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1화 〉 28장 - 체하지 않도록
적들이 제국 내에 없다는 것을 확인 받자 마족군은 조금 더 편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정찰병들의 수를 과하게 늘릴 필요도 없었고, 밤마다 야습을 걱정할 이유도 없었으며 좁은 길을 지나갈 때에 기습이 행해지지는 않을까 주변을 경계할 필요도 없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축적되어 있던 피로도를 이참에 아예 회복하려는 듯, 페르디난트는 행군 속도를 조금 늦추고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푹 재우기까지 했다.
에슐리 역시 그동안 병사들이 고생한 것을 알고 있기에 반대 의견을 내비치지 않았다.
어차피 내일이면 황성 앞에 다다를 것이고 크든 작든 결국 전투는 벌어질 것이다.
그렇기에 병사들의 휴식은 필수 중의 필수, 자신이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아직 안자고 뭐하나?”
익숙한 목소리에 에슐리가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보았다.
간편한 차림을 한 채 클라우스가 앞에 다가와 앉는 걸 확인한 그녀는 지도를 팔랑거렸다.
“황성 구조 파악 중. 왕국과는 다르게 제국은 대외적으로 알려진 게 많잖아. 제대로 생각이 박힌 자들이라면 그렇게 전부 공개된 사실들을 역으로 이용해서 뭔가를 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럴 생각을 품은 자들이었다면 시작부터 너희들을 막았겠지. 세상 어느 놈이 제 집 안으로 적을 끌어들여서 싸울 생각을 하겠어. 이겨도 본전이고 지면 그걸로 끝인데.”
“혹시 모르잖아? 저 거대한 성벽을 두고 저항하려는 속셈일 수도 있지.”
제국이라는 껍데기만 있을 뿐, 다 무너져가는 이곳이 어떻게 버티고 있는 이유.
아주 먼 옛날 제국의 황제가 황성에 쌓은 성벽이 바로 그것이었다.
3중으로 만들어진 성벽에 해자까지 아주 넓게 파져있는 제국의 황성은 여태까지 난공불락이라는 이름을 유지하고 있었다.
예전에 아직 서부의 종족들이 서로를 적대하던 시절.
제국은 수인들과 요정, 그리고 왕국에게 두들겨 맞으면서 영토를 죄다 잃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그들의 공격이 황성까지 닿았는데, 그 요정이나 수인들조차도 그 성벽을 뚫지 못 하고 포기한 채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성벽이 대단하기는 하지. 하지만 그 안에 있는 수비 병력은 6백 명도 안 될 거다. 아무리 방어 측이 숫자가 조금 적어도 된다고 하지만 6백으로 그 넓은 곳을 감당할 수는 없지.”
“당신 말이 맞아. 해서 내가 몰래 안으로 침입할까 해.”
“…페르디난트와 함께 군을 맡고 있는 사령관이 직접 뛰어 들겠다? 그러다가 잘못해서 일이 꼬이고 네가 사로잡힌다면 우리 군으로서는 막대한 피해를 입는 것인데?”
“전제 조건이 잘못 되었어. 일단 첫째, 고작 인간 따위한테 사로잡힐 정도로 내가 약하지는 않아. 둘째, 잡힐 것 같으면 차라리 죽어버리고 말지 그런 치욕은 안 당해.”
“페르디난트도 나와 똑같은 말을 할 거다. 그냥 부관들한테 시키는 게 나을걸.”
“아니, 내가 직접 할 거야.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위험한 일을 부하들에게 맡기고서 멀뚱히 자리에 앉아 구경할 수는 없어. 그건 너무 답답하다고.”
누가 팔라티나트의 마족 아니랄까 아주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여인이다.
잠시 에슐리를 바라보던 클라우스는 네 마음대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저 안에 이 여자를 해칠만한 이는 아무도 없고, 군권을 받지 않은 자신에게는 사령관의 결정을 막을 그 어떤 권리도 없는 게 사실이었다.
덤으로 이 마족의 공명심이 대단하다는 것도 알고 있으며.
또한 새로운 마왕의 아래서 팔라티나트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다는 열망도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녀를 막아 세운다는 건 괜한 짓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었다.
“네 말이 맞긴 해, 에슐리. 때로는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사령관도 필요한 법이지.”
“당장 당신도 그랬잖아? 이전 대륙 전쟁에서 우리 마족들과 싸우던 최전방의 지휘관이 사실 남부 일대를 담당하고 있는 총사령관인 당신이었지.”
“그 때는 믿을 만 한 놈이 단 한 놈도 없어서 그랬던 거다. 왕국의 귀족들 봤잖아?”
