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7화 〉 28장 - 체하지 않도록
전쟁은 이제 지긋지긋했다, 전쟁 영웅이라는 소리도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창칼을 들고 말을 달리며 낮에도, 밤에도 싸웠던 시간만 도대체 몇 년인가.
회차들을 전부 합치면 못 해도 수십 년은 족히 나올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이렇게 버티는 이유는, 그리고 군말 않고 나서는 이유는 수중에 있는 최고의 카드가 다름 아닌 클라우스 자신이라는 걸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어서다.
정확히 말하자면 율리아라는 또 다른 최고의 카드가 있기는 하지만, 그걸 쓰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그의 마음이었다.
어차피 율리아는 대륙 통일 이후 정말 엄청나게 바빠질 운명이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클라우스 자신은 딱히 별 다른 일이 없을 테고.
무엇보다 지금 상황에 있어서 마왕이라는 존재에 대해 두려움이 쌓이면 무척 곤란하다.
전쟁에 대한 거부감은 되도록 뒤로 물러설 누군가가 안고 가는 게 좋다.
그리고 그 퇴장을, 클라우스는 자신이 모두 떠안고서 조용히 뒤로 물러설 생각이었다.
“리르.”
방 안에서 전선으로 이동하기 위해 준비를 하다 말고 클라우스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분명 아무도 없던 것 같던 방 안 공기가 살짝 바뀌면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최근까지 바쁘게 움직이면서 정보들을 수집하고 아군 측에 그것들을 알려주던 여인.
공식적으로는 마왕성의 시녀이지만 실제로는 마왕의 눈과 귀 역할을 하고 있는 마족.
“부르셨나요.”
율리아 앞에 아님에도 리르는 망설이지 않고 무릎을 꿇고 그도 모자라 납작 조아렸다.
표면적으로는, 그리고 클라우스가 원하기에 마왕에게 충성을 다 하고 있는 중이지만.
동시에 그녀는 언제든 클라우스와 율리아 사이에서 클라우스를 택할 수도 있었다.
다만 그걸 클라우스가 절대 원하지 않기에 모두에게 충성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자리를 비우고 율리아가 혼자 남게 되면, 분명 허튼 짓을 하려고 하는 무리들이 생길 거다. 아마도 이번에 간을 보고 있던 몇몇 인간 귀족들이 일을 저지르겠지.”
“어떤 방식으로 일을 저지르는 건지….”
“뭐겠냐. 당연히 마왕 암살이겠지. 요즘 들어서 율리아가 혼자서 시찰을 나서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 아마 그 틈을 노리려고 할 거다. 다넬 키엔마이어는 믿을 수 있는 친구이지만 그 녀석의 주변 모두가 깨끗할 수는 없으니 어디서든 율리아의 행성지가 노출될 수 있겠지.”
“…미리 제거할까요? 아니면 마왕 전하께 보고를 드릴까요.”
리르의 질문에 클라우스는 둘 다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상대방이 마족이라던가, 아니면 요정 및 수인들이라면 조금은 걱정이 될 수도 있지만.
하는 일마다 혼자 자빠져서 지랄을 떨어대는 귀족들이 뭔가를 꾸미려고 한다면, 그래 어디 한 번 해봐라 식으로 놓아두고 싶었다.
그래야 청소하기에 더더욱 좋은 명분이 생기는 것이고.
아이를 가졌기에 반 강제로 이곳에 남아야 하는 율리아가 아주 조금은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전쟁 중인데 날뛰지 못 하는 게 얼마나 답답하겠어. 그런 식으로라도 좀 풀게 둬야지.’
실력이 그야말로 껑충껑충 뛰어오르면서 그걸 풀어내고 싶어 안달하던 율리아다.
그걸 한바탕 전쟁터에서 풀어내다가 갑작스레 혼자 왕성에 갇히게 되었으니 답답할 것이다.
아이를 품은 여인이라고 하지만 아직은 몸도 마음도 너무나 가벼울 테니까.
“너는 붉은 독거미 측과 계속 현재 일에 집중해라. 귀족 놈들만이 아니라 상단을 운영하는 것들도 전부 조사 대상이다. 모조리 파악해서 먼지 하나 나올 수준으로 털어내. 실적이 생길 때마다 네가 받을 보상 역시 늘어간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이해했지?”
아무리 귀족들이라고 해도 본인의 힘으로 모든 자산을 모았을 리는 없다.
당연히 협조했을 무리가 있을 거고, 현재 그들은 모든 죄가 귀족들에게로 뒤집어 씌워지고 대신 자신들은 계속해서 멀쩡히 살아갈 수 있기를 내심 바라고 있을 것이다.
