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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가 비선실세-290화 (290/341)

〈 290화 〉 28장 - 체하지 않도록

믿었던 방어선은 무너졌고 대귀족들은 도망치거나, 아니면 항복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죄다 죽어서 다시는 볼 수조차 없게 되었다.

덕분에 그들을 믿고 있던 중간 귀족들은 그야말로 외톨이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나마 키엔마이어 후작가의 영향을 받아 평민들을 나름 잘 대해주던 자들은 그 키엔마이어 후작가의 설득에 넘어가서 항복을 했다지만.

반대로 썩어빠진 대귀족들 밑에서 평민들을 핍박하던 자들은 안에서는 그 평민들에게 공격을 당하고 밖에서는 마족들에게 쫓기니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항복을 왜 안하고 그렇게 쫓기고 있냐고 묻는다면.

현재 마왕의 옆에 있는 남자가 누구인가, 바로 클라우스이다.

과거 대륙 전쟁 시절 마족들보다 귀족들에 의해 잃은 병사들이 더 많은 지휘관.

그가 마왕 곁에 있다는데 자신들이 항복을 하면 과연 좋은 일이 있겠는가?

그렇게 되자 이제 중간 귀족들은 딱 한 가지 생각만을 가지게 되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행동하고 또 일을 저질러야 한다는 것.

도망친다는 방법도 있었지만 무척이나 힘들기도 했고, 또 내심 억울하기도 했다.

자신들은 그저 대귀족들이 하는 대로 따라한 것뿐인데.

평민들 위에 있는 귀족이기에 당연히 그 권리를 행사한 것뿐인데 왜 이렇게 되어야 하는가.

그런 울분을 토해내면서 몇몇 귀족들이 몰래 모여서는 뜻을 모았다.

마침 마왕이 왕성을 점령하고서 민심을 달래기 위해 시찰을 나선다는데.

그 마왕을 암살하는 데에 성공만 한다면 동부는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고 자신들은 영웅이 되어서 대귀족들의 자리까지 차지할 수 있는 명예를 거머쥘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렇게 몇 안 되는 기사들과 사병들을 끌어 모으면서.

어찌 알고 있던 왕성의 병사에게 연락하여 수중에 있던 모든 돈을 털어줆으로서 매수를 했고 마왕이 궁을 나서면 곧장 알려주기로 약속까지 했다.

이후 마왕이 나섰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은밀하게 그 뒤를 쫓았고.

우연하게도 영지민 중 반이 넘게 사라진 영지에 마왕이 들어가자 암살을 하기 딱 좋은 상황이라고 여기고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는데….

“꺼흐흑! 흐윽!”

남자는 눈물과 콧물로 얼굴이 범벅이 된 채 허우적거렸다.

이미 잘라진 두 팔과 다리는 움찔거리면서 땅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중이었다.

곁을 지키던 사병들도, 기사들도 진작 절명해서는 바닥에 처박혀 있었다.

남은 자들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사시나무 떨 듯 떨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도망을 치지 그랬어. 그러면 최소한 스스로 죽을 기회는 얻었을 텐데.”

사방이 온통 피로 가득함에도, 그 속에서 오직 율리아만이 멀쩡한 모습이었다.

그 잔혹한 피의 소용돌이를 만들었음에도 정작 본인은 마치 정돈을 마치고 이제 막 나온 여인마냥 너무나 평화로운 분위기를 뽐내고 있었다.

냉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다가온 율리아가 밑을 내려다본다.

거기에는 사지가 잘려서 피를 쏟은 채로 버둥거리는 귀족이 엎어져있었다.

어떻게 움직여보려고 노력은 해보고 있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꺼흑, 흐윽! 사,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그렇게 살아서 뭘 어쩌려고. 살아도 산 게 아닐 텐데 그냥 죽지 그래. 귀족답게 말이다.”

“살고 싶습니다, 살고 싶어요. 이렇게라도 살 터이니 제발… 끄륵!”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그의 등판에 그대로 칼을 꽂아넣은 율리아.

폐나 심장을 노린 게 아니라 주요 기관 등을 피해서 갈과 근육만 꿰뚫어냈다.

“끄하악! 아흐억! 허억!”

“너 같은 놈들이 용케 여태까지도 버텨왔구나. 이 왕국이 대단한 것인지, 그곳에 살고 있는 이들이 대단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한 가지 확실한 건 넌 필요가 없다는 거란다.”

콰드득-.

검을 살짝 비트니 상처 부위가 흉하게 벌어지면서 피가 쏟아져 나온다.

밑에 깔린 귀족이 짐승 같은 비명을 지르면서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울부짖지만.

