력으로 들이친 마족보다야 원래부터 지배하고 있던 귀족들이 명분상에서는 더 우위에 있을 터이니 그들을 이용하여 서부를 되찾는다는 기지를 내걸 수도 있었다.

‘나름 귀족들이니까, 왕국의 지배층이었으니까 명분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요정들이 끝까지 데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헌데 요정들은 이전 전투에서 남은 인간 귀족들의 병사들을 모조리 미끼로 쓰고.

이번에는 아예 자신들이 데리고 있던 인간 귀족들을 전부 마족들에게 넘겼다.

마족의 손아귀에 들어온 귀족들에게 어떤 운명이 펼쳐질지 뻔히 알면서 말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가 싶었던 페르디난트는 곧 은밀하게 서신 하나를 전달 받았다.

일부 요정들은 여전히 저항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으나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라고.

그쪽이 먼저 다시금 화해의 제스쳐를 취해주면 이쪽에서도 호응할 이유가 생긴다고.

그러니까 잠시 군을 물려주고 시간을 조금만 내어주면 안 되겠냐고 말이다.

그 비밀 서신을 받아든 순간 페르디난트는 직감했다.

요정들 내부가 예상보다도 더욱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다는 것과.

적이 바로 눈앞에 와있음에도 거기에 집중을 하지 못 할 정도로 갈라졌다는 것을.

자신들이 예상했던 것보다도 요정이란 종족이 상당히 약하다는 것까지 말이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요정들의 상황이긴 했다.

왕국은 예상과는 다르게 너무나 빠르게 무너졌고, 믿었던 수인들은 거의 대부분의 전사들을 잃은 채 자신들의 땅조차 막는 게 힘들 정도가 되었다.

자신들에게로 숨어든 인간 귀족들은 짐덩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즉 이들은 이제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바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말했잖아. 보다 더 심각해질 거라고.”

지휘 막사에 찾아와서 차를 마시던 클라우스가 입을 연다.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이라도 했다는 듯, 그는 너무나도 여유로운 모습이다.

도대체 어떻게 안 것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래봤자 돌아오는 대답은 이해 못 할 것이 분명했기에 페르디난트는 질문을 하는 걸 포기했다.

자칭 서쪽에서 가장 고귀하다는 종족인 요정들이 인간들을 죽으라고 버린 것도 놀랍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바로 조금 전 벌어졌으니까 말이다.

“…수인들이 은밀하게 항복을 요청할 줄은 정말 몰랐다.”

“여태 단 한 번도 항복이란 걸 한 적이 없는 야수들이라서?”

“그래. 1차 대륙 전쟁에서는 물론이고 당장 멀리 갈 것도 없이 이전 전투에서 그대와 마왕 전하께서 붙잡았다는 포로들도 모두가 부상으로 운신이 불가능해서 잡힌 자들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만큼 스스로 전투 의지를 내려놓고 패배를 시인하는 게 희귀한 종족. 그게 바로 우리가 알고 있던 수인들이지.”

페르디난트의 말대로, 수인들은 어떤 순간에서도 자의로 전투를 포기한 적이 없었다.

수인 전사가 전투에 더는 나서지 않는다면 이미 승리가 정해져서, 혹은 상대방이 죽어버려서.

그도 아니라면 몸을 더는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다쳐서, 그게 이유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모든 전사들이, 모든 상황에서 그러는 건 아니다.

가끔 가다가 자신이 절대 넘어설 수 없는 적임을 인정하고 항복하는 경우가 더러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아주 가끔 가다, 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일정 실력 이상의 수인 전사들에게서 굴복을 받아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실력을 지닌 이들이 대륙에 몇 없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 그 수인들이 은밀하게 항복 요청을 해왔어. 도대체 이게 무슨….”

“내가 또 말했을 텐데? 재미있는 일도 있을 거라고.”

수인들은 결코 항복하지 않는다, 맞는 말이긴 하다.

