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8화 〉 29장 - 머지않았다
수인 사회에서 부족장은 단순히 강함만으로 뽑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전사 시절에 무력으로 큰 두각을 드러내지 못 한 이들이 부족장이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것은 부족장을 강함 순으로 뽑는 게 아니라 통솔하는 능력 순으로 뽑기 때문이었다.
강함이 그들 사회에서 가장 고가치로 평가되는 것이긴 하다.
최강이라는 말이 붙으면 최고로 영예로운 순간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많은 전사들은 최강이라 칭해지는 전사에게 예를 표시하며 최대한 편의를 봐준다.
이렇게만 보면 최강이라는 호칭이 붙은 이가 가장 위에 있는 듯 하지만.
그저 이름만이 그렇게 붙었을 뿐 다른 전사들을 무시한다거나 할 수는 없다.
최강이라고 해도 잘 짜인 진을 형성하고 다가오는 수백의 전사들을 이길 수는 없다.
수십을 죽여도 다시 수십이 다가올 것이고, 죽이고 죽여도 계속 몰려들어서 쉴 틈조차 주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몸 여기저기에 공격을 허용하게 된다.
그렇기에 부족장을 최강의 전사가 아닌, 통솔 능력이 뛰어난 전사로 뽑는 것이다.
최고의 하나보다 상위권의 여럿이 훨씬 더 강력하다는 걸 수인들은 알고 있다.
무리 사냥이 가장 효과적인 공격 방법임을 아주 오래 전부터 몸으로 숙지하고 있는 자들.
그런 이유로 대부분의 전사들은 클라우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촤아아악!!-
앞서 나가던 전사들의 몸이 조각나고, 잘 다져진 육편이 되어서 공중에 흩어지기 전까지는.
“뭐, 뭐 저런 인간이….”
“포위해라! 포위해서 함부로 움직일 수 없도록 해! 창부터 휘두르지 못 하게 해라!”
부족장들이 고함을 내지르면서 전사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원래는 몇몇 전사들에게 저 남자를 맡기고 나머지는 마족들의 후방을 칠 생각이었다.
헌데 이렇게 부딪쳐보니 그건 오만 중의 오만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저 남자 앞에서 몸을 돌려서 마족들을 노리고 갔다가는, 장담하건데 얼마 지나지 앉아서 자신들의 등판에 구멍이 뚫렸을 게 확실했다.
정확히 다섯 번, 딱 다섯 번 창을 휘둘렀는데 벌써 수십의 전사들이 쓰러졌다.
기습을 위해서 나름 가려낸 우수한 전사들인데, 조금의 방심도 하지 않았는데.
너무나도 어이없게 쓰러진 전사들을 바라보며 부족장들은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저 남자라도 쓰러트린다. 이미 기습은 물 건너갔어. 저 남자가 혼자 여기 왔을 리 없다. 분명 아군의 지원을 기다리면서 혼자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이야!’
참고로 클라우스는 페르디난트에게 수인들의 기습이 있을 거라고 알려주기는 했다.
하지만 그의 병력 동원은 필요 없다며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그렇지 않아도 하루 종일 화살 막느랴 방패 들고 내달리랴 고생했을 병사들인데 이런 곳에서 체력을 쓰게 만들면 장담하건데 요정들과의 전투에서 빈틈을 보이게 될 것이라고.
클라우스의 말에 페르디난트는 그러면 에슐리에게 지원이라도 청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내일 전투나 생각해라.’ 였다.
즉 이곳에 있는 동부 측 전력은 클라우스 혼자가 전부다.
그 사실을 모르는 수인들은 적들이 공격하기 전에 어떻게든 몸을 빼내려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클라우스가 날뛰면서 전사들이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 하도록 만들었다.
포위는 분명 전사들이 하고 있는데 공격의 주도권은 자신이 쥐고 있다.
이 얼마나 우스운 상황인지, 클라우스는 미소를 지으면서 다시 한 번 창을 찔러 넣었다.
푸확!!-
물풍선 여러 개가 터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수인 전사 다섯의 가슴팍에 구멍이 난다.
지극히 간단한 찌르기 동작이 전부였는데 잘 짜인 포위망을 갖추고 있던 전사들이 맥을 못 추고 그대로 당한 것이었다.
“전우들의 희생을 헛된 것으로 만들지 마라! 앞의 전사가 쓰러지면 더 앞으로 나아가라! 나아가서 저 남자가 어떤 행동도 하지 못 하도록 봉쇄해!”