어차피 자신들은 뒤에서 귀족들 뒤처리만 한 것이니 죄가 없다.
오히려 본인들도 귀족들을 향해 돌을 던지면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할 수 있다.
욕과 분노는 귀족들이 전부 대신 가져가고 본인들은 그 뒤에서 여태 쌓은 부로 귀족은 아니지만 귀족에 버금가는 힘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아마도 행복 회로를 아주 가열차게 돌리고 있지는 않을까, 클라우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남김없이 잡아들여. 귀족들 뒷구멍을 핥아주면서 온갖 똥을 받아먹은 놈들. 어떻게 신분 세탁을 해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난 상관 안 해. 다 조사해서 내가 돌아오는 즉시 전부 치워버릴 수 있도록 준비해라, 리르.”
“네. 알겠습니다. 클라우스님.”
리르를 내보내고 얼추 준비를 다 끝내니 누군가가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선다.
방금 탄 것 같은 커피 한 잔을 앞에 내려놓으면서, 플랑슈가 조심스레 입을 연다.
“제가 따르지 않아도 될까요.”
“어차피 가서 내가 직접적으로 뭘 하지는 않을 거다. 정말 나서야 하는 순간이 한 두 번은 있겠지만 그것 외에는 해줄 생각도 없어. 과하게 나서봤자 오히려 그게 독이 되어 돌아오거든.”
“그러니 더더욱 제가 따라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만.”
“넌 공식적으로 마왕의 옆을 지키는 시종장이다. 여태까지는 다른 업무에 조금 더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네 본업을 잊으면 곤란해.”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어요.”
플랑슈 역시 리르와 아주 비슷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마음은 클라우스에게 향해있지만 그 마음 때문에 또한 마왕에게 충성하는 인물.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만약 클라우스와 율리아가 갈라선다면 당연히 클라우스의 편에 서서 율리아와 대적이라도 할 메이드였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네가 할 일은 간단해. 시찰을 나서는 율리아와 동행하는 거다.”
“호위 업무를 맡으시라는 거군요.”
그러자 클라우스는 아니, 라고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그 반응에 플랑슈는 에? 하고 반문하면서 두 눈을 깜빡였다.
시찰을 나서는 율리아와 동행을 하라는 것이라면 호위 목적이 분명 있을 텐데.
그게 아니라고 말한다면 자신이 맡아야 하는 업무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말 그대로 수행만 하면 된다. 율리아의 손에 뭔가가 묻는다면 닦아주면 되고, 그녀가 제 할 일을 끝낸다면 고생했다고 말하면서 부채질이나 조금 해주면 될 거야. 아니면 시원한 물 한 잔을 준비해서 내어줘도 좋을 테지.”
“…아.”
클라우스의 말에 플랑슈는 바로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또한 시찰을 나가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바로 눈치를 챘다.
본인이 할 일은 율리아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아주 잠깐의 일탈을 즐긴 후 다시 왕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도록 곁에서 수행하라는 것이었다.
완벽하게 이해했다면서 공손한 기색으로 인사를 해 보이는 플랑슈.
그리고 클라우스에게 ‘이런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비밀리에.’ 라는 말을 전하고서 그의 앞으로 고이 접힌 편지 하나를 내밀고는 방에서 사라졌다.
- 친애하는 저의 교수님께 -
아무래도 이 서신을 전달한 이는, 먼 곳에서 자신을 위해 힘써주고 있는 요정인 모양.
전선으로 향할 준비를 모두 마친 채 복도를 나서면서 클라우스는 내용을 한 번 훑어보았다.
-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한 때는 제가 속해있던 곳을, 이제는 제 일부에 속하게 만들었습니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아요. 교수님께서 보내주신 선물들이 도착했으니까요. -
연합의 다른 자들은 여전히 포로 생활을 이어가는 가운데.
오직 벨라루스의 요정들만이 사지 멀쩡히, 심지어 패전한 이들도 아니라 그냥 어디 잠시 나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행색까지 멀쩡히 해서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야말로 속이 뻔히 보이는 짓, 내분을 위한 전략이니만큼 요정들이 넘어가겠느냐 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넘어갈 만하니 여태껏 이런 전략들이 쓰인 거다.
옆집 아들은 멀쩡히 살아서 돌아왔는데 내 아들은 죽었다면.
심지어 그 아들놈은 돌아가는 길 품위를 지켜야 한다고 여비에 옷들까지 챙겨줬는데 내 아들은 시신은커녕 유품 하나조차 건질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면.
