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2화 〉 28장 - 체하지 않도록
1차 대륙 전쟁에서 클라우스와도 나름 잘 싸웠던 페르디난트답게, 병력을 매우 유동적으로 움직여서 적들의 시선을 완벽하게 자신들에게 집중시켰다.
그러는 동안 에슐리는 가려 뽑은 병사들과 함께 기어코 남쪽의 성벽을 넘어 황성 안으로 진입하는 데에 성공하고야 말았다.
빠르게 안으로 진입한 그들은 무기고나 병영과 같이 민간인 피해는 거의 없지만 혼란을 줄 수 있는 곳에 불을 내고서 혼란을 야기해냈다.
그렇지 않아도 극심한 병력 부족에 시달리던 제국군으로서는 버틸 수가 없었다.
3중 성벽을 이용해 최소한의 병력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내고 있었지만 결국 그 성벽도 지키는 병사가 있어야 방어물로서 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지키는 이가 없다면 그건 더는 방어물이 아니라 그냥 일회용 장애물에 불과하다.
“무너졌군. 더 이상은 못 버텨.”
마땅한 지휘관도 없고, 제국에는 커다란 병력을 지닌 귀족도 거의 없다.
정말 말 그대로 이름만 제국이지 왕국에 있는 대귀족 만도 못 한 수준이었다.
마침내 성문이 열리고 마족 병사들이 황성 안으로 물밀 듯이 밀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불길로 인해 피어오른 매캐한 연기를 타고 창칼이 부딪치는 소리와 병사들이 악 쓰는 소리, 그리고 흐릿한 비명 소리들이 섞여 들리다가 곧 모두 조용해졌다.
이쯤이면 다 끝날 때가 되었는데, 라고 중얼거리면서 클라우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제라 부를 수 있는 자도 없고 중심도 없으며, 제국 측 병사들도 성벽에 의지하여 싸우던 자들이기에 그 성벽이 뚫린 순간 더는 버틸 생각도 하지 못 하는 게 당연했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아주 조그마한 것이라도 약탈하는 순간 목이 달아날 것이야!”
그리 격렬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결국 전투는 전투이다.
당연히 부상자가 나오고 또 전사자도 나오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제 전우들이 그렇게 스러진다면 살아남은 병사들의 마음속에는 적들에 대한 분노가 차곡차곡 쌓일 수밖에 없다.
병사들의 그런 분노가 팽배해지면 지휘관들은 거주민들의 물건에 한해서 약탈을 허락하기도 하고, 적들의 저항이 무척이나 격렬하여 많은 피해를 봤다면 후일 반발이 있을 것을 감안하고서라도 신체에 대한 구속까지 허락한다.
즉 거주민들을 모조리 붙잡아 노예로 파는 것을 용인한다는 소리였다.
물론 후자는 정말 벌어지는 일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 지역을 점령하면 원래 거주하던 자들의 협조가 무엇보다 필요한데.
그들을 모조리 붙잡아서 노예로 팔아버리면 그 지역은 거의 버려진 땅이 되어버린다.
다른 자들을 이주시켜도 여태 살던 땅을 버리고 타지로 오려는 자들이 있느냐가 문제일 것이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로 인해 다른 지역에서 그보다 더 한 저항이 발생할 수 있다는 부분이었다.
아무튼 페르디난트는 제국 황성에 대한 그 어떤 약탈도 허락하지 않았다.
다치고 죽은 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방어 측 역시 마찬가지이고, 자신들의 종착지가 제국도 아닌데 굳이 약탈을 허용해서 민심을 완전히 이반시킬 이유가 없다.
오히려 이들을 달래서 충분히 운용할 수 있는 후방 기지로 사용하는 게 훨씬 좋았다.
“에슐리 팔라티나트, 고생 많았네.”
“뭘 이런 걸 가지고. 예전의 당신에 비하면 어림도 없어.”
후우, 숨을 내뱉으면서 몸을 풀어주는 에슐리.
병사들과 함께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들어서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해냈다.
비록 상대가 형편없는 제국군이라고 하지만, 지원은 고사하고 후퇴조차 불가능한 곳에 사령관이 자원하여 중요한 역할을 해낸 것이다.
그런 마족 여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클라우스는 그녀의 뒤를 따라서 지휘부로 향했다.
