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9화 〉 29장 - 머지않았다
요정들과 마족들의 지지부진한 전투는 그 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그나마 가장 안전하게 진격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 그곳을 뚫기 위한 마족.
반대로 그 유일한 통로를 지키기 위해서 계속 견제에 집중하는 요정.
그 덕분에 큰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고 피해가 조금씩 누적은 되고 있었지만 어느 한쪽도 서로에게 치명타를 꽂지 못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얼마 전까지는 바로 이런 부분이 요정들이 기대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시간을 끌면서 자신들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존재임을 알려주면 마왕 측에서 항복을 받아낼 수 있는 큼지막한 뭔가를 내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형에서는 이쪽이 훨씬 유리하며 원거리 견제는 요정을 따라올 이가 없다.
그 뿐인가? 자신들이 근접 전투에서도 부족한 게 아니며 요정이 뚫리면 당연히 그 다음은 수인이 뻔하니 수인 전사들의 지원까지 받을 수 있는 게 확실했다.
마족들로서는 왕국이나 제국마냥 쉽사리 이곳을 뚫어낼 수 없고, 설사 뚫는다고 해도 어마어마한 피해를 감당해야 할 것이 분명했다.
‘해서 모든 게 좋았다. 수인 놈들이 갑자기 그런 짓만 벌이지 않았어도!’
의도는, 확실히 의도 하나만큼은 좋았다고 할 수 있었다.
성공만 했다면 수인들과 항상 으르렁거리던 요정들조차 잘 했다고, 고맙다고 했을 것이다.
본대의 뒤가 공격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자연스레 병사들은 그 뒤를 신경 쓰기 마련이다.
세상 어떤 군대도 뒤에 적이 나타났는데 앞에 모든 것을 집중할 수는 없다.
심지어 언제든 요정들이 게릴라 전략을 쓸 수 있다는 걸 고려한다면.
후방에서 와야 할 지원들을 수인들이 또 언제든 공격할 수 있다는 두려움은 분명 마족들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했을 것이었다.
문제는, 그게 성공하지 못 했다는 것.
단순히 실패했다는 수준이 아니라 말 그대로 처참하게 망했다는 것.
이전 전투에서 정예들을 잃었지만 수인들은 아직도 많은 수의 전사들을 지니고 있었다.
그 중 또 다수를 기습 작전에 투입했는데 거의 전부를 잃고 말았다.
살아남은 자들조차 공포에 질려서 한동안 전투에 투입되지 못 할 거라는 말도 돌고 있다.
수인 전사들이, 그 싸움 밖에 모르는 자들이 공포에 질렸다면.
도대체 얼마나 처참하게 패배했다는 것인지 요정들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어쩝니까. 이제 마족들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수인들의 전력이 크게 깎여나갔다는 것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전쟁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끝장을 보려고 할 겁니다.”
“…아직은 모른다. 어떻게든 버티다보면 무슨 일이라도 터지지 않겠는가? 그 인간 귀족들이 말하지 않았던가. 시간이 지나면 마족들의 치세 역시 좋지 않다는 걸 자각한 인간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곧 대규모 봉기를 일으킬 것이라고 말이다.”
확실히 저번 대륙 전쟁에서 많은 인간들이 마족들의 손에 의해 가족과 친구를 잃었다.
그만큼 거대하고 끔찍했던 전쟁이었으며 거기에서 살아남은 세대들은 아직도 왕국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헌데 그 상황에서 왕국이 통째로 넘어갔으니 그들의 불만이 폭발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라고 요정들과 여기까지 도망친 인간 귀족들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세상에서 가장 나쁜 놈은 ‘먹고 살지 못 하게 하는 놈’ 이고.
반대로 세상에서 가장 착한 놈은 결국 ‘먹고 살 수 있게 해주는 놈’ 이 되는 법이다.
아무리 전쟁이 참혹했어도, 그들에 의해 많은 것을 잃었어도.
그 전쟁에서 겨우 살아남은 자신들을, 심지어 같은 왕국의 인간임에도 아주 등골까지 쪽쪽 빨아먹던 귀족들의 지배를 다시 받고 싶어 하는 평민은 단 한 명도 없었다.
1년 내내 농사를 지어도 온갖 명목으로 다 뜯기고 나면 남는 것이라곤 거의 없다.
심지어 고생했다고 주는 식량으로는 겨울을 넘기는 것조차 힘들다.
설사 그 혹독한 겨울에서 살아남아 봄을 마주했다고 해도 봄부터 뭔가 생기는 건 아니다.
