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1화 〉 29장 - 머지않았다
한창 전투를 벌이던 마족 병사들은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바로 직전까지 혈전을 벌이던 요정들이 어느 순간 뒤로 물러서고, 자신들 앞에 나타난 건 딱히 강하다고 할 수도 없는 인간 측 병사들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도 명백한 적이기에 얼른 모두 제압할 생각으로 공격을 퍼붓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일이 묘하게 흐르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미, 밀지 마! 밀지 말라고!”
인간 병사들이 앞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자꾸 뒤를 돌아보면서 그렇게 외쳐댄다.
그 모습이 마치 누군가가 뒤에서 앞으로 나서라고 등을 떠밀고 창칼로 협박을 하는 것처럼.
자신들의 의지가 아니라 타의로 전장의 중심으로 내몰리는 것처럼 말이다.
뭐가 되었든 결국 저들도 자신들의 적인 것은 다르지 않다.
해서 마족 병사들은 여태 그래왔고 앞으로도 해야 하는 대로.
착실하게 창과 칼을 휘두르면서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는 적병들을 무자비하게 사살했다.
눈앞의 적이 힘껏 싸우려고 하든, 그게 아니면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 몰라하든.
자신들은 전장에서만큼은 적을 죽이는 기계가 되어야만 하니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캬악!”
“꺽! 커컥!”
그저 살기 위해서, 귀족들을 따라 모국을 떠나서 이 먼 곳까지 따라온 병사들이다.
당연히 싸움에 대한 의지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고 허우적거리다가 죽는 게 다였다.
확실한 목표를 지니고서 싸우고 있는 마족 측 병사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뭔가 이상한데?”
현장에서 지휘를 하던 마족 지휘관들 역시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조금 전까지 상당히 대등하게 싸우고 있던 적들이 갑자기 무너지기 시작했다.
요정들이 죽는 순간에조차 비명을 잘 지르지 않는데, 지금 적들은 아주 그냥 사방에서 세상이 떠나갈 듯 비명을 내지르는 것도 무척 거슬렸다.
그들은 급히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려서 상황을 파악하게 했다.
적들이 완전히 무너져 패주하기 직전이었기에 어떤 상황인지 읽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여기저기서 올라온 보고들이 총지휘관인 페르디난트에게 닿게 되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요정들이 벌써 후퇴했다니. 아직 적들이 남지 않았던가?”
“알아보니 같이 싸우고 있던 인간 병사들을 미끼로 내던지고 몇몇 남은 요정들이 그들을 몰아넣은 사이에 나머지 병력들이 안전하게 후퇴했다고 합니다.”
“그걸 이제 알았다는 말인가? 더 일찍 알았다면 추격이라도 했을 터인데!”
“요정 놈들이 워낙 자연스럽게 빠지고, 또 왕국에서 있었던 전투들이 영향을 줘서인지 인간이라고 해서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싸우는 기류가 형성되어서 말입니다. 현장 지휘관들이 아무래도 최선을 다해 싸우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비교적 늦게 깨달은 것 같습니다.”
“…젠장. 기껏 대어를 낚으려고 온갖 고생을 했는데 결국 잡힌 건 송사리뿐이라니.”
페르디난트 입장에서는 분이 터질 만한 일이었다.
요 근래 전투다운 전투도 포기한 채 적을 자신들 쪽을 끌어들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심지어 클라우스가 나서서 수인 전사들을 박살내면서 적들을 초조하게도 만들었고.
시간을 계속 끌어서 이제는 이쪽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느낌도 주었다.
마지막으로 아군 지원 병력이 오고 있다는 소식까지 일부러 흘려서 적들이 움직이지 않고서는 못 배길 정도로 만들어 놓았는데.
정말 온갖 미끼를 뿌려서 황금 어장을 만들어두었는데 하나도 건지지 못 한 것이다.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페르디난트님.”
부관들도 그동안 정말 많은 준비를 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요정들을 거의 다 놓친 것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분명 전투는 대승을 거두고 있다는데 오히려 지휘부 막사는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만약 누군가가 입을 열지 않았다면 장담하건데 더더욱 심각해졌을 정도로.