이미 페르디난트와 다른 부관들이 전부 도착해있었고 곧 에슐리가 안으로 들어오자 그들 모두가 에슐리의 전공에 박수를 보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에슐리 팔라티나트님.”
“고생은 무슨. 그냥 아군이 바깥에서 시선 좀 끌어주는 사이에 빈집에 불이나 지른 게 다인데. 오히려 고생은 그쪽에 있는 분들이 더 한 거로 생각되네요.”
“겸손도 좋지만 이럴 때에는 그냥 받아주지 그러냐.”
슬쩍 클라우스가 나서서 옆구리를 찌르자 에슐리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솔직히 공명심이 있는 그녀로서는 이렇게 인정을 받는 것이 무척 그리웠을 테니까.
결국 에슐리가 고개를 끄덕이니 페르디난트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생했다고 말했다.
이후 계획은 두 갈래로 나뉘었는데 이대로 빠르게 진격하여 요정들 영토 인근까지 도달하는 것과 제국 내부의 안정을 꾀하는 것으로 말이다.
어쩌면 이걸 위해서 두 명의 사령관에 그에 걸맞은 병력까지 율리아가 허락한 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문제는 누가 남고 누가 가느냐 인데.”
전 병력이 이동하게 되면 후방이 걱정이니 당연히 일부는 뒤에 남겨야 한다.
아직 왕국 상황도 모든 것이 정리된 게 아니라 병력을 요청하기가 난감한 상황이다.
현재 이 둘이 끌고 온 병력은 기존 병력에 후발대로 들어온 이들까지 합쳐 3만이 훨씬 넘어가는 병력인데, 이 정도면 이번에 점령한 왕국을 맡을 최소한의 병력만 빼고 거의 전부를 페르디난트와 에슐리에게 맡긴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만에 하나 이들이 패전하면 동부는 이제 뒤가 없을 정도다.
성난 요정과 수인들이 인간들과 몰려든다면, 패잔병으로는 막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걸 알기에 뒤부터 확실하게 다져두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그걸 모를 두 마족도 아니었다.
“원래는 클라우스, 자네가 맡아주는 게 가장 좋은 길이겠지만….”
“난 여기 뭘 맡으려고 온 게 아니다. 그냥 조언 역할로 온 거니까 뭘 맡기면 곤란해.”
“알고 있다. 무엇보다 전하께서는 우리에게 일을 맡기셨는데 우리들이 자신이 없다고 그대에게 떠넘긴다면 마왕 전하의 믿음을 저버리는 꼴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말한 페르디난트는 결심을 내렸다.
자신도, 그리고 에슐리도 모두 공을 세우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하지만 둘이 한꺼번에 움직이면 당장 이 제국부터 시작해서 뒤를 봐줄 인물이 없다.
왕국 상황이 안정이 된다면 조금은 기대해도 되겠지만, 자신들의 왕을 기다리게 하고 싶다는 생각 따위 그에게는 전혀 없었다.
허면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워진다.
자신 역시 무장이지만 공격적인 부분에서 보자면 에슐리가 한 수 위다.
제국의 황성을 공격하는 부분에서도 그렇고, 이건 본인도 인정하는 바였다.
그러니까 자신이 뒤에 남아 제국을 정리하며 또한 적들의 동태를 살피고 적절한 시기에 지원을 하는 것이 맞는 일일 것이다.
“허면 내가 뒤에 남아서….”
“내가 남겠습니다, 페르디난트 엘세님.”
“…어? 지금 뭐라고….”
“내가 남겠다고 했습니다. 이후 공격에 대해서는 페르디난트님이 맡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에슐리의 대답에 페르디난트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제국의 황성을 떨어트리는 것보다 요정들과 수인들을 쳐부수는 것이 공 부분에서는 훨씬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 선두에 서서 그 공을 세우는 것이야말로 공명심을 이루는 최고의 길일 텐데.
그걸 팔라티나트의 가주이자 그 일원인 에슐리가 양보한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해서 페르디난트가 조금은 의문스러운 눈길을 보내니, 에슐리는 미소를 짓고서는 왜 자신이 이렇게 스스로 물러서려고 하는지 그에 대해 설명했다.