수확의 계절은 언제나 찬바람이 잦아들고 따스한 봄볕이 뜨거운 햇살로 바뀌어 마침내 모든 것이 알맞게 익어가는 때가 되어야만 찾아오는 법이다.
그 전에 먹을 게 없어 굶어 죽어가는 이가 수두룩한데 대부분의 귀족들은 대가를 받고서 식량을 파는 극악무도한 짓까지 저질렀다.
값을 치를 게 없다면 남은 것은 결국 몸뚱이 하나뿐이니 몸을 팔게 된다.
살기 위해서 스스로 지옥에 들어 가야하는, 그런 삶을 살고 있던 게 왕국의 평민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마왕이 들어오고 가장 먼저 한 일이 토지를 나눠주는 것.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높던 세금들을 모조리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뻔하다고 할 수 있었다.
“크, 큰일입니다. 방금 전 들어온 소식인데 왕국의 남은 귀족 잔당들을 소탕하던 마족 측 전사장과 레블랑 가문의 가주가 지금 이곳 전선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레블랑 가문의 가주라면… 이런 젠장! 설마 그 여자인가?!”
“네, 그렇습니다. 일전에 대마법 전개로 동부 반란에서 반란군을 제압했다는 마족입니다.”
소식이 들어오자 요정들은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자신들이 이렇게 여유를 지닐 수 있는 건 적들이 대단한 방어책을 지니지 않아서다.
화살이야 방패로 좀 막는다고 쳐도 마법은 방패 가지고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화살로 적들의 속도를 늦추고 한 곳에 집중시킨 후 마법을 때려 박는다면 엄청난 피해를 줄 수 있었다.
마족들도 그 사실을 알기에 화살들이 쏟아지면서 자신들을 어느 한 곳으로 유인하는 기색이 보이니 과도한 진입을 포기하고 물러선 것이다.
헌데 레블랑 가문의 가주, 세실리 레블랑이 도착한다면.
대마법을 이용하여 역으로 자신들의 마법사들을 요격이라도 한다면.
그건 방어자인 자신들에게 있어서 팔 한 쪽을 내어주는 것만큼 치명적인 일이었다.
“이렇게, 이렇게나 빨리 온다고? 뭐가 잘못된 거 아닌가? 혹시 적들의 기만책이라든가!”
“그럴 확률이 매우 낮습니다. 왕국 측에 겨우 보낸 정탐꾼으로부터 들어온 소식입니다.”
“왕국의 저항은! 대륙 전쟁 때 7년을 그렇게 항전한 인간들은 뭘 하는 거지?!”
“그게… 오히려 왕국의 인간들이 귀족들을 잡아다가 마왕에게 바치고 있다고 합니다. 북쪽에서 겨우 버티던 귀족들 역시 별 다른 저항도 못 해보고 토벌을 당했다는 소식이고요.”
“…빌어먹을.”
요정들은 이를 악물며 자신들의 땅에 숨어 지내고 있는 인간 귀족들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렇게나 호언장담을 하더니 저항은커녕 오히려 마족들에게 적극 협조하고 있지 않은가!
몇 년이 아니라 몇 달조차 견디지 못 하고 모든 저항 세력이 말소되었단다.
이렇게 되면 후방 안전이 확실시 되는 것이고 마족들은 이제 이곳 전선으로 모든 힘을 집중할 수가 있게 되었다.
1차 대륙 전쟁 때부터 군 지휘 경험이 있는 페르디난트 엘세.
제국의 황성을 떨어트리는 활약을 한 에슐리 팔라티나트.
마법으로는 마족들 사이에서 당해낼 자가 없다는 세실리 레블랑.
수인의 몸으로 마왕의 신임을 얻어낸 검증된 전사 카엘라 티거.
마지막으로 저들의 뒤에서 언제든 나설 준비를 하고 있을 클라우스까지.
이렇게만 보면 마왕이 그들에게 바라는 건 단순히 협상 따위가 아니라고 보는 게 맞았다.
‘마왕은 우리들을 깨끗하게 밀어버리려고 하는 거다! 쉽게 볼 일이 전혀 아니었어!’
자신들은 점점 더 고립무원의 형태에 빠지고 적들은 사방에서 몰려든다.
적들은 결코 대충 싸우다가 협상으로 이 전쟁을 마무리할 생각이 없다.
