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6화 〉 28장 - 체하지 않도록
전쟁에서는 땅을 점령하는 것보다 그것을 지키는 게 더 힘들다고 했다.
외부로는 적들의 반격에 맞서서, 내부에서는 적의를 품은 이들을 다독이면서.
말 그대로 안팎으로 지리멸렬한 전투들을 치러야 한다고 보는 게 맞았다.
율리아가 전선으로 이동한다면 제국을 걷어내는 거야 순식간일 것이다.
그도 모자라서 아마 바로 요정들까지 박살내고 수인들마저 제압할 수도 있다.
실제로 그렇게 하라고 부추긴 적도 있었고, 그렇게 약 3달 만에 전 대륙을 석권했었다.
하지만 그 이후를 생각한다면, 그런 쾌속 진격은 동부에게 있어 오히려 독이다.
동부는 예전부터 서부에 비해 척박한 환경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당장 1차 대륙 전쟁에서도 승기를 다 가져왔다가 클라우스의 방어에 발목이 잡혀 인적, 물적 자원을 소모한 후 그걸 회복하지 못 하여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고 말았다.
그리고 어느 정도 회복기에 들어선 서부와는 다르게 동부는 여전히 힘에 겨운 게 사실이다.
피해를 다 복구한 것도 아니고, 내전으로 인해 병력 손실도 있었다.
과거 대륙 전쟁 시기에 많게는 십만이 넘는 병력을 동원했던 걸 생각해보면, 지금의 동부는 초라하다는 말까지 나올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율리아는 전선이 아닌 뒤에서 내부를 안정시켜야 한다.
왕국을 점령하려고 했던 것이 단순한 후방의 안전 도모가 아니라 그곳에서 나는 자원으로 동부의 열악함을 상쇄하기 위함이었다면 더더욱 그리 해야 했다.
“역시 가장 큰 문제는 마족들과 인간 사이에 쌓인 불신을 어떻게 거두느냐. 이거겠죠.”
“그렇습니다. 일단 귀족들에 대한 불만과 적개심으로 인해 돌아섰다고는 하지만, 자신들의 삶이 나아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그 불만이 우리에게로 돌아올 겁니다.”
“그리 된다면 도망친 귀족들이나, 아니면 수인과 요정들에게 아주 좋은 반격의 여지만 남겨두는 꼴이 될 테고요.”
율리아의 말에 클라우스는 그 말이 맞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부의 혼란을 잠재우고 빠르게 다음 전투를 준비하는 것이 최고로 중요한 일이다.
해서 며칠 전에도 율리아가 직접 궁을 나서서 왕국민들과 얼굴을 맞대고 포고하지 않았던가.
귀족들이 가지고서 장난질을 치던 모든 땅은 그대들의 것이며, 거기에서 나오는 작물을 바칠 필요도 없고 오직 토지세만 내면 될 것이라고.
여태까지 귀족들에 의해 엄청난 양의 수탈을 당하던 이들로서는 놀랍다 못 해 충격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왕국을 공격하여 모든 것을 빼앗고 약탈하려는 자들이 되레 왕국을 점령하고서 자신들의 생활을 챙겨주고 있으니 충분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단 민심은 토지와 세금 문제로 어떻게 다독이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는 약해요. 뭔가 더 대단한 게 필요한데,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게 문제군요.”
“아뇨, 율리아. 오히려 그 토지, 그리고 세금 문제에 대한 해결이 가장 큰 강점으로 작용될 겁니다. 당장 당신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어요. 그걸 지금 당장 피부로 느낄 수가 없는 것이죠. 하지만 한 달 후면 이야기가 달라질 겁니다. 예전에는 자신들의 손에 남는 게 단 하나도 없었는데 마왕이 오고 나서부터 자신들에게 남는 게 있다면. 그게 마왕이든 뭐든 그들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성군이 되는 거죠.”
“정말로 그렇게 될까요?”
“항상 배고팠던 자들에게는 자신들의 배를 불려주는 이가 최고인 법입니다. 배를 곯지 않는 것만큼 통치자의 능력이 한 눈에 보이는 것도 없어요. 여태까지 온갖 부가 귀족들에게 집중되었으니 이제 그것들을 돌려주면 되는 겁니다.”
귀족들이 몰래 숨겨둔 재산을 전부 합한다면 가히 엄청난 양이 될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각종 사치품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 그 자체로 무기가 되는 식량이나 각종 생활품까지 몰래 창고에 쌓아두고 있었다.
