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2화 〉 29장 - 머지않았다
아군의 패배가 전해지자 요정 사회에서는 또 한바탕 난리가 났다.
수인들이 기습을 했다가 역으로 공격을 당해서 전사의 태반을 잃은 상황인데.
그 급박한 때에 겨우 잡은 반격의 실마리마저 놓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것도. 적들에게 큰 피해를 입혀 공세를 늦추는 것도 전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모두가 초조해하는 마당에 그들의 불편한 심기에 불을 지필 일이 또 일어났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왜 우리 병사들만 모조리 당한 것입니까!”
“이럴 수는 없습니다, 요정들이여. 아무리 봐도 이상하단 말입니다.”
왕국 측 귀족들이 이곳까지 피신하면서 데리고 온 천여 명의 병사들이 모조리 몰살당했다.
요정들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다고 하는데 이상하게 인간들만 화를 당한 것이다.
심지어 항복을 하고 포로가 되고자 하는 자들마저 마족들은 가차 없이 죽여 버렸단다.
거기에 항의를 하니 마족들은 기가 막히다는 반응과 함께 이런 대답을 보내왔다.
- 너희들이 버려놓고 우리가 치워주니 이제는 치웠다고 뭐라 하는 거냐? -
그 말을 듣자 요정들은 마족들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한다는 자들과.
반대로 이게 무슨 말이냐며, 버렸다는 게 혹시 전장에 있는 요정들이 인간들을 미끼로 내던지고 자신들만 살아남은 것이냐며 날을 세웠다.
같은 요정이, 동족이 살기 위해서 다른 종족을 버린 게 뭐 대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그 요정들이 스스로를 서부에서, 아니 대륙에서 가장 잘나고 고귀한 종족이라고 입이 닳도록 떠들고 다녔다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긍지이자 명예이며 이렇게 열심히 저항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너희보다 나은 존재다, 인간이나 수인, 마족보다 훨씬 월등한 종족이다.
그 믿음 하나에 모든 요정들이 똘똘 뭉쳐서 여태껏 살아왔고 또 이제껏 싸워왔다.
그런데 만약 살겠다고 인간들을 미끼로 내던진 것이 사실이라면.
살기 위해서 여기까지 온, 요정들의 말에 따르면 보살피는 것이 당연하다는 하등 종족을 그렇게나 우월한 요정들이 이용만 하다가 버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본인들의 긍지와 명예를 스스로 걷어 차버린 것이다, 이렇게 볼 수 있었다.
“전쟁 중이오! 병사들 좀 희생시킬 수 있는 거지 뭘 그리 물고 늘어진답니까!”
“어리석기는! 여태까지 우리 종족들이 이런 외진 곳에 박혀있으면서도 버틴 이유가 뭐겠소! 우리가 저들보다 더 고귀하다, 우월하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는데! 배신을 저들이 해도 모자랄 판국에 우리가 먼저 배신을 하다니 이게 무슨 망신이란 말이오!!”
“그대들이야말로 참으로 속 편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겁니다. 아군의 소중한 전력을 보전하기 위해서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는데.”
“바보 같은 소리! 전쟁은 명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마족들에게 패하면서도 그 의지가 꺾이지 않은 것도, 우리가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명분이 있어서였죠! 왕국을 돕는다, 제국을 돕는다, 인간들을 우리들이 구한다! 이 명분 말입니다! 그런데 그 명분을 이제는 우리 스스로 걷어찬 꼴이 되었으니 마족들보다도 못 한 놈들이 되었어요!!”
개개인간의 갈등에서도 명분은 꽤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하물며 이렇게 거대한 집단과 집단이 싸울 때 명분의 중요성은 백 번 말해도 모자람이 없다.
누군가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 때문에 최악의 상황에 몰려도 싸울 의지를 잃지 않기도 하고, 때로는 다 이긴 상황에서도 정작 싸울 의지를 잃어서 역전의 발판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여러 가문의 요정들이 이렇게 불같이 화를 내는 이유도 그러하다.
요정 사회에 어디 자신들처럼 잘 나가는 가문의 요정들만 있는가? 그저 그런 가문에 속한 이들도 있고,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는 요정들이 절대 다수를 이루고 있기도 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요정이라는 자부심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자꾸 이상한 소리 할 거면 닥치시오! 이기는 게 중요하단 말입니다! 그들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우리 동족들이 죽었을 거란 말이오! 현장도 모르는 주제에 그런 말을 하는 거요!”