실제로 ‘무력’ 에 있어서는 요정들은 물론이고 마족들조차 근소하게 앞서는 종족이니까.

특히 수인 전사들은 마족 측 정예병들과 맞먹을 정도로 엄청난 실력을 자랑하기도 했다.

헌데 그들 중 정예들은 이전 전투에서 모조리 소진되었다.

이후 다시금 모은 전사들은 기습이라는 전략을 감행했음에도 오히려 역으로 공격을 당해서 말 그대로 깨끗하게 털리는 위업을 달성하고 말았다.

심지어 적은 단 하나, 그것도 마족도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인간 남자 하나였다.

그 인간에게서 수인 전사들은 공통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두려움, 혹은 공포. 여태껏 단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었던 이질적인 무언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싸우는 것이 바로 수인 전사들이다.

그들의 본능이 제 몸이 다 찢어지고 부서질 때까지 싸우도록 정해졌기에 그렇다.

허나 그 본능 안에는 또 다른 뭔가가 함께 존재하고 있다.

짐승으로서, 동물로서 가지고 있는 그 본능은 강자 앞에 굴복하고 마는 순응.

그렇게나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우다가도 상대방을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강자라고 인식하게 되면 그 투쟁심은 전부 사라지고 새로운 무리의 리더를 따르려는 경향이 강해진다.

바로 그 부분 때문에 카엘라가 제 종족들조차 저버리고 클라우스를 따르는 것이기도 했다.

“수인 놈들이 여태까지 그렇게나 지랄 맞게 싸우고 저항한 이유. 간단해. 이렇게 싸워서 충분히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당장 1차 대륙 전쟁에서는 왕국에서 전쟁이 끝났고 이번 전쟁도 어떻게 저항 좀 하면 결국 자신들의 무력을 인정하고 협상으로 끝날 것이라는 요정들의 사탕발림이 있었을 거다.”

“헌데 이제는 그게 아니다, 이런 말인가?”

“그리도 자랑하는 전사들이 인간 하나한테 말 그대로 ‘몰살’을 당했는데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 그건 네가 알아서 상상해봐, 페르디난트.”

“….”

그러고 보니 클라우스가 싸웠다는 현장을 페르디난트도 둘러보긴 했다.

어찌나 참혹한지 어지간한 전장은 다 돌았던 부관들마저 고개를 돌렸을 정도.

그 속에서 다 죽어가는 수인의 목을 쥐고 있던 클라우스는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기억하기로 1차 대륙 전쟁에서는 저런 모습을 보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물론 앞에 나서서 싸운 적은 있지만 저 정도로 끔찍한 모습을 보인 적은 단언하건데 없었다.

오히려 적임에도 굉장히 자비롭고 합리적인 면모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해서 미친 척 하고 만남을 청했던 자신을 받아주기도 했고.

또 포로가 되었던 팔라티나트의 이들도 풀어준 전적이 있지 않았던가.

‘피를 보는 걸 주저하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로 잔혹했던 적은 없는 것 같은데.’

페르디난트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클라우스는 미소를 지으면서 잔을 마저 비워냈다.

저 남자는 과거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그가 어떤 계기로 변하게 되었는가, 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테지만 실상은 완전히 틀렸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은 원래부터 이런 놈이었다, 대륙 전쟁의 영웅이니 왕국을 구한 자이니, 그건 전부 여태까지의 이 길들을 닦아놓기 위한 위장에 불과했다.

그 때야 서부에는 굉장한 능력자이자 또 인격자로서 비칠 필요가 있었고.

동시에 동부에도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결과를 남겨두어야 차후 마족들에게 넘어갈 때도 별 다른 반대 없이 부드럽게 일이 진행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게 그렇게 보일 이유 따위는 전혀 없다.

수인들은 요정들보다 더 본성을 따르고, 그 본성은 ‘강자에 대한 예우’ 에서 나온다.