“너무 화낼 필요는 없어, 페르디난트. 오히려 이 정도면 충분해.”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닌가, 클라우스? 이번 작전은 너도 관여했던 일이다. 그러니 더더욱 속이 터질 텐데? 요정놈들이 싸우기는커녕 인간들을 미끼로 내던지고 도망쳤어. 이런 식이면 적들은 또 다시 저 좁아터진 곳에 진을 치고 버티기만 하겠지.”
“원군이 오고 있다잖아. 세실리 레블랑이 오면 마법도 무력화될 테니 문제없을 텐데.”
“클라우스. 자네도 알 터인데? 마왕 전하께서는 적들이 다시는 일어서지 못 하도록 확실한 승리를 원하고 계신다. 원군이 몰려와서 압박을 하면 적들은 어쩔 수 없이 항복을 하거나, 그게 아니면 죽더라도 최악의 피해를 입히고 죽겠다는 생각으로 싸울 거야.”
이번에 요정들을 최소한 반 이상 격멸했다면 저들도 납작 조아려 항복을 청했을 것이다.
저항 의지가 더는 없도록 만든 후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곳은 대륙의 끝자락이기에 병력을 보내기도 무리이고, 무엇보다 수인들과 요정들은 마족들과 워낙 사이가 좋지 않아 확실하게 항복을 받지 않으면 언제나 재차 반란의 여지가 있는 만큼 힘을 빼두는 것이 필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힘을 빼둔다는 말은, 결국 적들의 무력이 나오는 근원을 잘라내는 것.
수인 측 전사들은 저번 전투에 이어서 이번에 또 절반이 훨씬 넘는 자들이 전사했으니 이제 더는 함부로 목소리를 높이지 못 할 것이다.
남은 건 요정이었는데, 이번게 그 기회를 놓쳤으니 페르디난트 입장에서는 두고두고 아쉬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클라우스는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1차 대륙 전쟁 시절에 그와 맞붙기도 했었던 페르디난트는 그런 클라우스의 모습에서 뭔가 따로 생각해둔 것이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해서 페르디난트는 일단 부관들을 내보낸 후 은근슬쩍 입을 열었다.
“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모양인데.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여유로울 수가 없어.”
“있지. 당연히 있지. 그리고 그 계획, 이미 반 넘게 실행되었고 말이야.”
“…요정들이 멀쩡히 물러났는데, 우리는 그 놈들을 붙잡지 못 했는데도 말인가?”
“어차피 그것들 좀 더 잡는다고 해서 요정들이 ‘아이고, 졌습니다. 항복하겠습니다. 마족 만세!’ 할 놈들은 아니야. 페르디난트. 놈들은 그놈의 자존심으로 이렇게까지 버티고 있는 거지. 그러면 그 자존심을 무너트리는 방법은 도대체 뭘까. 외부에서 끊임없이 들이쳐서 패배를 안겨주는 것?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괜히 저항 의지만 키우고, 재수가 없으면 괜히 승리 한 번 만들어줘서 놈들의 자존심만 더 드높여줄 뿐이지.”
그 말에 페르디난트는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들은 몰라도 요정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겠다는 게 그의 생각.
해서 그 자존심을 뭉개버릴 생각으로 큰 승리를 원한 것인데, 아무래도 클라우스는 뭔가 다른 부분으로 그걸 뭉개버릴 생각인 듯 했다.
“내부에서부터 서로 싸우게 만드는 거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제부터는 그 자존심을 언급할 수도 없게 스스로를 저열한 놈들로 깎아내리는 것이지.”
“…깎아내린다고? 그들 스스로가 저열한 존재들이 되도록?”
“그래. 멀리 볼 것도 없이 당장 봐라. 살려달라고 여기까지 도망친 인간들을 미끼로 내던지고 자신들은 살아서 돌아갔지. 그게 단기적으로 봤을 때는 나름 합리적인 결정이었을 거야. 하지만? 자칭 서부의 가장 고귀하고 강한 종족이라는 놈들이, 살겠다고 그렇게 무시하던 인간들에게 뒤를 맡기고서, 전장에 내팽겨 치고서 그냥 빠져나왔다? 그건 아니지.”
“….”
