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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가 비선실세-297화 (297/341)

〈 297화 〉 29장 - 머지않았다

수인 전사들은 영민하게 기습 준비에 들어갔다.

적들은 일대에 다수의 정찰병을 운용하면서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르는 기습에 대비 중이다.

어쭙잖은 기습을 펼쳤다가는 역으로 정보가 새서 포위 격멸될 수도 있다.

해서 수인 전사들은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않기기 위해 소수의 전사들이 각자 다른 길로 퍼져 나갔다가 약속한 시간에 한 곳에 모여 제국 쪽의 마족들을 공격하기로 했다.

“만약 일이 잘못된다면, 집결 지점과 반대 방향으로 달아나면서 적들을 유인토록 한다.”

“정해진 시간까지 아군이 도착하지 못 하면 모인 전사들로 기습을 감행하며.”

“전원 최후를 각오하는 것이 아닌, 최대한의 피해를 주고 물러나는 것을 절대 목표로 한다.”

쓸데없이 병력을 희생시키는 미련한 짓 따위 수인들은 전혀 할 생각이 없었다.

왕국과 제국이 넘어간 이상 이제는 자신들과 요정들만의 힘으로 동부에 왕국과 제국까지 더해진 거대한 세력과 싸움을 이어가야만 한다.

괜스레 승리에 집착하여 피해를 볼 이유가 전혀 없다.

최대한 아군의 전력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적들에게는 많은 피해를 입혀야 한다.

그런 방식으로 소모전을 강요하면 결국 저들이 먼저 협상의 뜻을 내밀 것이다.

수인들 역시 자신들이 이제는 마족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이미 왕국이 통째로 넘어간 이상 마족들은 가장 든든한 자원 지대를 얻은 것이 된다.

그리고 제국까지 점령했으니 자신들을 압박할 교두보도 역시 마련된 것과 마찬가지.

전쟁에서는 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최소한 전투에서라도 이겨야 한다.

그래서 자신들이 비록 패배는 정해져있다고 하지만 그 전에 이곳으로 오는 자들 역시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고 강력하게 경고를 해야 한다.

그런 식이면 마족들도 분명 나쁘지 않은 조건에서 항복을 요구할 것이다.

1차 대륙 전쟁에서도 그런 식으로 전쟁이 끝났고, 요정 측의 벨라루스 가문 역시 그런 마왕과 연이 있어서 포로들이 전부 풀려나기까지 했다.

“우리들의 행동 하나, 하나에 부족들의 미래가 달려있소이다. 반드시 적들이 움츠러들 만한 성과를 내야 하니 절대 방심하지 말고 철저하게 임하시오.”

남아서 방어를 맡을 부족장들의 격려를 들으면서 전사들이 빠르게 수풀 사이로 사라진다.

흔적조차 거의 남기지 않으면서 엄청난 속도로 내달리는 수인 전사들.

마족 측 인원들이 원거리에서는 요정들을 경계하고, 근거리 전투에서는 수인들을 경계하는 데에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처음에는 수십이었던 것 같은 전사들이 어느 지점에서 수백이 모이고, 다시 그대로 흩어져서 다음 집결지까지 이동한다.

그 모습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게 얼마나 많은 훈련을 거쳤는지 한 눈에 들어왔다.

인간들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 할 개개인의 전투력을 지니고 있는데다가, 거기에 개인 전투를 고수하는 게 아니라 대규모 전투를 생각한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었다.

샤샤샤샤!!-

주변에 마족 정찰병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사방을 살피고 있음에도.

수인 전사들은 그런 감시의 눈길을 어렵지 않게 통과해내고 말았다.

원래부터 신체적 능력이 발군이기도 하고 이 인근 지역은 마족들보다 수인들이 훨씬 더 잘 알고 있는 지역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마족 정찰병들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했음에도 뚫린 것이니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세상에는 무슨 수를 써서도 결국 어쩔 수 없는 일들이란 게 있는 법이었다.

‘좋아, 이대로 계속 들어가면 제국 영토다. 그곳에 가서 남아있는 마족 병사들과 지휘관을 모두 처리하고 제국을 뒤흔들면 필히 마족 본대는 흔들릴 수밖에 없을 터! 요정 녀석들도 그 변화를 눈치 채고 알아서 그들과 제대로 된 전투를 치러 큰 피해를 주려고 할 것이다.’