그래도 여태까지는 전사 집단이 개인보다 더 강했기에 여태껏 버틴 것이라고 하지만.

클라우스가 직접 나서서 그까짓 전사 집단이 몇이나 오든 혼자서 개박살을 낼 수 있다는 걸 저들의 뇌리에 각인시켜두었다.

‘짐승은 상대의 빈틈이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끝까지 싸우지만, 자신이 절대 넘어설 수 없는 강한 존재라고 인정하면 어떤 이보다도 순종적인 존재가 되는 법이지.’

카엘라가 자신과 몇 번 부딪친 이후 여태까지 변하지 않는 충성을 바치는 이유.

여러 가지 요인들이 물론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수인들의 본성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강자라고 인정하면 무엇이 되었든 그에 대한 순응이 모든 것을 앞선다.

이때까지는 요정도, 인간도, 마족도 딱히 그런 강함을 보여주지 못 했지만.

이번 전쟁으로 이제는 수인들도 알게 되었다. 이제는 대세가 그들에게 완전히 넘어갔음을.

더해서 감히 말로 표현조차 못 할 강자가 그들 사이에 있다는 것을!

“슬슬 답을 보내야 하지 않나? 망설임은 수인들에게 있어서 겁을 먹었다는 것과 비슷하게 보일 텐데. 기껏 청한 항복인데 그걸 무를 생각은 아니겠지?”

“…속임수일 가능성도 있지 않나?”

“그럴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지만 구석에 몰린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수인들의 항복을 믿느냐 마느냐는 네 결정이다. 지금 사령관은 내가 아니라 페르디난트, 바로 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인들의 특사로 찾아온 전사 하나가 치욕을 견디면서 답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기껏 항복을 택한 자들이 괜히 그 생각을 바꾸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 했다.

잠시 생각에 잠긴 페르디난트는 문득 클라우스 옆에 있던 신임 전사장, 카엘라를 떠올렸다.

요정들 못지않게 인간을 무시하고 마족들을 싫어하던 수인임에도 인간인 클라우스에게, 그리고 마족인 율리아에게 바치는 절대적인 충성심.

“…수인 측에서 찾아왔다고 하는 그 특사 말이야. 내가 한 번 직접 봐야겠군.”

“마음대로 해. 다녀와.”

자리에서 일어난 페르디난트가 걸음을 옮겨 지휘 막사를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클라우스는 일이 제 계획대로 잘 풀려서 기분이 좋은 듯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수인들은 강자에 대한 복종을 당연시 하지만, 동시에 그 강자가 복종을 맹세한 자신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대해서도 꽤나 민감하게 반응한다.

강자가 자신들을 험하게 대하면 결국 본인들의 생존 보장에 위협을 받는 것이니 나중에는 뜻을 바꿔서 배신을 할 수도 있다.

강자에 대한 복종 본능보다도 생존에 대한 욕망이 더 클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하다.

그 말은, 반대로 그들을 충분히 대우해주면서 이 밑에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준다면 그 사납던 짐승들이 곧 집을 아주 잘 지키는 순한 동물이 된다는 말이었다.

‘이제 요정들만 불쌍하지. 정확히는, 나타샤에게 반발하는 자존심 높으신 귀쟁이 놈들만 불쌍하게 되었다고 해야 하려나.’

당연히 자신들과 함께 저항할 거라고 믿었던 수인들이 항복했다는 게 알려지면.

나타샤는 독자 노선을 걷겠다고 했으니 자연스럽게 항복 요청을 할 것이고 온건파 역시 바로 그에 맞춰서 움직일 것이다.

남은 근거도 없이 그저 강경하게 나서고 있던, 말 그대로 멍청한 귀쟁이들 뿐이었다.

‘이제 정말로 머지않았군.’

요정들까지 정리가 되면 얼른 왕국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늦장을 부린다면 장담하건데 율리아가 찾아올 게 분명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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