이 근처에는 시체, 혹은 그와 같이 팔다리가 다 잘려서 꿈틀거리고 있는 벌레들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끄헉… 컥, 쿨럭….”

“자, 다음 벌레.”

일부러 숨통을 끊지 않고 치명상만 입혀둔 채, 율리아는 다른 자에게로 다가갔다.

누군가는 잔혹하다고 말을 하겠지만 본인은 그 어떤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단순하게는 자신을 암살하려던 자들이며, 크게는 이 땅에 영원히 해악을 끼칠 좀 벌레들이다.

벌레는 벌레에 맞는 대우를 해주는 게 맞다. 사람대접을 하는 건 오히려 잘못이다.

한 차례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후 율리아가 정리 작업에 들어갔을 때.

플랑슈는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혹여나 도망치려 하는 자들이 있지는 않은지.

혹은 괜히 왕국민들이 그 장면을 보지 않도록 주변을 철저하게 막고 있었다.

그러다가 저 멀리서 한 무리의 기사들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에 아주 잠깐 전투 의지를 내비치던 플랑슈였으나 곧 그 앞에 서있는 이가 다름 아닌 다넬 키엔마이어임을 확인하고서는 훌쩍 몸을 날려서 그들 앞에 섰다.

“오셨군요, 다넬 키엔마이어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플랑슈 시종장. 그대는 왜 혼자입니까. 전하는 어디에 두고 왜….”

“방해를 받으실까 잠시 물러나 있는 중입니다. 여러분들도 조금 있다가 들어가시죠. 아직 마왕 전하께서 한창 업무 중이시니 들어가신다면 자칫 분노를 살 수도 있습니다.”

그에 다넬 키엔마이어는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자신을 여기로 호출한 이가 다름 아닌 율리아인데, 갑자기 그 앞을 시종장이 막아서니 이걸 들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에 빠진 것이었다.

하지만 곧 마왕의 곁에 항상 붙어있던 이가 저 은발의 마족임을 깨달은 그는 일단 모두 말에서 내리게 한 후 희미하게 무슨 소리가 들리는 마을을 쳐다보았다.

전쟁의 여파로 대부분이 떠나버리고 비어있는 것 같은 곳인데.

묘하게 코끝에 비릿한 혈향이 머무는 것이 아무래도 무슨 일이 난 것 같았다.

잠시 기다리던 다넬 키엔마이어는 더는 안 되겠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다가가면 갈수록 비릿한 피 냄새가 더욱 짙어지고 마치 마법이라도 터진 것처럼 일대가 완전히 뭉개진 모습을 취하고 있다.

순간 뭔가 물컹, 하고 밟혀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사람의 팔로 보이는 것이 제 발밑에 있는 것을 발견한 다넬 키엔마이어였다.

인상을 조금 찌푸린 그였지만 곧 얼굴 표정을 정리하고서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저 앞의 공터에, 대충 자리에 걸터앉아서 두 눈을 감고 있는 율리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전하.”

“왔는가. 생각보다 일찍 왔군. 분명 시종장이 기다리라고 했을 터인데.”

율리아의 말에 다넬 키엔마이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곧, 그는 그녀의 발밑에 깔린 마지막 생존자를 볼 수 있었다.

“키, 키엔마이어 후작님! 후작님!!”

“….”

“아, 아는 자인가? 아아. 말이 잘못 되었군. 아는 벌레인가, 다넬 키엔마이어?”

“…영지를 지니고 있던 귀족으로 기억합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후작님! 저, 저 헤만 남작입니다! 후작님과도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기억은 안 나시겠지만 저도, 저도 당신과 같은 귀족 가문 출신입니다! 살려주십쇼, 제발 살려주십쇼!”

“….”

“죽기 싫습니다. 팔다리가 없는 채로 뒹굴어도 좋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쇼. 제발….”

다른 모든 시체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이미 사지가 다 잘려나간 후였다.

헤만 남작의 비명에 다넬 키엔마이어는 저도 모르게 율리아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하암, 하고 나른한 듯 하품을 하면서 천천히 제 배를 쓰다듬고 있었는데.

주변 환경만 아니라면 그냥 제 뱃속의 아이에게 사랑이 가득한 손길을 느끼게 해주는, 말 그대로 아주 좋은 어머니처럼 보일 정도였다.

“다넬 키엔마이어.”

“네, 마왕 전하.”

“이 벌레와 아는 사이인 모양이군. 이렇게 간절하게 매달리는 걸 보니 말이야.”

“…말씀드렸다시피 아주 사소한 연이 있었을 뿐입니다.”