“나도 처음에는 내가 가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마왕 전하께서 그걸 다 알고 있으신데 굳이 아무런 명령도 없이 우리 둘만 보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우리 스스로가 뭔가를 생각하고, 고민하고, 그렇게 결정을 내리라고 원하시는 건 아닐까 했죠.”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우리들에게 기대하시는 게 있지 않을까, 그런 말입니다. 예로 들어서 내게는 단순히 적극적인 공세만이 아니라 그 이후의 능력들. 예로 들자면 지역 안정이나 내정에 관한 것들을 더 성장시켰으면 한다는 말이죠.”
“…아쉬운 부분들을 이번에 전부 지워내고 와라. 뭐 이런 뜻을 지니고 계신다? 전하께서?”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공격은 내가 맡고, 후위는 페르디난트, 당신에게 맡긴다고 직접 언급을 하셨겠죠.”
에슐리의 말에 페르디난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율리아가 자신과 에슐리에 관해서 잘 알고 있을 터인데 그 어떤 말도 없이 그냥 둘이 알아서 하라고 놓아두었을 리는 없다.
“하긴… 단순히 공격해서 점령하면 끝이 나는 게 아니니까. 이제는 그 땅을 확실하게 운영하고 괜한 분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군.”
공격 부분은 에슐리가 자신보다 우위에 있다고 하지만 나머지 부분들은 경험 때문이라도 그녀보다 자신이 조금 더 위에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서로 부족한 부분들을 보완하면서 조금 더 완벽한 존재가 되라는 것.
그게 마왕이 원하는 것이라면 응당 그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에슐리 팔라티나트. 그러면 뒤를 좀 맡기도록 하지. 나는 마왕 전하께서 이루실 대업을 가로막는 남은 걸림돌을 좀 치워야겠어.”
“믿겠습니다. 혹시나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다 싶으면 바로 원군을 보낼 터이니 무리만 하지 않으면 될 것 같습니다.”
에슐리의 대답에 페르디난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이 나자 페르디난트를 따르는 부관들이 일어섰는데, 그 뒤를 따라서 클라우스 역시 갑자기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섰다.
“클라우스?”
“왜. 나는 그냥 너 따라서 가는 거다. 나도 요정들 땅 좀 밟아보고 싶거든.”
“…아니, 그냥 조금은 든든해서 그렇다.”
공식적으로는 그 어떤 실권도 지니고 있지 않은 인간 남자.
하지만 비공식적으로는 거의 마왕의 대리인이나 마찬가지다.
당장 그 어떤 직함도 없음에도 동부의 모든 이들이 그를 윗사람으로 대하고 있다.
그 어떤 마족보다도 더 윗줄의 1등 공신으로 생각하고 있는 남자.
그게 바로 어디 마실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저 클라우스였다.
“에슐리 팔라티나트.”
페르디난트의 뒤를 따라 나서기 직전, 클라우스가 갑자기 에슐리를 부른다.
그에 에슐리가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돌리니 그는 손짓으로 제국 황성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어차피 여태까지도 아무 것도 못 하던 놈들이야. 너무 신경 쓰지 말되 외부에서 어떤 놈들이 오는지 그것 정도는 확인해두는 게 좋을 거다. 항상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려는 놈들이 나타나기 마련이거든.”
“요정들을 경계하라는 거야?”
“그럴 수도 있고, 다른 놈들일 수도 있지. 말했다시피 제국은 신경 쓸 게 못 돼. 그러니까 적당하게 배치를 하라고 조언을 하는 거야.”
“…고마워.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을게.”
대답을 들은 클라우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지휘부를 나섰다.
이후 페르디난트 휘하에서 종군하면서 곧 머지않아 요정들의 영토 근처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여기까지 오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페르디난트님.”
“어쩌시겠습니까. 오늘 하루는 일단 여기서 야영을 하고 진입하시겠습니까?”
“그러는 게 낫겠지. 저 안으로 들어가면 정말로 적지 한복판인 거니까.”
결정이 나자 군이 빠르게 숙영 준비에 들어간다.
가장 먼저 적당한 땅을 찾고 사령관 막사 자리를 정한 후 그 일대에 숙영지를 건설하고 외곽에 목책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
그 모습을 바라보던 클라우스는 슬슬 몸을 풀어주고 있었다.
요정들 영토 바로 앞에 도달했으니, 오늘 밤 중으로 한동안 보지 못 했던 한 요정과 아주 길고 긴 이야기를 좀 나누어야 할 듯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