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6화 〉 29장 - 머지않았다
요정들과 수인들의 사이가 서로 좋지 않다는 건 시골 소년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누구는 그들의 강한 자존심 때문에, 또 누구는 사는 지역이 겹치기 때문에.
또 다른 누군가는 뭔 말 같지도 않은 이유를 들먹이며 그 이유를 설명하곤 했다.
그 두 종족이 바로 이웃으로 살아가면서 왜 그리도 사이가 좋지 않은지.
사실 클라우스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 했다.
요정인 나타샤와 수인인 카엘라에게 물어봐도 ‘그냥 예전부터 그랬다.’ 라는 답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 것 같은, 그야말로 철천지원수라고 오해를 할만도 하지. 하지만….’
하지만, 이들은 왕국의 귀족들처럼 바로 앞만 내다볼 수 있는 근시안을 지니지 않았다.
서로가 유쾌하지 않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의 뒤통수를 후려치면서 반복하는 행위는 공멸의 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좋은 예로 왕국이 공격을 당하자 요정들과 수인들은 바로 연합군을 결성했다.
비록 지휘권 통합은 이루지 못 해서 양분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 부분 때문에 전투에서 패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웠고, 오히려 그렇게 지휘권이 분할되어 있음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서로에게 책임을 돌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가 책임을 지려고까지 했다.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분할 줄 아는 무리들, 그게 바로 이곳 요정과 수인들이다.
그리고 현재 수인 부족장들은 한 자리에 모여서 진중한 어조로 회의 중에 있었다.
“전사들 소집은 얼마나 완료되었소?”
“이제 칠 할 이상은 전부 소집되었네. 지난 전투에서 전사한 전사들을 뺀다면 거의 모든 전사들이 전투 준비를 마친 것이지.”
“안타깝게 되었소. 그 전투에 내보낸 전사들이 얼마나 귀중한 힘이었는데.”
왕국이 무너지면 제국이라는 허수아비는 순식간일 테고.
그 직후 마족군이 들이닥치는 곳은 요정들과 수인들이 머무는 서부의 끝자락이 될 게 뻔했다.
전쟁을 어떻게든 왕국 선에서 붙잡아두는 게 좋다는 걸 이들은 알고 있었다.
당장 1차 대륙 전쟁에서의 교훈을 그들은 절대 잊지 않았다.
왕국의 인간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전쟁은 불가피한 것이고 그 전쟁이 자신들의 땅과 되도록 먼 곳에서 벌어지는 것이 자신들에게는 큰 이득이었다.
원래라면 인간들이 계속해서 성장하며 요정들과 수인들을 견제했을 테지만.
동부의 마족과 전쟁을 벌이면서 오히려 이전보다도 훨씬 더 떨어진 상태가 된 것이다.
내심 인간들을 무시하고 있던 그 두 종족으로서는 전쟁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어차피 직접적으로 피해는 보는 것은 왕국이고 자신들은 지원을 내보내면서 생색을 내거나 후일 그에 맞는 보상을 요구하면 그만이었다.
와중에 전사자와 부상자가 생기기는 했지만 어차피 전사들에게 있어서 전투는 절대 피할 수 없는 것이니 다르게 보면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볼 수 있었다.
물론 마족들의 공세가 워낙 거세서 자신들의 영토 일부에까지 전선이 형성되기도 했다.
하지만 인간 측과 비교하자면 미미한 수준이었고, 무엇보다 결국 마족들이 노리는 것은 왕국 남부의 곡창지대인지라 요정들과 수인들은 그들보다는 나은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1차 대륙 전쟁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순식간에 왕국이 돌파 당했고 급하게 보낸 지원군은 말 그대로 전멸 당했다.
왕국의 방패이자 전쟁 영웅이었던 클라우스는 마족들에게 붙었으며 왕국의 여러 귀족들까지 그와 함께 마왕에게 고개를 숙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쓰레기 같은 인간 귀족들이 한 줌도 안 되는 병사들을 데리고서 저항이니 뭐니 지껄이면서 자신들의 영토로 들어왔고 말이다.
“그들에 대한 처우는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아무리 피신한 자들이라고 하지만 결국 전부 외지인들입니다. 심지어 요정도 아니고 인간이지요. 우리 신성한 땅이 저들의 역겨운 냄새로 도배되는 건 싫습니다. 차라리 요정이 낫지.”