“…그 머저리들? 하긴, 당신이라면 그 병신 놈들이 당연히 성에 안 찼을 것 같긴 하네.”
율리아도, 에슐리도, 그리고 다른 마족들 모두가.
도대체 이 남자가 과거 1차 대륙 전쟁 시절에 어떻게 버텼는지 신기해했다.
누가 봐도 전부가 다 지뢰 그 자체인 놈들 천지인데, 심지어 아군 발목을 잡다 못 해 그냥 잘라버리는 수준으로 도움이 안 되는 쓰레기들이었는데.
클라우스는 기어코 그걸 버티고 외부의 적들과 내부의 적들을 상대로 승리한 것이니까.
“에슐리. 한 가지 조언을 하자면, 노릴 거면 남쪽을 노려.”
“남쪽? 내가 알기로 남쪽은 지형이 높아서 침입하기가 매우 힘들다고 하던데?”
“그렇지. 당연히 힘들 거다. 하지만 그만큼 방비도 소홀할 거야. 황성을 수비하는 제국군은 6백이 고작이다. 그 소수의 병력이 사방에 배치되면 제아무리 제국의 성벽이라고 해도 금방 함락 당할 거다.”
“…즉 녀석들도 어느 부분에는 병력을 최소화하고 어느 곳에는 집중 배치를 할 거다?”
클라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정확하다고 답했다.
비록 제국이라는 국가는 초라하기 그지없으나 과거의 영광을 전부 잊은 건 아니다.
황성은 왕국의 왕성보다도 더 거대하고, 그 황성을 감싸고 있는 성벽은 무척 단단하다.
그 어떤 지원도 기대할 수 없다는 상황이지만 이렇게 된 거 저항이라도 할 게 분명하다.
그리고 마족들은 제국에서 힘을 빼거나 큰 피해를 입을 생각이 전혀 없다.
최소한의 피해로 빠르게 이 주인 없는, 간판만 내걸고 있는 제국을 점령하고 바로 요정들과 전선을 형성한 후 그들을 압박해야만 한다.
‘그래야 나타샤와 그녀의 가문인 벨라루스가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을 테니까.’
요정들의 약점은 바로 그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자존심’ 이다.
마족들에게 항복을 하는 건 죽기보다 싫을 테지만, 당장 왕국이나 제국이 단 두 달도 채 안 돼서 박살이 났고 그 전에 자신들이 보낸 정예 병력들이 완전히 전멸 당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또 한 번 전투를 치렀다가 만에 하나 또 패배라도 당한다면.
그렇게 되어서 이제는 정말 뭐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형국에 이르게 된다면.
그 때는 명예로운 항복이 아니라 살려달라고 빌어야 할 수도 있었다.
절대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선명해지는 자신들의 미래.
시시각각 다가오는 마족들의 기세는 대단하고, 그 뒤에 앉아있는 마왕은 여태껏 자신들이 대하던 마왕들과는 궤를 달리 하는 괴물이다.
또한 그녀의 밑에는 여러 유능한 자들과 함께, 그 마왕을 막아낼 수 있었던 유일한 방패가 이제는 거꾸로 창이 되어서 자신들에게 날아오고 있는 중이다.
그런 와중에 마왕이 먼저 요정 측에 손길을 내밀었다.
비록 벨라루스에 한정된 것이라고 하지만 어찌 되었든 벨라루스 가문은 요정이다.
수인들은 지금도 비참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벨라루스 가문의 요정들은 오히려 포로가 아니라 귀빈 대접을 받다가 말과 약간의 식량에 여비까지 받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지금의 마왕이 어떤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겠는가.
기회를 줄 때 알아서 고개를 숙여라, 최악의 패전을 당하고 땅바닥에 고개를 쳐박을 바에 아직 수중에 카드가 남아있는 이 순간에 무릎을 꿇는 것으로 끝내라는 것이다.
‘요정들 입장에서도 머리가 터질 지경이겠지. 항복을 하자니 싸울 수 있는 힘이 없는 것도 아니고, 다른 종족도 아니고 그렇게 욕을 하던 마족들에게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끝까지 저항을 하자니 불길하게도 자신들이 부딪치는 족족 깨져나가는 상상이 들고 마지막에는 살려달라고 고개를 처박고서 싹싹 비는 모습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차라리 수인들처럼 싸우자! 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으면 고민이라도 되지 않을 것이다.
율리아가, 정확히는 클라우스가 던져둔 분열의 씨앗이 벨라루스 측에서 시작되어 이제는 요정 사회에 전반적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중이다.