요정들과 함께 직접적으로 전투에 참여하는 방식은 아니지만.

이런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도울 수 있다는 것이 수인들의 생각이었다.

자신들이 이전 왕국에서 대패한 것처럼 마족들도 대패를 한 번 겪는다면 이 전쟁에서 어느 정도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도 있다는 게 이들의 결론.

수인 전사들은 쉬지 않고 계속해서 이동했다.

도중에 정찰병들을 만나기도 하고 경계병들을 발견하기도 했지만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그들과 접촉하거나 교전을 벌이지 않았다.

저들 역시 마왕이 골라낸 정예병들이니 어떤 대처를 할지 모른다.

괜한 전투의 유혹 때문에 일을 그르치면 부족들을 볼 낯이 없다.

자신들의 이 공격 한 번에 정말 많은 것이 걸려있는 만큼 함부로 나설 수는 없는 법이었다.

‘너무 안타깝게 여기지 마라, 마족의 전사들이여. 세상에는 어찌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전사들을 이끄는 부족장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집결지가 머지않았음을 깨달았다.

과연 몇이나 되는 전사들이 안전하게 이곳까지 도착했을까.

못 해도 7할 이상은 집결해야 제대로 된 공격을 가해서 큰 피해를 줄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던 부족장들은 곧 예상 이상의 결과를 전해 들었다.

집결지에 모인 전사들을 파악하니 거의 모든 전사들이 제시간에 모인 것이다.

몇몇 이들은 적들의 정찰병들에게 꼬리를 밟혀 급히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고 한다.

그 부분이 아쉽기는 했지만 3할 정도는 공격에 가담하지 못 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9할이 넘어가는 전사들이 모였다니 최고의 결과였다.

“하늘이 우리를 돕는군. 어서들 갑시다.”

“이 정도 숫자라면 제국에 있는 마족 병사들을 모두 칠 수 있을 것이오.”

못 해도 수백은 족히 넘는 수인 전사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적 본대와는 거리가 멀고 반대로 적들의 후방과는 거리가 가깝다.

이대로 적들을 향해 총 공세를 가한다면 이번 작전은 성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늘이 너희를 돕는 게 아니라 하늘이 그냥 버린 것 같은데?”

하지만 그들 모두가 막 제국으로 뛰어들려고 하는 순간.

바로 앞에서 누군가가 창을 어깨에 기댄 채로 앉아 그렇게 중얼거렸다.

복장도, 생김새도, 전혀 수인 전사들과는 거리가 먼 정체불명의 남자.

그의 접근을 눈치조차 해지 못 한 수인들은 다급히 주변을 살폈다.

혹시나 자신들이 발각되어 여태껏 적의 함정에 놀아났나 싶은 것이었다.

하지만 주변에 보이는 건 서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같은 수인 전사들이 전부다.

지금 그들 눈에 보이는 적은 오직 바로 앞에 앉아있는 한 명의 인간이 끝이었다.

“도대체 언제 오나 싶었다. 이런 기다림은 몇 번을 반복해도 적응이 안 되거든.”

그렇게 중얼거리며 남자가 창을 쥔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 남자를 바라보던 부족장들은 재빠르게 손짓과 눈짓으로 일부는 저 적을 상대하고 나머지는 원래 계획대로 제국에 남은 마족들을 유린하라는 뜻을 내비쳤다.

멍청하게 저 한 명에 온 전사들이 매달릴 이유가 전혀 없다.

만약 저 남자의 목적이 자신들을 붙잡고 시간을 끄는 것이라면 절대 당해서는 안 된다.

해서 부족장들이 각자의 전사들에게 그런 명령을 내리려는 찰나.

그 중 하나가 탄식을 내뱉더니 설마, 하는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연다.

“왕국 남부 사령관, 클라우스… 아닌가?”

“그 사령관 자리 빼앗긴지 몇 년인데 아직도 사령관 자리를 찾는 거냐.”

“…역시. 그대가 맞았군. 인간 측 최고의 전사라고 하는 그 클라우스!”

한 부족장의 입에서 그 이름이 튀어나오자 수인 전사들 대부분이 발걸음을 멈췄다.

잘못 들은 게 아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언급한 부족장이 잘못 봤을 리도 없다.

부족장들은 대부분 1차 대륙 전쟁에서 직접 싸웠던 경험이 있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 전장에서 클라우스라고 하는 인물과 한 번 이상은 마주쳤을 것이다.