수인들과 요정들의 사이가 좋지 않은 건 결국 서로를 경쟁상대로 인지하고 있다는 거다.
반대로 인간에 대해서는 수인도, 요정도 똑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다.
자신들과 겸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저열한 하급 종족으로 생각했다.
솔직히 당장이라도 내쫓고 싶은 것이 수인 전사들의 속마음이다.
허나 그들을 내쫓을 생각이었다면 애당초 받아들이는 것 자체를 하지 말아야 했다.
저들이 이곳까지 들어오면서 이곳의 지리를 파악하고 있다면 매우 큰 문제다.
해서 수인 전사들은 끝내 인간들을 내치지 못 했다.
그저 감시가 용이한 장소에 그들을 모아두고 마치 대우하는 것처럼 속였을 뿐이다.
어차피 도움도 되지 않는 떨거지들, 실컷 이용하다가 결국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데도 여전히 자신들은 배신을 당했네 하고 헛소리를 하는 작자들이었다.
자리에 모인 부족장들은 이 전쟁이 끝나기만 하면 그 역겨운 것들을 당장 내쫓을 생각이었다.
괜히 오래 머물게 해서 그들의 더러운 냄새가 자신들의 땅에 밸까 우려스러웠다.
“요정들은 아무래도 자신들끼리 전투를 치를 모양이오.”
“지원 요청이 없었으니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맞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이렇게 넋 놓고 지켜보기만 할 겁니까? 만에 하나 그 요정이 무너지면 다음은 우리입니다.”
“우리 수인 전사들은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소. 요정이 무너지면 우리가 싸워서 이기면 그만인데 뭐 그리 걱정을 한단 말이오?”
“나는 그 다음을 생각하자는 겁니다. 요정들은 우리 수인들의 영토로 들어오는 땅 중간에 위치하여 아주 튼튼한 방패 역할을 할 수 있소. 여태 왕국이 해주던 역할을 이제는 요정이 대신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렇게 넋을 놓고 있다가 그들이 만에 하나 싸움에서 패배하여 길이 열린다거나 항복이라도 한다면 우리들로서는 힘겨운 전투를 해야 할 것이오.”
“전사들은 강합니다. 싸우다가 죽을 준비도 되어 있지요. 아무리 마족이라고 해도….”
“그들 사이에 누가 있는지 정녕 잊은 거요?”
한 부족장의 말에 다른 이들 전원이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수인들은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 자체를 경멸할 정도로 강함에 대한 집착이 크다.
그럼에도 이렇게 두려운 모습을 숨기지 않으면서 침묵을 유지하는 것.
그 부족장이 말한 ‘그 누군가’ 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가 그대로 드러났다.
정작 그 남자가 있던 왕국의 귀족들은 그렇게도 무시하고 또 잊으려고 했건만.
그 왕국과 가장 먼 곳에 있는 수인들이 그 남자를 가장 고평가하고 또 경계하고 있었다.
“분명 그 인간 남자, 클라우스가 끼어있다고 했소. 그렇다면 일단 전투에서 반은 지고 들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오. 내 말이 틀립니까?”
“….”
“동의하오.”
“나 역시 동의하는 바요. 반 정도면 다행이겠지.”
냉철하게 상황을 인식하고 판단하며 사실을 받아들인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되면 몇몇 이들은 과하게 낙천적이 되거나 헛된 희망을 품곤 했는데.
수인 측 부족장들은 아주 냉정하게 적과 자신의 수준을 비교하면서 결론을 내렸다.
“전해진 소식에 따르면 요정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마족군 측에 클라우스가 있는 것 같다고 했소. 그게 아니라면 제국에 주둔 중인 나머지 병력 속에 속해있겠고.”
“내가 보기에 클라우스라면 분명 전선에 나선 군 안에 있을 거요. 그 인간이 설마 전장을 마다하고 후방으로 물러나서 잡다한 일이나 할 인간으로 보이는 건 아니겠지요?”
“동의하오. 나 역시 클라우스, 그 인간은 현재 우리 바로 앞까지 쳐들어온 마족들 사이에 있다고 확신하오.”
“허면 그 군대와 직접적으로 교전을 벌이는 건 피해야겠군.”