여전히 강경파가 득세를 하고 있는 까닭에, 그들의 목소리가 훨씬 컸다.
전쟁 중인데 인간 병사들이 희생을 해서 그나마 전력으로 중요한 요정들을 살린 것이라고.
그런 부분조차 받아들일 수 없으면 애당초 이 전쟁인 시작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당장 우리들 땅에 마족들이 들어왔는데 이거고 자시고 가릴 처지가 아니라고 말이다.
맞는 말이긴 했다, 어찌 되었든 살아남아야 명분이든 뭐든 지닐 수 있는 것이니까.
하지만 현재 요정들 사이에는 목숨을 부지하고자 찾아온 인간 측 귀족들이 있다.
이들은 요정들을 믿고서 여기까지 도망친 것인데 그나마 남아있던 병사들을 모조리 잃었으니 이제는 자신들의 안위마저 스스로 지킬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들의 불안감은 배가 되었고 불평불만은 나날이 늘어갔다.
이윽고 서로의 감정이 격해진지 고작 며칠 만에 사달이 나고야 말았다.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을, 이럴 바에 차라리 마족들에게 항복하여 이쪽의 정보라도 조금 쥐어주고 살 길을 도모하는 편이 낫겠다는 말을 한 인간이 내뱉고 만 것이다.
“이것들이 감히 받아준 은혜도 모르고!”
“아, 아니. 이건 그냥 홧김에 나온 말이요! 마족들이 귀족들의 항복을 거의 받아주지 않는다는 걸 우리가 뻔히 아는데! 정말입니다! 믿어주셔야 합니다!”
요정들을 살리겠다고 겨우 남은 자신의 수족들을 없애버린 요정들이 밉기는 했을 거다.
하지만 귀족들도 귀라는 게 있기에, 한 번 적대적인 모습을 보인 왕국의 귀족들이 이후 항복을 한다고 해도 어떤 대접을 받게 되는지 확실히 알고 있다.
믿고 있던 요정들이 자신의 병사들을 소모품마냥 내다버렸으니 화가 났을 만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뱉지 말아야 하는 말이 있는데, 그걸 그대로 내뱉은 것이다.
주변에 남은이라곤 호위 기사 몇이 전부인 귀족들은 열심히 자신들을 변호했다.
그럼에도 요정들의 시선이 곱지 않자 그들 스스로 그런 말을 한 귀족을 붙잡아서 직접 죽인 후 자신들은 서부 연합의 일원이며 게속 마족들과 싸울 것을 맹세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인간들이 온 이후로 계속 균열이 나고 있지 않습니까.”
“받아준 것만 해도, 이후 먹여주고 재워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놈들이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을 했습니다. 이건 명백한 배신 의사입니다. 우리가 침묵해봤자 의미가 없습니다.”
“온건파 놈들은 우리 스스로 명분을 깎아먹고 있다고 하지만 이제는 이판사판입니다. 우리의 승리에 조금이라도 걸림돌이 될 것 같은 자들은 모조리 쳐내야 합니다.”
이미 온건파 쪽 요정들과도 상당히 불편한 관계가 되어버린 자신들이다.
하물며 요정들의 영토에서 그따위 망발을 지껄인 인간들을 봐줄 이유 따위는 전혀 없었다.
결정을 내리자마자 요정들은 거침없이 행동했다.
자신들에게로 도망쳐 들어온 왕국의 귀족들, 요제프 대공을 위시한 귀족파 인원들이 모조리 붙잡혀서 강경파 요정들 앞으로 끌려간 것이었다.
심지어 그들 옆에는 온건파 측 요정들까지 자리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간들을 왜 내쳤냐면서 목소리를 높이던 자들인데.
해서 인간 귀족들이 은근히 그들에게 기대어서 어떻게 자신들의 목숨이라도 더 보전하려고 참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요정들이여. 우리들은, 우리들은 동맹이 아닙니까!”
“동맹은 서로 대등한 선에 있는 자들이나 맺는 거다. 제 땅조차 못 지키고 여기까지 도망친 주제에 참으로 말들이 많군. 심지어 여기까지 와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어도 모자랄 판국에 감히 해서는 안 되는 말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 일은 사죄하지 않았습니까! 그 말을 한 귀족의 목을 보내기까지 했는데!”