“아아, 걱정 마. 난 그대를 추궁하려는 게 아니야. 오히려 그대의 면을 세워주고 싶다고 할까?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 게 가장 좋겠군.”

면을 세워주고 싶다니? 그게 당최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의 다넬 키엔마이어.

그에 율리아는 싱긋 미소를 짓고서는 제 밑에 깔린 남자의 머리통을 꾹꾹 짓누르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이 벌레가 내가 아니라 그대에게 자비를 구걸하고 있지 않나. 헌데 그런 자의 목숨을 그냥 거둔다면 그대의 면이 서지를 않겠지. 허니 그대의 말대로 해주겠네.”

“예?”

“살려달라고 말한다면 살려주지. 이미 잘려나간 팔다리는 어쩔 수 없지만 최소한 이 인간의 목은 보전을 해주겠다는 말이야, 다넬 키엔마이어.”

“아아….”

“그래서 자네의 마음은 어떠한가. 이 자를 살려주고 싶은가?”

그러자 율리아의 발밑에 깔려서 꿈틀거리던 귀족이 다급하게 몸을 휘젓는다.

제발 살려달라고, 마왕에게 자비를 빌어달라고, 그렇다면 이 은혜는 평생 가도 잊지 않겠다고.

헤먼 남작은 그렇게 빌고 또 비는 중이었다.

“어쩌겠는가, 다넬 키엔마이어.”

재촉하는 기색 따위는 없다, 오히려 율리아가 더 느긋하다.

그럼에도 다넬 키엔마이어는 빠르게 대답을 내놓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왜 자신을 이곳으로 불렀는지, 그리고 왜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굳이 그런 선택지를 내어주는 건지, 말 그대로 왕의 의중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하지만 아무리 율리아의 눈치를 살펴도 그녀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무엇을 원하는지도, 어떤 대답을 해야 만족을 시킬 수 있는 지도, 전혀 알 수가 없다.

어찌 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그는, 제 친구가 했던 것처럼 그냥 강렬하게 떠오르는 뭔가를 그대로 따라보기로 했다.

솔직히 말해서, 자신에게 살려달라고 비는 저놈을 같은 귀족이라고 여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마왕 전하. 그런 자비를 베푸시고자 하는 것에 큰 감명을 느낍니다. 하오나 그 앞에서 감히 충언을 하나 드리고자 합니다만.”

“말해보게.”

“벌레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벌레는, 벌레답게 죽어야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흐음?”

클라우스만큼, 그리고 이 나라 평민들만큼은 아니어도.

설사 같은 귀족의 자리에 있었다고 해도 자신은 저런 귀족들에게 분노하고 실망했다.

그런 자들이 이제 와서 죗값을 치르는 와중에 무섭다고, 구해달라고 빌고 있다고?

‘아니지, 아니야. 그게 아니야. 잘못을 했다면 그것에 대해서 용서를 비는 게 아니라. 구차하게 변명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책임을 지란 말이다. 빌어먹을 놈들아.’

자신들의 삽질로 인해 이 나라가 이 꼴이 되었는데, 아직도 저러고 있단 말인가.

한심스러웠다, 저주스러웠다, 치가 떨리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내심 항복한 자신이 부끄럽다고 여겼던 순간이 있었는데, 그것마저 모조리 사라진다.

도대체 이 왕국은 어떤 놈들이, 여태껏 무슨 짓으로 어떻게 갉아먹었기에.

아무 것도 남지 않고 고작 저런 벌레들만이 가득 남아서 살려달라고 빌고 있단 말인가.

“저는 저 벌레와 상종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으니, 그저 마왕 전하의 뜻대로 하소서.”

“…그렇다는구나, 벌레야.”

“으아아아!! 키, 키엔마이어 후작! 키엔마이어 후자아악! 꺼윽! 끄르륽!!”

“내 신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거라. 때가 묻을까 걱정이구나.”

콰드득!-

들고 있던 검으로 몸을 헤집으면서 율리아가 미소를 짓는다.

살이 갈라지고 근육이 찢어지며 피가 새어나온다.

한 방울의 피가 율리아의 얼굴에 묻으니 마왕이 쯧, 하고 혀를 찬다.

그러자 플랑슈가 냉큼 달려와서는 조용히 손수건을 내밀었고 율리아는 그것으로 제 얼굴을 닦은 후 천천히 자리에서 일었다.

“다넬 키엔마이어.”

“네, 마왕 전하.”

“고생이 많았을 것 같군. 저런 것들과 같이 지내야했다니.”

“…저도 신기할 따름입니다.”

다넬 키엔마이어의 대답에 마왕은 웃으면서, 들고 있던 검을 플랑슈에게 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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