다수가 강한 하나를 잡는 방법은 결국 감당할 수 없는 숫자로 깔아뭉개는 것이다.
아무이 강하다고 해도 손은 두 개요, 발도 두 개고 몸은 단 하나 뿐이다.
앞을 공격하고 있으면 뒤가 비고, 뒤를 신경 쓰면 자연스레 앞이 무방비가 된다.
그 부분을 잘 노린다면 그 어떤 강자라고 해도 제압하는 것이 절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 스킬, ‘불굴’ 을 발동합니다. -
- 강력한 의지로 체력의 한계가 늘어납니다. -
- 스킬, ‘광폭화’를 발동합니다. -
- 끊임없이 피를 갈구하며 더욱 강력해집니다. -
- 스킬, ‘공포 유발’ 을 발동합니다. -
- 적들이 지니고 있는 공포심을 몇 배로 증폭시킵니다. -
- 전장에서 도주하거나 몸이 굳을 확률이 늘어납니다. -
하지만 문제는, 그 상대가 수인 전사가 아니라 클라우스라는 점.
그리고 그 남자가 이 세상을 창조한 존재이며 그 어떤 이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스킬이라는 것을 자유자재로 쓴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포위해서 몰아쳐도 지치지 않으며, 손속은 점점 더 잔혹해지고 반대로 전사들의 사기는 뚝뚝 떨어지며 지휘체계도 엉망이 되어간다.
분명 인간 하나와 싸우고 있는 게 확실한데, 어째서 태풍 한가운데에 떨어진 느낌이 드는 것일까, 왜 싸우면 싸울수록 이길 수 없을 거라는 생각만 드는 것일까.
전사라는 부분에 대한 자긍심과 명예로 가득하던 수인 전사들의 마음이 사방에서 흔들린다.
그 견고하던 성이 흔들리는 순간 클라우스는 마력을 그대로 터트리면서 겨우 버티고 있던 수인들을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말았다.
“크아아아악!!”
“캬악! 캬아아악!!”
고함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들이 수인들의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온다.
거리를 좁히려고 들어가면 귀신 같이 날아온 마력에 의해 그대로 몸에 구멍이 뚫리고.
그 마력에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나면 창날에 가슴이 꿰뚫리거나 목에 혈선이 그려졌다.
아무리 그들이 뛰어난 전사라고 해도, 엄청난 훈련을 거쳐 그 어떤 강자라고 해도 무리를 지어 기어코 사냥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해도.
결국 개는 개일 뿐이다. 호랑이를, 그것도 대호(大虎)를 상대로 이길 수는 없다.
“아, 안 되겠소. 이러다가 전멸이오! 그대는 남은 전사들을 이끌고 얼른 돌아가시오. 어서!”
“그대는 어쩌려고 그러는 것이란 말이오!!”
“젊은 것들이 죽어나가는 와중에 늙은이 혼자 도망쳐서 뭐하겠소! 휘하 전사들을 이끌고 시간을 끌 터이니 남은 동족들을 데리고 얼른 돌아가시오!”
기습을 맡은 부족장 중 가장 권위가 있던 부족장이 다급히 앞으로 나섰다.
잘못 생각했다, 이런 일이 가능할 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설마 인간 하나에게 수인들이, 그것도 숙련된 전사들이 말 그대로 학살을 당할 줄이야.
클라우스라는 남자가 뛰어난 전사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당장 수인 사회에서 한때는 최강이라고 불렸던 호랑이 수인, 카엘라도 그 엄청난 모습에 반하여 수인 사회를 나와 인간 왕국으로 향하지 않았던가.
때문에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포위진을 짰고 방심하지 않고 사냥에 임했다.
하지만 사냥을 당하는 쪽은 저 인간이 아닌 자신들이었다.
도망칠 수 없도록 만든 다음 하나씩, 하나씩 재미를 보면서 숨통을 끊고 있다.
자비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말 그대로 잔혹한 학살자의 모습을 마음껏 내보인다.
솔직히 말해서 이 수인 전사들이 자신에게 뭔가 해를 끼친 일은 없다.
오히려 직접 죽이고 싶은 자들은 저들의 뒤에 숨어있는 인간 귀족들이다.
그렇기에 굳이 따지자면 아무런 이득도, 이유도 없는 살생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전쟁에 무고한 이는 없다고 했지.”