“이 불리한 상황에서도 저놈들이 버틸 수 있는 이유는, 은연중에 지니고 있는 우월감 덕분이다. 우리가 최소한 마족보다는 낫다, 인간보다는 월등하다. 뭐 이런 식으로. 그런데 그게 전부 틀렸다고 한다면. 한계에 몰리니 결국 요정들도 추악한 짓들을 서슴없이 저지른다면. 여태 그거 하나로 버티자고 외치던 자들도 지칠 수밖에 없지.”
요정들 사이에서도 여러 역겨운 일들이 꽤나 많았다.
하지만 그들보다 더 한 병신들인 인간들이 있었기에 그 소식으로 쉽게 가릴 수 있었다.
또한 명백한 적인 마족이 있기에 그들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리면서 자신들의 우월성을 입증하며 계속해서 요정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그게 무너진다면 이제 그들은 인간과도, 마족과도 다른 게 하나 없는 것에 불과하고 말이다.
“왕국이나 제국은 그 안이 이미 다 썩어 문드러져서 힘으로 쓰러트려도 충분했지. 하지만 요정이나 수인들은 다르다. 꼴에 또 본인들이 대단하다고 믿는 것들이야. 그 잘난 인식들을 먼저 박살내야지. 그래야 통치가 가능할 거다. 수인들은 전사라는 놈들이 인간 하나한테 말 그대로 박살이 나서 꼬리를 내렸으니 되었다고 치고, 요정들은 자신들이 무슨 고귀하고 깨끗한 존재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지워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본인들이 마법 좀 잘 다루고 활 좀 잘 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부분도 뛰어난 부분이 없음을 알려주는 거다.”
“…이미 마왕 전하와 이야기가 다 끝난 모양이군.”
“그런 셈이라고 해두지.”
사실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이미 몇 번이나 반복한 삶이니 문제는 없다.
왕국과 제국은 어차피 귀족들만 싹 정리하면 나머지는 알아서 조용히 흡수가 된다.
하지만 요정들과 수인들은 서부 연합 시절부터 자신들이 최고라는 부분에 대해서 의심 하나 가지지 않고 살아가던 종족들이다.
그걸 먼저 무너트리지 않는다면 힘으로 제압해서 항복을 받아낸다고 해도 나중이 문제다.
뒤가 조용하려면 완전히 굴복하게 만들어서, 요정들 스스로가 화살을 꺾고 수인들이 꼬랑지를 말고서 낑낑거리도록 만들어야 한다.
“페르디난트, 참고로 말하자면 이게 끝이 아니야.”
“무슨 말이지?”
“자칭 고귀하신 요정님들이 벌이시는 추악한 짓이, 이게 끝이 아니라고. 그래도 이번에는 전장이니 어떻게 핑계라도 댈 수 있다고 치지만 그 다음 벌일 일은 보다 더 심각하고, 보다 더 재미있는 일이 될 거야.”
재미있는 일이라는 말에 페르디난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또 은근히 기대가 된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클라우스가 그런 말을 한다면, 확실히 뭔가가 있기는 하다는 것인데.
과연 그 재미난 일이 무엇이 될지 꽤나 호기심이 동한 모양이었다.
“아, 맞다. 클라우스. 아무래도 저기 있는 인간 병사들은 제대로 싸우지 못 하고 항복할 것 같은데.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 그래도 왕국의 인간이었으니 포로로 삼았다가….”
“죽여.”
“…죽이라고?”
“그래. 미끼로 던졌는데, 그걸 살려서 어항에 기를 수가 있나. 없애야지.”
“하지만 포로들을 함부로 해쳤다가 자칫 다른 부분에서….”
“걱정마라. 포로들을 해친 마족이 부각되는 게 아니라, 살겠다고 도망친 자들을 내친 요정들만 부각이 될 테니까. 그러기 위해서라도 저들은 모두 죽어야 한다. 비참하게.”
같은 인간이라고 해서 동정심 따위 가지지 않는다.
제 고향을 떠나 여기까지 함께 왔다면, 그만한 각오 정도는 했을 게 아닌가.
같은 평민이지만 귀족 밑의 사병이라는 이유로 저것들 역시 만만치않게 악마 짓을 했다.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니, 너무 억울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게 클라우스의 속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