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3화 〉 28장 - 체하지 않도록
“가주님. 이번에 다른 가문들에서 보낸 서신들입니다.”
“뭐라고 쓰여 있던가요.”
“대부분이 요정들의 영광을 위하여 병력 소집에 재차 응해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입니다.”
“같이 죽자는 말을 참 멋지게도 하네요. 그렇게 알아듣게 설명을 했건만.”
한심해 죽겠다는 듯 혀를 차면서 이마를 부여잡는 이는 다름 아닌 나타샤.
이번에 새로이 벨라루스의 가주가 되었는데, 이전과 같이 혈족들에게서 가주로 추대된 것이 아니라 거의 무력으로 가주 자리를 차지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었다.
왜 ‘거의’ 라는 부분이 붙는가, 그건 힘으로 전대 가주를 끌어내리기는 했으나 또 그녀의 가주 직위를 인정하는 이들이 벨라루스 가문 내부에서는 물론이고 외부에서도 많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부분 때문에 다른 요정 가문들이 쉽사리 벨라루스를 적대시하지 못 했다.
그동안 ‘돈’ 이라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맹독을 풀어둔 덕분일까.
나타샤는 전에는 전혀 느끼지 못 했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설마 요정들마저도 결국 물질적인 풍요에 넘어갈 거라고는, 예전이라면 정말 상상도 못 했을 텐데.’
솔직히 나타샤도 긴가민가했던 것이 사실이다.
클라우스가 말하기를, 돈을 풍족하게 풀다보면 자연스레 아군이 생길 것이고.
네가 위험해지는 것 같다 싶으면 바로 그 돈을 받은 이들이 나설 거라고 했다.
그에 나타샤는 돈이란 어차피 받아먹기만 하면 그만일 텐데 왜 그들이 나서겠냐고 물었고.
나타샤의 질문에 클라우스는 조소를 머금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배신을 했다가는 자신까지 같이 붙어먹었다는 게 금방 탄로 날 것이고, 생각을 해보면 그렇게 내 편을 들어서 후일 더 많은 지원을 받는 게 더 이득이라고 생각할 거라고 했지.’
실제로 많은 요정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또 행동했다.
다른 가문들의 회유나 협박에 넘어가서 나타샤를 배신한 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뿌리치며 나타샤는 합당한 벨라루스의 가주가 맞으니 인정을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덕분에 연합군이 박살나고 이후 벨라루스의 포로들만 무사귀환을 했을 때.
그래서 요정들의 민심이 사나워졌을 때도 나타샤는 당당하게 있을 수 있었다.
너희도 부러우면 마왕과 친하게 지내라고, 자존심 좀 굽히면 마왕 역시 우리들을 대우해주겠다고 저렇게 호의를 보이는데 왜 자꾸 고개를 치켜드는 것이냐고.
결국 요정 가문들은 벨라루스의 일을 전부 넘어가기로 했다.
당연히 완전히 넘어가는 건 아니고, 이번 전란이 끝나면 다시 벨라루스를 건드릴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리 했다가 내부에서부터 무너질 확률이 무척 높으니 자중하자는 의견이 나온 게 분명해보였다.
“그들이 요청하는 병력 수는요?”
“적들이 코앞까지 들이닥쳤다고 하며 가문을 지키는 최소한의 병력 이외에는 전부 차출해달라고 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번에 포로로 있다가 풀려나서 휴식 중인 이들도 전부 다요.”
“너무하네요. 그 처절했던 전장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자들인데 후방으로 빼주기는커녕 다시 전장으로 내몰라? 그걸 우리가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할까요?”
“제 소견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무리한 요구를 하고 나서 우리 벨라루스가 수긍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또 한 번 요정 사회에 협력하지 않는다는 구실로 삼으려는 건 아닐까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 요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나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현재 나타샤 앞에 서서 보고를 하고 있는 저 요정 남성은, 사실 이전 전투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벨라루스의 일원이었다.
원래는 다른 동족들과 함께 왕국에서 노역을 하면서 고된 일상을 보내야 했을 테지만, 마왕의 자비로 인해 다른 벨라루스의 이들과 함께 풀려난 인원이었다.
기존에 이미 나타샤의 편이었던 그는 그 일을 계기로 완벽하게 화친파로 돌아섰다.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자들은 심기일전 한다면 충분히 마족들을 깨부술 수 있다고 말한다.
