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0화 〉 29장 - 머지않았다
거의 2주에 가까운 시간 동안 지리멸렬하게 반복되던 시간이 또 돌아왔다.
마족 병사들은 가장 최적의 진입로를 뚫기 위해서 또 한 번 돌격 준비를 하고.
반대로 요정들은 유일한 진입로를 막기 위해서 또 한 번 방어 준비에 들어간다.
전투라고 부르기도 모호한 것이 시작되었다.
마족 측에서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착착 진입해나갔지만 오늘도 딱히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요정들이 쉴 새 없이 화살을 쏘아 보내며 마족들의 움직임을 봉쇄하는 것과 동시에 적들이 넓게 퍼지는 게 아니라 한곳으로 모이도록 만든다.
그걸 알아차린 마족 지휘관들이 대열을 유지하라고 목청을 높이며 간격이 너무 좁아지지 않도록 많은 신경을 쓴다.
하지만 말 그대로 비 오듯이 쏘아지는 화살들 앞에 어느 누구도 덤덤할 수는 없다.
방패를 조금만 내려도 그대로 고슴도치가 될 것이며 한 발자국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방패를 두드리는 화살의 강도도 점점 강해진다.
이번에는 어떻게든 거리를 좁히기 위해 마족들도 안간힘을 쓰는 듯 했지만 또 한 번 대열이 흐트러지자 더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듯 천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 화살도 무한한 것이 아니니 이렇게 조금만 더 반복하면 화살이 다 떨어진 요정들이 다른 수를 찾을 거라고 마족들은 생각하는 모양.
여기까지가 여태 반복되던 전투의 방식이었는데, 오늘은 다를 것이었다.
“준비는? 철저하게 되었겠지?”
“네.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똑똑히 기억해둬라. 적들의 기세가 무너져 물러서는 와중에 우리가 들이치는 것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적들이 상당히 약한 모습을 보일 때 최고의 효율을 낼 수 있는 작전이란 말이다. 적의 원군이 오는 듯 하면 바로 물러서야 할 것이다. 싸울 때에는 최대한 용맹하게 나서되 무리해서는 절대 안 된다. 수인 놈들의 패배를 되풀이할 수는 없어.”
평소와 똑같이 견제만 하면서 시간을 끄는 것처럼 보였지만.
오늘은 다른 때와는 다르게 은밀히 뒤에서 병력들을 준비시켜두었다.
심지어 인간 귀족들까지 압박해서 그들 휘하에 있던 병사들을 전부 긁어모았다.
한 번, 딱 한 번의 기회가 있을 뿐이다. 이 이후에는 이런 작전도 통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적에게만 이로운 일일 뿐이다.
앞에 있는 저 마족들이 전부는 아니지만 반 이상을 차지하는 큰 병력임은 분명하다.
저 병력들에게 큰 피해만 줄 수 있어도 자신들이 원하는 위치를 점할 수 있을 것이다.
설사 저들이 자신들을 모조리 죽이기로 마음먹었다고 해도 순순히 죽어주지는 않겠다는 메시지까지 전달할 수 있으니 내부의 단결도 도모할 수 있다.
현재 요정들은 온건파와 강경파가 나뉘어서 내부의 분열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
벨라루스의 이들을 아무 조건 없이 풀어준 것이 이유였는데, 이후 자신들과 마족들 사이에 그러다 할 전투가 없으면서 온건파들의 힘이 더욱 강해졌다.
만약 온건파들이 득세하여 마족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항복을 한다면.
강경파들의 중심이 되어서 이렇게 싸우고 있는 자신들은 뭐가 된단 말인가.
온건파 가문들이 득세하는 꼴은 절대 못 본다, 마족들에게 고개를 숙일 수도 없다.
그런 생각을 지닌 지휘관들이 현재 이 요정들을 지휘하고 있기에.
자연스레 제대로 된 전투를 치러서 피해를 주고 말겠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적들이 조금씩 물러납니다. 이대로 화살이 거의 닿지 않는 곳까지 도달했다고 생각되면 대열이 순간적으로 흐트러질 겁니다.”
“우리 병력들은?”
“이미 이동해서 언덕을 다 내려갔습니다. 신호만 떨어지면 그대로 돌격하여 적들의 후미를 완벽하게 잡아낼 수 있을 겁니다.”