세상 어떤 이라고 해도 이성적으로 판단을 하기 보다는 감성적으로 나서고 말 것이다.
분명 옆집이 무슨 수를 써서 제 자식을 멀쩡히 돌려받았다고.
적들과 내통을 했든 아니면 소극적으로 싸웠든 뭔가가 있을 거라고 말이다.
- 여러 가문들이 벨라루스를 압박하고 있긴 하지만, 전쟁이 끝난 것도 아니니 함부로 들어오지는 못 하고 있어요. 무엇보다 돈이란 건 참 위대해서, 그 돈으로 사둔 인맥들이 잘 움직이고 있고요. 괜한 분란을 만들어서 내부에서 싸우기보다는 외부의 적부터 물리치자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고 있네요. -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있다면, 그건 그저 액수가 부족해서라고 했던가.
은광 개발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 나타샤는 그것을 이용하여 벨라루스 내부는 물론이고 다른 가문들의 요정들 역시 수도 없이 매수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벨라루스를 먹어치우는 건 물론이고 다른 가문들의 뒤까지 은밀하게 조종할 정도로 나타샤의 힘이 막강해질 수 있었다.
비록 그 과정이 돈이라는 상당히 신뢰가 없는 것으로 실행되기는 했지만.
과정이 부실하다고 해서 꼭 결과까지 부실하라는 법은 또 없는 게 세상이다.
오히려 돈이라는 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달콤하고 욕심이 날 수밖에 없는 것.
덕분에 나타샤로서는 오히려 그런 것으로 이룬 관계가 어지간한 혈연보다도 더더욱 강력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 하지만 결국 요정들은 요정이에요. 한 번의 패배로 고개를 숙일 정도가 아니죠. 일단 벨라루스 내부의 시선도 있고 하니 다시금 가문의 이들을 출전시킬 것 같아요. 전장에서 누구는 챙겨주고 또 누구는 챙겨주지 않는 게 불가능하다는 건 이해해요. 괜히 저 때문에 전투에 신경을 쓰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교수님. 오히려 이번에는 더더욱 처참한 패배를 안겨주셨으면 좋겠어요. 이것 봐라, 내민 손을 붙잡았으면 이처럼 치욕적이고 굴욕적인 패배는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느냐. 라고 말할 수 있도록 말이죠. -
동족들에게 더 처참하고 끔찍한 패배를 안겨달라고 하는, 사랑에 미치고 남자에 미친 요정.
오히려 그런 부분 덕분에 클라우스는 나타샤를 더더욱 신뢰했다.
욕망에, 감정에 충실한 자일수록 예측하기도 쉽고 부리기도 쉬운 법이다.
그에 더해서 마음까지 완벽하게 넘어왔으면 물건보다도 더 쉽게 다룰 수 있을 거다.
더 큰 패배를 안겨달라, 그래서 화친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게 만들어라.
나타샤가 클라우스에게 전하고자 하는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물론, 그 부분 이후로는 몇 달 동안 만나지 못 한 제 정인에 대한 그리움을 한껏 그려내고 있었지만.
- 교수님을 위해 여기 있기는 하지만, 얼른 곁에 있고 싶어요. 이것도 전부 교수님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오늘 하루도 버텨가네요. 세상 무엇보다도 빛나는 승리를 기원합니다. -
일부러 그런 것인지 이름이 아니라 교수님이라는 호칭을 쓴 나타샤였다.
아카데미에서 지내던 그 시절이 그립기라도 한 것일까.
아무 것도 걱정하지 않고 그냥 클라우스의 곁에서 강의를 듣고 율리아나 카엘라와 대련을 하면서, 그리고 여인들끼리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던 그 때가 말이다.
화르륵-.
손 안에서 불타오르는 서신을 공중으로 날려 보낸 후 말 위에 오른다.
페르디난트와 에슐리의 병력이 출전한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으니 부지런히 말을 달린다면 이틀 안으로 따라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그 전에 그냥 스킬을 써서 이동한다면 하루 만에 다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성까지 느끼지 못 한 클라우스였다.
체력 소모도 심하고 촌각을 다투는 일도 아니니 그냥 여유를 부릴 수 있을 때 부리는 게 좋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빨리 끝내고 율리아 곁에 있어야 하는데.’
아닌 척 하지만 또 곁에 자신이 없으면 은근히 서운해 하던 여인이다.
항상 변화무쌍한 마왕님이라 항상 조심해야 하는 클라우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