당시에는 우리들의 땅을 지키겠다는 간절함도 없었고, 수인들과 함께 있어서 지휘권도 양분되어 있었으며 배신한 왕국군도 있었기에 전투가 힘들다는 게 주된 주장이었다.
그 말들을 생각하면 나타샤 앞의 요정은 그 주둥이를 찢어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전쟁을 하자고 외치는 건 가문의 늙은 요정들인데, 죽어나가는 건 자신과 같은 젊은이들이다.
왜 저들이 정한 전쟁에서 정작 피 흘리는 것은 자신들이어야 한단 말인가.
저들은 모를 것이다, 아마 영원히, 죽을 때까지 모를 것이다.
마족들이 얼마나 강했는지, 분명 유리한 상황이었음에도 단 한 번의 뒤틀림으로 모든 것이 뒤집어졌고 마치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무너졌다는 것을.
그리고 이번에도 아마 그렇게 될 가능성이 무척 높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솔직히 제 개인적인 의견은 반대입니다. 생환자들을 다시 보내는 것은 물론이고, 그냥 저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기다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고, 벨라루스를 생각한다면 결국 나설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앞일이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니까. 당신 말이 맞아요. 아무리 확신이 있다고 해도 이곳은 요정들의 땅이니 그들의 뜻에 반해서 좋을 게 단 하나도 없죠.”
고개를 끄덕인 나타샤는 이제 그만 가봐도 된다고 손짓을 해보였다.
그에 남성 요정이 고개를 숙이고는 집무실 바깥으로 사라지자 나타샤는 후우, 한숨을 흘리고는 의자의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기대었다.
최근 소식에 의하면 마족들이 제국 황성을 점령하고 병력을 둘로 나누어 한 부대는 제국 영토에 남고, 다른 한 부대는 곧장 내달려서 요정들의 영토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고 한다.
그들을 지휘하는 자는 페르디난트 엘세라는 마족으로, 이전 1차 대륙 전쟁에서 나름 괜찮은 전공을 세웠으며 이번 2차 대륙 전쟁에서는 왕국 남부를 돌파한 인물이라고 했다.
‘분명 클라우스님도 껴있다고 했는데, 제국 황성을 점령한 후로 흔적이 끊어졌어.’
현재 요정들이 요주의 인물로 꼽는 인물은 당연히 클라우스다.
전권을 쥐고 있는 건 페르디난트라고 하지만 기만책일 가능성이 높다.
방심하게 유도하고 함부로 병력을 움직이게 만든 후, 바로 나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전 전투에서 회전을 지휘한 인물 중 하나가 클라우스였다.
정예 중의 정예들로 꾸린 연합군을 완전히 전멸 시켜버린 인물이라는 말이다.
당연히 요정들 입장에서는 페르디난트보다 클라우스를 더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클라우스가 어느 순간 모습을 감추었다고 한다.
막사에서도 보이지 않고, 페르디난트 곁에도 없고, 어디 숨은 것 같지도 않고.
해서 요정 정찰병들은 그가 제국 황성에서 머무르고 있거나 혹은 무슨 일이 생겨서 점령한 왕국으로 돌아간 것은 아닐까 예상하고 있었다.
“…외로워.”
클라우스를 떠올리던 나타샤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말을 내뱉고 말았다.
당연히 혼자 놀라서는 허둥거리면서 ‘내가 왜 이래?!’ 라고 중얼거리는 찰나.
창가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곧 킥킥, 하는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외로워도 혼자 하지는 마라, 나타샤. 벨라루스의 가주님이 그래도 고귀한 부분을 좀 지녀야지, 혼자 하다가 걸리면 그것만큼 망신인 경우도 없을 거다.”
그 말이 들리자마자 나타샤는 반사적으로 검을 잡고서 훌쩍 몸을 날려 거리를 벌렸다.
확률이 희박하기는 하지만, 자신에게 불만을 품은 이가 암살자를 보낼 수도 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당한다는 건 생각도 해본 적이 없는 나타샤이지만, 암살자들이 제 기척을 지우는 건 숙련된 전사조차도 감지하기 힘들어하는 것 중 하나다.
때문에 만에 하나를 대비해서 항상 검을 옆에 두고 있었는데, 몸을 날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은 나타샤였다.
‘…암살자가 비수를 날리기도 전에 말을 하는 경우가 있나?’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나타샤는 바로 검을 내렸다.
말을 하기 전까지 자신조차도 그 기척을 탐지하지 못 할 정도의 실력.