개개인의 전투에서는 몸을 돌려서 가다가 뒤에서 다시 공격이 들어오면 어렵지 않게 막아낼 수 있지만, 커다란 집단과 집단이 싸울 때에는 그게 쉽지가 않다.
그래서 양측이 전투를 벌일 때보다 한쪽이 뒤를 잡혀 공격을 당할 때 훨씬 더 많은 사상자가 나오는 것이다.
대부분의 전투 사상자는 바로 퇴각할 때 생기는 것이고, 요정들은 바로 그 부분을 노리고 있었다.
“…지금! 지금이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돼! 당장 돌격 명령 내려!”
마족들이 화살이 닿지 않는 거리까지 물러나자 진이 흐트러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때를 놓치지 않고 요정들과 인간 귀족 측 병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일제히 돌격을 감행한다.
체력 분배를 해놓았고 또 미리 내달릴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전혀 무리가 없었다.
반대로 마족 병사들은 몇 시간 동안 전투를 치르면서 피로가 달한 상황.
당연히 크게 당황해서는 어쩔 줄 모르다가 다급히 몸을 돌려 숙영지로 내빼기 시작했다.
“뒤를 잡아! 어떻게든 잡아! 놈들이 숙영지 근처로 가면 끝장이다!”
숙영지라고는 하지만, 거의 요새나 다름없는 곳이다.
마족들이 얼마나 우직하게 숙영지를 건설하는지 요정들이 모르지 않는다.
말이 숙영지이지 가장 앞에 말뚝을 박고 그 뒤로 목책을 세워서 공격을 당한다고 해도 능히 버틸 수 있을 정도의 방어력을 지니게 한다.
그렇기에 저들이 숙영지로 들어가게 되면 역으로 자신들이 위험해진다.
그 전에 어떻게든 추격해서 꼬리를 잡고 늘어져야 피해를 줄 수 있다.
요정들은 그리 생각하며 더욱 속도를 높였고, 그들을 따라 인간 귀족들의 사병들까지 속도를 높여 우르르 달려 나갔다.
“적들의 지원병이 마중을 나오기 전에 공격해야 해! 더 빨리!!”
숙영지가 열리면서 급히 제 병사들을 도우기 위해 달려 나오는 마족들이 보인다.
아직 거리가 있고, 이대로라면 자신들이 저들보다 먼저 마족들을 휩쓸 수 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훨씬 더 많은 적들을 상대해야 하니 절대 좋다고 볼 수 없다.
그걸 알기에 요정들은 오직 앞만 보고 내달렸고 거의 다 따라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근접전을 준비하면서 막 몸을 날리려고 했다.
화악!-
별안간 양쪽 측면의 바닥들이 사라지면서 그 아래서 또 다른 병사들이 뛰쳐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드디어 왔구나! 이 성가신 귀쟁이 놈들!”
“들이쳐라! 앞만 보고 달리느라 진도 형성하지 못 한 멍청이들이다!!”
“우와아아아아!!”
그제야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요정 측 지휘관은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깊이 들어온 것도 있었지만, 일단 너무나도 절묘하게 함정을 파둔 게 결정적이었다.
측면에서 치고 들어오는 마족들만 봐도 수백은 족히 넘어보였는데, 저런 숫자의 병사들이 숨어있을 공간을 만들면서도 왜 자신들의 정찰병들이 눈치를 전혀 채지 못 했는가.
‘…이런 세상에. 설마 그거까지 내다봤다고?’
자신들이 화살만 쏘는 척 하면서 은밀하게 병력을 모은 것처럼.
저들도 대충 진격하려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몰래 함정을 파둔 것이다.
정찰병들은 다른 지역에서 몰려오고 있다는 적들의 지원병을 파악하기 위해 거기에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적들은 바로 그 허점을 정확하게 찔러냈다.
이대로는 전멸이다, 사방에서 포위되기 전에 얼른 돌아가야 한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퇴각 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측면의 적들은 너무 가까이 다가왔고 조금 전까지 도망치느라 바쁘던 마족들은 어느 순간 진형을 형성하고 다가오고 있었다.
조급함이 만들어낸, 딱 한 번의 방심이 만들어낸 처참한 결과가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몰아쳐라. 저항하는 놈은 그 자리에서 참살하고 나머지는 포로로 붙잡도록.”
페르디난트의 명령이 떨어지자 마족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그동안 연기 좀 한다고, 적들의 눈을 속인다고 화살을 맞으면서 버티고 버틴 게 며칠이던가.