콰직!-
앞을 막아섰던 부족장의 머리통을 그대로 밟아 으깨면서 클라우스가 중얼거린다.
조금 전까지 기세 좋게 달려들었던 전사들은 시간을 끌기 위한 목적을 띠고 있던 자들을 제외하고 전원 자신들의 땅으로 도주했다.
그래도 후퇴하는 와중에 완전히 흩어져서 도망친 게 아니라 일사분란하게, 가장 가까운 거리로 잡아서 각각 조를 이루어서 퇴각했다.
진짜배기는 싸울 때가 아니라 물러날 때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던가.
이들이 정말 후방 기습을 성공했다면 장담하건데 제국에 남은 마족 병사들은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고 그들의 책임자인 에슐리 역시 부상을 입었을 게 확실했다.
후우, 숨을 내뱉은 클라우스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인 전사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로 일대가 온통 붉게 물들었다.
곳곳에 피 웅덩이가 만들어져 기괴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으며 코를 찌르는 혈향과 죽음의 냄새가 온 사방을 뒤덮었다.
“난 너희들을 포로로 붙잡아서 심문하느니, 정보를 캐느니 그럴 생각이 없어.”
“….”
“그러니까 최대한 저항해라. 전사답게 싸우다 죽어. 이게 너희들에게 베푸는 나만의 자비다.”
동족들을 위해 뒤에 남기로 한 전사들을 향해 그렇게 중얼거린다.
저들을 얕봐서가 아니라 전사들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내비치는 것이다.
수인 전사들 역시 자신들이 이길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확실히 깨달았지만, 어차피 몸을 돌려 달아나도 죽는 건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럴 바에 전사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싸우다가 죽는 게 맞다고 여겼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인간의 클라우스!”
“마지막 인사라면 들어는 줄 수 있는데. 뭐지?”
“정말로 후회는 없습니까?! 이전 전쟁에서 마족들의 손에 넘어갈 뻔한 서부를 구한 게 바로 당신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가장 앞장서서 서부를 공격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일에 대해….”
“없어. 후회 따위 안 해. 왜 그런지 아나?”
수인들의 시체를 타고 넘어 살아남은 자들 앞으로 천천히 다가간다.
그 참혹한 살육의 현장에서 피 한 방울 튀지 않은 모습을 한 채.
클라우스는 냉소를 머금고는 제 말을 이어나간다.
“내가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봤거든. 정말 안 해본 게 없어. 그 결과, 서부를 버리는 게 가장 후회가 덜 되는 일이더라고.”
“그게 무슨….”
“다 해보고 결정한 일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의문 가지지 말고 그냥 싸우다가 죽으면 된다는 소리다, 제군들.”
* * * * * * * * * *
기대를 걸고 시작된 기습 작전은 완벽하게 실패로 돌아갔다.
동료들의 희생으로 겨우 살아 돌아온 전사들은 처음 나아갔던 전사들의 2할도 안 되는.
말 그대로 초라하기 짝이 없는 숫자라고 할 수 있었다.
기습이란 게 항상 성공하는 것이 아니니 일이 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당연히 했다.
하지만 그 실패가 동부의 정규군과 붙어서 당한 패배고 아니고.
고작 인간 하나와 부딪쳐서, 그리고 그 인간 하나를 당해내지 못 해서 치르게 된 대가라고 생각하니 수인들 입장에서는 더더욱 참혹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클라우스에게서 소식을 들은 페르디난트는 수인들이 자신들의 뒤를 노렸다가 역으로 모조리 참살 당했다는 사실을 대놓고 병사들에게 공표했다.
단순히 마족 병사들만 듣는 게 아니라, 이 근처에 숨어있을 지도 모르는 요정 측 정탐병도 확실하게 들으라는 듯이 말이다.
‘이, 이런 일이… 수인 놈들이 왜 나섰다가 그런….’
클라우스와 페르디난트가 예상한 대로 그 정보는 얼마 후 요정들 귀에 들어갔다.
그들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소식일 수밖에 없다.
자신들이 이렇게 버티는 이유는 전쟁에서 이기기 위함이 절대 아니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자신들에게 보다 유리한 협상의 여지를 남기기 위함인데.
이런 식이면 요정들로서는 그나마 믿을 수 있는 한 기둥을 잃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여유로웠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조급함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 조급함은 은연중에 계속 커지고 커져, 마침내 그들 스스로에게 비수를 꽂는 것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