“이미 늦었다. 그리고 오히려 너희 덕분에 숨통이 트였다. 계속되는 패배와 인간들을 내쳤다는 것으로 인해 사기가 많이 꺾였는데, 알고 보니 너희들이 배신자였다고 한다면 역으로 동족들이 분기탱천하여 최선을 다하겠지.”
그제야 요제프 대공은 이 요정들이 이미 갈 때까지 다 갔다는 걸 깨달았다.
서부 연합은 왕국이 무너지고 제국이 박살나는 바로 그 순간 이미 끝이 났다.
저들은 이제 서부가 아니라 자신들의 안위만을 위해서 싸울 뿐이다.
귀족들은 마지막으로 온건파 요정들에게 매달리기로 했다.
살려고 찾아온 인간들을 내치는 것이 명분상에서 얼마나 큰 마이너스 요소가 되는지 잘 알고 있는 자들이니 설득이 좀 될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온건파 측 요정들의 차가운 목소리뿐이었다.
“그대들을 이용해서 협상의 카드로 사용할 생각이오.”
“무, 무슨….”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마족들이 이미 왕국을 안정화하고 대부분의 인간들이 마왕의 지배를 잘만 받아들이고 있다더군. 그 말인 즉 그대들 귀족들의 통치가 최악이었다는 것이지. 그런 자들이 우리 땅에 와있으면 마족들은 몰라도 인간들이 반발하여 계속 전쟁을 외칠 것이야. 그들의 분노도 가라앉히고 마왕에게도 흡족한 선물이 될 수 있도록. 우리 땅에 들어온 자네들을 이제는 되돌려 보내는 것이지.”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습니다! 서부 연합의 동맹이 어떻게 그런 짓을!”
“그대들이 이렇게까지 키운 일이니 책임을 지시게나. 그대들을 바치고 우리들도 답을 구할 것이니까. 끝까지 싸우든, 아니면 항복을 하든 말일세.”
동상이몽, 강경파 요정들은 인간들을 희생시켜 내부의 협력을 공고히 할 생각이고.
반대로 온건파 요정들은 저들을 내보내면서 어떻게든 대화의 물꼬를 트려는 생각이었다.
둘 모두 상대방의 의견이 썩 반갑지는 않았지만, 요정이라는 종족이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결론이었다.
“으아아악! 이 멍청한 요정 놈들아! 마족들이 너희라고… 읍읍!”
“살려고 온 우리들을 이렇게 내칠 수는 없습니다! 당신들이 그러고도 서부의….”
뭐라고 하든 이제는 개의치 않는다.
극한의 상황까지 내몰렸는데 뒤를 돌아볼 여유 따위는 있을 수가 없다.
이제 무엇이 되었든 확실한 결론을 내려서 싸우든 항복하든 해야만 한다.
적들의 원군이 도착하고 다시금 대대적인 공격이 쏟아져 들어오면 저항할 새도 없이, 항복할 기회도 없이 그냥 쓸려나갈 것이 분명했다.
삶의 희망을 품고서 요정들의 땅까지 도망쳤던 인간 귀족들.
그런 그들이 이제는 밧줄에 줄줄이 묶여서는 도살장으로 가는 가축마냥 질질 끌려가고 있다.
누군가는 침을 뱉고 또 누군가는 동정의 눈길을 보내고, 또 다른 누구는 아무런 감정도 없다.
그런 와중에 회의에는 참석치 않은 한 요정 여인이 모호한 미소르 지은 채 그걸 보고 있었다.
‘뜻대로 잘 되어가고 있네.’
요정들은 모르겠지만, 온건파와 강경파의 마음에 불을 지른 것이 바로 나타샤였다.
한쪽에게는 저항할 수 있는 힘으로, 다른 한쪽에게는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다는 기회로.
모두에게 그렇게 속삭이면서 결국 인간들을 내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 너희들에게 붙어있는 인간들을 모조리 넘기게 만들어. -
클라우스는 분명 그런 말을 남겼었다.
그것 가지고 요정들이 정말 무너지겠냐는 나타샤의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고 말이다.
- 요정을 노리는 게 아니야. 이제는 요정들보다도 훨씬 약해져서 자칫 짐이 될 수도 있는 수인들부터 이탈시키려고 하는 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