자신들이 버티면 저들은 뚫을 때까지 계속해서 기다리고 기다렸다가 한 방을 노릴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인적, 물적 자원으로 한계가 있는 자신들은 결국 패배하고 만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요정들 사이에서 일대 소란이 일었다.
지금이라도 얼른 항복해서 미래를 바라보자는 의견과.
차라리 이번 기회에 먼저 도착해있는 적군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주자는 의견.
후자의 경우 약간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름 일리는 있었다.
이제 마족들은 동부만이 아니라 왕국과 제국의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넓은 땅을 차지하게 되었으니 이제 많은 것을 손에 쥔 자가 된 것이다.
손에 쥔 것이 많으면 자연스레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강해진다.
괜히 피를 보면서 겨우 손에 쥔 것을 내버리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그런 때에 자신들이 전원 옥쇄할 기세로 버틴다면 굳이 과도한 피해를 보면서까지 피로 젖은 땅을 얻을 바에 고개만 조아리고 무릎만 꿇는 것으로 끝낼 수도 있었다.
상황이 최악으로 흘러가면 흘러갈수록 득세하는 건 근거 없는 강경파다.
아무리 논리정연하게 이유를 설명한다고 해도 온건파는 결국 강경파를 이기지 못 한다.
1차 대륙 전쟁 시기의 마족이 그러했고, 2차 대륙 전쟁에서 왕국이 그러했으며.
이제는 요정들까지 그 근거 없는 강경파가 득세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외치게 되었다.
“적들이 집결하여 더는 기회가 없어지기 전에, 어떻게든 비수를 꽂아야 합니다.”
“수인 측에도 연락해서 다시금 전사들을 모으라고 하세요. 이게 마지막 기회입니다.”
겉으로는 여전히 시간만 끄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요정들은 기회만 된다면 병력들을 이끌고 언덕을 내려가 마족들의 숨통을 끊으려고 했다.
그리고 정말 거짓말 같이, 며칠 후에 적들이 다시금 몰려온 바로 그 순간.
그들은 바로 오늘이 승부를 걸 만한 날이 되었음을 직감했다.
“마족들이 꽤나 많이 느슨해졌습니다.”
“아무래도 조만간 대규모 원군이 도착한다고 해서 풀어진 모양이군요.”
“거기에 우리들이 절대 싸워줄 마음이 없다고 확신이라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보십쇼, 진을 형성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상황이 형편없기 그지없습니다.”
제아무리 마족이라고 해도 결국 전장에 나선 병사들은 다 같은 마음이 된다.
아무 의미도 없는 대치만 계속된다면 어느 누구라고 해도 마음이 풀어지게 된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고 남는 것은 오직 살아서 돌아가고자 하는 박약한 의지 뿐.
바로 지금이 기회다.
저들은 분명 이번에도 요정들이 견제만 좀 하다가 말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대충 좀 들어가려는 모습을 취하다가 명령이 떨어지면 또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이들 마냥 터덜거리면서 자신들의 숙영지로 돌아갈 테지.
군대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기세인데, 그게 다 꺾인 순간.
요정들과 수인 연합이 그대로 돌격을 감행한다면 적들은 우왕좌왕하다가 순식간에 밀려버리고 그대로 숙영지까지 깨끗하게 쓸려버릴 게 확실했다.
이번 작전만큼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만에 하나 이것조차 막힌다면 이후 엄청난 대군을 맞이하여 오직 죽음만이 기다리는 싸움을 해야 한다.
해서 요정들은 몰래 정탐병을 늘리고 일대를 샅샅이 훑으며 그 후로도 계속 똑같은 상황을 반복했다.
자신들 역시 싸울 마음이 없다고, 그냥 화살 좀 날리다가 대충 전쟁이 끝났으면 하는 모양새를 최대한 강하게 어필한 것이다.
“…오늘입니다. 바로 오늘, 결전을 치릅시다.”
그리고 또 다시 며칠 후, 요정들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바로 오늘, 초반의 그 날카로운 기세를 다 잃어버린 마족들을 거세게 몰아붙일 것이었다.
반드시 적들에게 큰 타격을 입혀서 패배 정도가 아니라 패퇴시켜야 한다.
제국 내로 다시 돌아가게 만들어 저들이 기껏 확보한 교두보를 완전히 차지할 생각이었다.
비록 왕국 내에서 소요 사태는 없지만 이미 많은 것을 이루었고 자신들이 명예로운 항복까지 할 생각이라고 한다면 마왕도 결국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요정들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들의 운명이 걸린 전투를 준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