심지어, 클라우스가 노리는 건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지금쯤이면 도망친 놈들이 요정들에게 다다랐을 터인데.’
왕국에서 도망친 귀족들, 특히 요제프 대공을 주축으로 하는 극성 귀족파 세력들.
그들은 저항을 외치면서 자신들과 함께 싸우자고 연일 요정들에게 외치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항복한다면 분명 왕국에서 있었던 사건들과 똑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왕국의 귀족들을 모조리 쳐죽인 마왕인데 요정들을 살려두겠냐고 말이다.
하지만 그 주장이 오히려 자신들에게 독이 된다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 하고 있을 것이다.
반대로 보자면 그만큼 마왕은 왕국의 귀족들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제는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과거 아카데미에서 인간 귀족들이 그녀를 노리기도 했고, 그 다음으로는 인질로 잡으려는 시도도 있었을 정도 아닌가.
거기에 더해서 그녀 휘하에 있는 클라우스는 귀족들에게 활화산 같은 분노를 지닌 자다.
귀족 나부랭이들이 항복을 한다고 해서 ‘그래, 이제부터 너희와 나는 친구다.’ 따위의 결말이 나올 수가 없다는 소리였다.
그에 반해 요정들은 딱히 현 마왕과 척을 진 적도 없고, 클라우스와 불편한 관계도 아니다.
항복을 한다고 해서 무자비하게 보복을 당할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들에게 넘어와 있는 이 인간 귀족들이야말로 적들을 끌어들이는 이유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인데, 이들을 넘겨준다면 아주 좋은 선물이 되지는 않을까.
요정들 사이에서는 그런 생각들도 조금씩, 조금씩 생기고 있는 중이었다.
‘실컷 분열해라. 그리고 실컷 고민해. 어차피 이쪽은 멈출 생각 따위 없으니까.’
자신들 잘난 맛에 사는 자들은 자신들의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 하는 법이다.
상대방을 상대방의 시선으로 보고 판단해야지, 나의 기준에 놓고 보면 무조건 패배한다.
요정들은 그걸 끝내 하지 못 했고 결국 2차 대륙 전쟁에서 대패할 것이다.
다음날, 마침내 제국의 황서에 바로 앞에 도달한 마족군은 가장 먼저 항복 의사를 물었다.
황제가 붕어한 후 다음 황제가 자리에 앉기는 했으나 아직 아이에 불과한 어린 황제.
그 혼란 속에서 당연히 강경파가 득세할 수밖에 없었고 그놈의 자존심이 뭐고 황성의 성벽을 믿는 부분 때문에 더더욱 저항하자는 의지가 강해졌다.
“…대단한 건지 어리석은 건지 모르겠군.”
적들의 저항 의지를 확인한 페르디난트는 어이가 없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에 에슐리는 은밀하게 침투할 준비를 마치고서 입을 열었다.
“저 안에 있는 놈들은 전부가 다 전쟁과 거리가 먼 자들이니까. 1차 대륙 전쟁에서도 싸워본 적이 없는 놈들, 전쟁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 못 하는데 무서운 줄 알겠어요?”
“…조심해라. 아무리 제국 놈들이 허수바이들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운이라는 게 있다.”
“그 운마저 두 동강 낼 테니까 안심해요. 당신은 성벽에서 소란이 일고 깃발이 내려가면 일거에 병력을 투입해서 한 번에 밀어줘요.”
“여부가 있겠는가. 그대를 생각해서라도 무조건 진입할 터이니 잘 버텨주도록 해.”
페르디난트의 말에 에슐리가 고개를 끄덕이고 특별히 선발된 병사들을 이끌고서 이동했다.
그동안 나머지 군대는 최대한 공격을 감행하면서 적들의 시선을 자신들 쪽으로 집중시켰다.
병력의 수나 질에서 보면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 그러나 3중 성벽에 넓은 해자는 그 차이를 메꾸고도 남을 수준이라고 볼 수 있었다.
“….”
클라우스는 그 어떤 지휘도 하지 않은 채 망루 위에 앉아서 전황을 살피고 있었다.
적들은 이제 대부분의 병력을 접전이 벌어지고 있는 성벽으로 빼내게 될 것이다.
에슐리는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을 것이고, 그 대단하던 제국 황성의 성벽은 함락된다.
‘빨리 좀 끝내자. 빌어먹을, 좀 쉬고 싶다.’
이제는 영웅 행세 따위 할 필요도 없기에 만사가 다 귀찮아진 클라우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