“최고인지도 모르겠고 전사인지도 모르겠네. 죄다 너희들 마음대로 가져다 붙인 게 대부분이라서. 영웅이라고 불렀다가 배신자라고 불렀다가. 참 대단한 인생이지? 뭔 몇 년 사이에 이렇게 평가가 바뀌는 걸 보니까.”

사박사박-.

천천히 걸음을 옮겨 수인 전사들 앞까지 다가온 클라우스는 창으로 그들을 겨누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까딱해 보이며 슬쩍 뒤를 가리켰다.

“너희가 노리는 게 저 뒤에 있는 후방이겠지. 가고 싶으면 가. 난 안 붙잡는다.”

“….”

“안 붙잡고, 먼저 남은 놈들부터 싹 다 죽인 다음에, 그 다음에 쫓아가서 도망친 놈들을 하나씩 쳐죽일 생각이다.”

클라우스의 말에 수인 전사들이 일제히 반응을 보인다.

‘도망친 놈들’ 이라는 그 단어 하나에 모든 이들이 적의를 내보이고 있다.

스스로를 명예로운 전사라고 여기는 수인들 앞에서 도망이라는 말은 그들이 들을 수 있는 모욕 중에서도 가장 최악의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심지어 이쪽은 수백이 가뿐하게 넘어가고 저쪽은 고작 하나가 전부인데.

너무나도 평온하게 남은 놈들부터 죽이고 그 다음 놈들은 쫓아가서 죽이겠다고 하는 저 오만함이 심히 마음에 걸렸다.

“…부족장. 어쩝니까.”

송곳니를 드러낸 채 당장이라도 클라우스에게 달려들 것 같은 전사들.

하지만 명령체계를 무시할 정도로 글러먹은 자들이 결코 아니다.

분노는 분노이고, 명령은 명령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휘를 맡고 있는 부족장에게 뜻을 물었다.

이대로 일부만 남기고 나머지는 그대로 계획대로 움직이느냐.

아니면 자신들을 모욕한 저 인간을, 피해를 입는 걸 감수하고 처리하느냐.

그 사이에서 전사들은 부족장들이 답을 내놓기를 바라고 있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하지만 문제는, 클라우스가 그런 시간까지 줄 정도로 친절하지도 않다는 점.

팔자 좋게 논의 좀 하라고 팔짱 끼고 기다려줄 멍청한 악당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결정은 너희가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하는 거다.”

사박-.

풀을 밟는 소리, 발을 떼는 움직임과 거의 동시에 클라우스가 사라졌다.

그 수인 전사들조차 순간적으로 눈앞에 있던 그의 움직임을 놓쳤고.

바로 그 순간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창이 미친 듯이 움직이면서 일대에 피보라를 만들어냈다.

‘솔직히 아닌 척 하고 있었는데, 만사가 다 귀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기는 했는데.’

원래 어쩔 수 없는 게 있다고 했다.

그동안 하도 별 지랄을 다 떨면서 살다보니 이렇게 아무 것도 안 하고, 조용하게 뒤에 박혀서 보고만 있자니 온 몸이 쑤셔서 죽을 것 같았다.

여전히 쉬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 모든 게 귀찮은 건 확실하다.

하지만 정말로 아무 것도 안 하고 싶냐고 묻는다면, 클라우스는 그 중 최소한 하나 정도는 귀찮을 일이 없을 거라고 말할 수 있었다.

‘나중에 귀찮아질 놈들, 싹 다 모아서 한꺼번에 쳐죽이는 거.’

푸화아악!!-

단 한 번의 공격에 열 명이 훨씬 넘는 수인 전사들의 목에 그대로 혈선이 그어진다.

그제야 자신들에게 결정권이 없음을 깨달은 적들이 다급히 클라우스에게로 달려든다.

수인들 특유의 본능으로 깨달은 것이다.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저 남자를 죽이고 살아서 나가던가.

그게 아니면 저 남자의 손에 죽어서 육체는 없이 혼만 남아 떠돌다가 스러지던가.

둘 중 단 하나만을 택할 수 있음을 말이다.

‘율리아한테 뭐라고 할 처지는 못 되겠군.’

그냥 간단하게 에슐리에게 알렸어도 되었을 일.

하지만 클라우스는 굳이 혼자서 이 짐승들을 싸그리 정리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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