헌데 자신을 해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그냥 차 한 잔 마시러 온 것 같은 가벼움.
마지막으로 절대 지울 수 없는, 뇌리에 확연히 박혀있는 목소리까지.
“…클라우스님.”
“고생 많네, 나타샤. 여기 오면서 살펴보니까 요정들이 네게 아주 이를 갈고 있더라고.”
그리 말한 남자가 훌쩍 날아와서는 가볍게 그녀를 안아준다.
이렇게 먼저 속내를 드러내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클라우스임을 잘 알고 있다.
헌데 그 남자가 이렇게 먼저 다가와서 안아주니, 나타샤는 여태까지의 기다림과 고생이 한꺼번에 보상 받는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무척이나 그리웠던 남자의 온기를, 행복한 미소를 지으면서 가득 느끼고 있던 요정 여인.
하지만 곧 그가 자신을 찾은 이유가 있을 거라는 걸 떠올리고는 급히 품에서 빠져나온다.
“…아, 아아. 앉으세요. 차라도 한 잔 내올게요.”
“그러면 한 잔 부탁할까.”
아주 자연스럽게 나타샤의 자리에 앉는 클라우스.
그러는 사이 나타샤는 직접 차를 끓여서 그의 바로 앞에 내려놓았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고 말로는 다 형용할 수 없는 향긋한 냄새가 피어오른다.
정확히 무슨 차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최고급 차인 것만큼은 분명했다.
“드셔보세요. 벨라루스 가주들만 마시는 차인데, 아카데미에서 드시던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좋은 차에요.”
“…그러네. 내가 차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이건 정말 괜찮군.”
클라우스의 말에 나타샤는 그렇죠? 하고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살그머니 앞에 다가와서는 그의 무릎에 턱을 괴고는, 마치 얼른 쓰다듬어 달라고 보채는 고양이처럼 그를 말없이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그런 요정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겠다는 듯 클라우스는 손을 뻗어서 나타샤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다가 볼을 조심스레 만져주었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짧으면 두 달, 길어도 네 달 안으로 모든 게 끝날 거야. 그동안 내 무리한 부탁을 들어준다고 정말 고생 많았어, 나타샤.”
“아니에요. 오히려 저도 무척이나 즐겼는걸요. 설마 얼마 전까지 가문의 문제아였던 제가 힘으로 가주 자리를 취하고 또 인정까지 받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에요.”
“그렇게라도 말해주니 조금은 안심이 좀 되네. 여전히 미안한 건 사실이지만.”
달칵-.
찻잔을 내려둔 클라우스는 나타샤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과장 하나 안 보태고 깃털처럼 가벼운 여인을 들어서는 자신의 무릎 위에 올라타게 만든 후 바로 앞까지 끌어당겼다.
“아….”
“뭐야. 꽤나 굶었을 텐데 바로 하자고 안 덤비고.”
“크, 클라우스님은 이제 마왕 전하의 반려이니까… 다른 여인들을 함부로 안으면 곤란해지실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요.”
“그렇기는 하지. 그럴 수밖에 없고말고. 하지만 여기는 마왕성도 아니고, 근처에 율리아가 있는 건 더더욱 아니지. 무엇보다 네가 여태 고생을 했으니 그 정도 상은 받아도 될 거라고. 아마 율리아도 그렇게 말할 것 같은데.”
물론 얼굴 표정은 뚱해서는 입술을 삐죽일 테지만 말이다.
한편, 클라우스의 말에 확실히 고민이 되는 것인지 입술을 살짝 깨무는 나타샤.
여태껏 그가 얼른 이 모든 것을 끝내주기를 기다리면서 버티고 또 버텨왔다.
혼자서 위로하는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지만, 그건 아무래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님을 기다리는데 그걸 견디지 못 하고 바람이라고 피는 느낌이랄까?
“으으읏….”
어쩔 줄 몰라 하는 요정 여인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흘리던 클라우스.
하지만 곧 표정을 정리하고서는 자신이 여기까지 온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타샤 벨라루스.”
“네, 클라우스님.”
“저들이 원하는 대로, 다른 요정들이 원하는 대로 해줘. 벨라루스에서 다시 병력을 차출해.”
“아….”
“대신.”
나타샤의 입술을 만지작거리면서, 클라우스는 말을 이어나갔다.
“희생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받을 것이라고, 강하게 나가도록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