그 울분을 드디어 풀어낼 수 있게 되었다는데 허투루 전투에 임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동등한 조건 속에서 벌이는 요정과 마족의 전투는 50 대 50 이라고 볼 수 있다.
그만큼 승부를 내기 힘들다는 뜻이지만, 반대로 보자면 아주 조그마한 변화가 승패를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열쇠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요정 측은 오직 공격만을 상정하고 있다가 역으로 삼면이 포위당하는 상태에 이르렀으며 무엇보다 지원을 전혀 받을 수가 없다.
아무리 죽음을 각오한 자들이라고 해도 시시각각 다가오는 절망 앞에서 의연하기는 힘들다.
반대로 마족들은 요 몇 주간 고생한 것을 한꺼번에 되갚으려고 벼르고 있다.
여태 무서워서 화살만 날리던 놈들이 빈틈 좀 보였다고 감히 방어를 포기하고 공세로 전환했다.
이번 기회에 이 건방진 귀쟁이들을 싹 처리한다면, 승기는 순식간에 자신들에게로 기운다.
이 정도로 상황이 완전히 다른데, 승패는 이제 뻔하다고 할 수 있다.
저들도 살기 위해서, 돌아기기 위해서 저항을 한다고 하겠지만.
저항은 어디까지나 저항일 뿐이지 승리를 위한 열쇠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어디를 가도 조급함은 항상 독이 되어 따라올 뿐이지. 인간이든 마족이든, 요정이든 수인이든 다 똑같아. 극한의 상황에 몰리게 되면 갑자기 상황을 낙관적으로 인식해. 나는 아니라고 하는 놈들은 그런 최악의 상황에 빠져본 적이 없는 놈들이야. 그 최악의 상황에서 냉정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는 놈은 정말 몇 없지.’
클라우스 본인도 처음에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 했다.
도피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과하게 낙관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했다고 할까.
뭐가 되었든 그것은 절대 객관적인 파훼 방법이 될 수 없었다.
그냥 스스로에게 숨을 구멍을 찾아주는, 실패해도 핑계를 댈 수 있는 뭔가를 만들어줄 뿐이다.
콰앙! 쾅!-
챙, 채챙! 챙강!-
요정들이 마족들이 처음으로 제대로 맞붙어 싸우게 되었다.
그들 사이에 인간 귀족들의 사병들도 있기는 했지만, 딱히 큰 의미가 없는 전력이니 패스.
원래라면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처절한 싸움이 되어야 맞았을 테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이미 심리적으로 크게 말린 요정들은 기대하던 수준의 전투력을 보이지 못 하고 초장부터 계속 밀려났다.
‘뭣들 하고 있어. 요정들. 이대로 서서 다 죽을 거야? 아니잖아. 너희들의 밑바닥을 보여줘. 그래야 얼른 나도 그 다음 일을 하지.’
멀리서 전장을 살피면서 내심 뭔가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클라우스.
자신이 나선다면 30분도 안 돼서 끝낼 수 있는 전투임에도 그는 뭔가를 계속 기다렸다.
그리고 그가 기다리던 ‘그 일’ 은, 전투가 시작되고 정확히 30분이 지나자 시작되었다.
“이대로는 무리입니다. 적들이 계속 많아지고 있어요. 이대로 가면 완전 포위당합니다.”
“물러서잔 말입니까? 여기서 패해 물러난다면 또 다시 항복을 주장하는 것들이 늘어날 텐데!”
“아직 우리 피해가 그렇게 크지 않아요. 후퇴해서 충분히 이 지역을 사수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뒤로 물러섭니까? 마족들이 우리들을 순순히 보내준다고 합니까?”
전투에 임했던 요정 측 지휘관들은 최대한 빠르게 결론을 내려야만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들은 계속 밀려나고, 마족들은 반대로 점점 다가오고 있다.
아군의 지원은 기대할 수 없다, 언덕을 내어주면 그것으로 끝이다.
후퇴하는 것이 맞지만 이 상태에서 뒤로 몸을 돌리면 당연히 자신들이 하려던 것을 저들이 그대로 행하게 해주는 것과 다름이 없다.
“….”
잠시 고민하던 요정 측 지휘관은, 결단을 내렸다.
여태껏 클라우스가 간절히도 기다리던 내용을 읊으면서 말이다.
“…인간 측 병사들을 미끼로 던져준다. 그 틈에, 우리는 빠져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