“당연히 피해야 하오. 그렇지 않아도 왕국에서의 패전이 뼈아픈 판국에 시작부터 또 지고 들어간다면 제아무리 전사들이라고 해더 위축이 될 수밖에 없소이다.”
최정예 수인 전사들은 태반이 전사하였고 나머지는 포로가 되었다.
그나마 벨라루스라는 요정 가문의 포로들이 돌아왔고, 그들에 의해 일단 포로들이 잘 살아있음을 확인했지만 그들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이 하나도 없었다.
결국 지금의 전사들로 승부를 봐야 한다는 것인데, 최정예 전사들로도 상대가 안 된 마당에 그들보다 조금씩 떨어지는 전사들로 전면전을 벌였다는 백전백패가 확실했다.
지도를 살피던 부족장들은 곧 결론 하나를 내렸다.
요정들의 지원이 없으니 공식적으로 그들을 돕지는 않지만, 비공식적으로 전사들을 움직여서 그들을 도울 좋은 방법이 나온 것이다.
“어차피 군대란 계속 소모만 하는 집단. 적들이 병력 일부를 제국에 놓아둔 것은 원활한 보급을 위해서 그 길을 확보하기 위함일 것이 확실하오.”
“요정들이 적들을 막는 동안 우리들은 전사들을 이끌고 역으로 제국의 남은 마족들을 쳐죽입시다. 그리고 보급로를 끊거나 후방이 안전하지 않다는 걸 알려준다면 저들로서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을 것이오.”
의견이 나오자 수인 부족장들은 결론을 내리는 것을 질질 끌지 않았다.
회의는 빠르게, 안건은 간단하게, 주장은 간결하게, 그리고 결론은 무조건.
수인 부족장들의 철칙은 이번에도 아주 확실하게 지켜졌다.
“허면 전사들을 이끌고 야음을 틈타 은밀하게 제국 측으로 이동합시다. 어차피 적의 주력은 대부분 요정들 영토에 있으니 회군하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오.”
“기습이기에 무엇보다 속도가 중요하오. 혹여나 공을 더 세우려고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될 것이오. 지금 상황에서는 전사 하나, 하나의 목숨이 무엇보다 소중하오.”
왕국 측 귀족들과는 차원이 다른 생각, 그리고 결단력.
수인 부족장들은 결론이 나자 자리에서 일어나 재빠르게 준비를 마쳤다.
누구는 직접 전사들과 함께 나설 준비를 했고, 또 누군가는 계속해서 적 본대의 움직임을 확인하기 위하여 정찰조를 자원하기도 했다.
수인들의 준비는 철저했고 행하고자 하는 일들은 분명 옳았다.
실제로 후방에 남은 에슐리 휘하의 병력은 페르디난트가 이끌고 있는 본대에 비하면 너무나도 초라한 한 줌 병력이 전부였으니까.
“….”
하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참으로 통탄스러운 것이, 요정이라고 하여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던 요정 정찰병이 벨라루스 가문으로 내달렸다는 것이었다.
수인들의 움직임을 확인한 벨라루스의 가주가 미소를 지으면서 그 소식을 아주 상세하게 서신에 적어 또 다시 누군가에게로 전서구를 날린다.
그리고 그 전서구는 깃털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하게 마족 본대에까지 다다랐다.
“드디어 움직이나….”
클라우스는 그 서신을 받아들고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확실히 왕국의 머저리 귀족들에 비하면 요정들이나 수인 측의 집권 세력은 나은 수준이었다.
제대로 된 계획을 내서 뭔가를 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고 실행력도 갖추고 있다.
또한 남들을 그저 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필요할 때에는 자신들이 직접 나설 준비까지도 하고 있었다.
‘그게 역으로 너희들의 발목을 옥죄는 올무가 될 줄은 꿈에도 모르겠지.’
지극히 단순해 보이는 함정, 올무.
지나가다가 발목이 들어가서 그대로 걸려 넘어지게 된다.
그 함정에 걸려든 짐승은 어떻게든 그 단순한 것에서 벗어나려고 힘껏 발버둥을 치겠지만.
올무는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욱 옥죄어 들어오는, 상당히 잔혹한 함정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올무를, 수인 전사들이 그대로 뒤집어쓰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