어떤 방식으로 평민들을 억누르고 괴롭혀야 그들이 말 잘 듣는 노예가 되는지.
굶어죽기 않기 위해 불만을 억누르고 분노를 곱씹으며 고개를 조아리는 자들이 되는지.
그동안 아주 지독하게도 부려먹었던 터라 그 부분에는 도가 튼 자들이었다.
덕분에 동부 입장에서는, 그리고 율리아 입장에서는 일이 아주 순조로웠다.
분명 이번에도 동부의 마족들이 국경을 넘어 공격을 한 것인데.
왕국민들의 분노는 마족들에게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귀족들에게로 향했다.
아무리 화가 나고 이리저리 치이며 살면서도 끝내 귀족들에게 발악하지 않던 자들인데.
그들의 분노에 클라우스가 나서서 직접 기름을 들이붓고 불까지 지펴주었다.
“현재 도망치거나 죽은 귀족들의 재산을 몰수 중에 있습니다. 그 작업은 혹 왕국민들의 반발을 사지 않도록 마족들이 아닌 우리들에게 협조하는 인간 귀족들에게 맡겼고요.”
“안 그래도 그 부분을 걱정했었는데 역시나 당신답게 그 부분을 신경 써주고 있었군요.”
“그 왕국 출신이니 그곳의 사람들 생각을 읽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다넬 키엔마이어와 제임스 프리몬트에게 언질을 주었다.
귀족들이 어떤 곳에 자신들의 가산을 숨겨두었는지, 혹은 어떤 놈을 조져야 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지, 전부 다 말이다.
그 외에도 그 귀족들과 손을 잡고 부당한 이득을 취하던 자들은 붉은 독거미 측에 전달하여 알아서 정리하라는 말까지 해두었다.
독과점은 지금과 같은 순간에 말 그대로 최악 중의 최악이니 빠르게 나서서 분쇄해야 한다.
왕국과 동부의 긴장 분위기를 없애고 그냥 통치하는 왕과 그 지배 세력이 바뀐 것이지 삶의 방식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을 알려준다면 혼란 따위는 없을 거다.
“다음 문제는 조금 민감한 부분이에요, 율리아.”
“내 거취 문제군요.”
현재 마왕성의 위치는 동부 지역에서 약간 서쪽으로 기운 곳에 있다.
동부에서만 보자면 서쪽으로 향해있는 느낌이 있으나 대륙을 전부 통일한 후 보자면 그게 아니라 동쪽으로 치우친 감이 없잖아 있게 될 것이다.
왕성의 위치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질문을 할 수도 있지만, 서부는 인간들 외에도 수인들과 요정들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들은 비록 마왕의 밑에 굴복한다고 해도 자신들이 무시를 당하고 있다 생각한다면 머지않아서 반란을 일으킬 이들이기도 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싸그리 잡아서 잡아 족치고 공포로 통치하게 만들고 싶다.
하지만 그리 한다면 이렇게 인간 왕국 쪽에 공을 들이는 이유가 하나도 없다.
수인들과 요정들이 박살나는 꼴을 보면서 과연 왕국민들이 안심을 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다음 차례는 우리가 아닐까, 하고 걱정이 태산 같이 쌓일 거다.
“요정들과 수인들이 왕국민들처럼 내게 협조적으로 나올 시, 그들을 조금은 챙겨주는 그림이 필요하겠죠. 그런 의미에서 내 거취 문제가 더더욱 중요해질 테고요.”
“…공포로 압박하고 두려움으로 짓누르는 방법도 있기는 합니다만.”
“그렇게 말하는 클라우스 당신도 내가 정말 그렇게 하자고 하면 말릴 생각이잖아요.”
“이런, 바로 들켰네요.”
율리아도 귀족들을 대하듯 수인들과 요정들을 대할 생각은 없었다.
매번 공포와 두려움, 칼과 피로서 저들의 수긍을 얻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왕이란 존재는 모든 이들의 위에 있으면서도 또한 가장 아래에 있는 자들을 두려워해야 하는.
그런 이중적인 것들을 항상 짊어진 채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고 했다.
“나중에, 저들이 왕의 권위에 직접적으로 맞서려고 한다면 칼을 한 번 뽑아줄 수는 있겠죠. 하지만 칼로서 모든 것을 취한 후에 피를 더 흘리는 건 부담스러워요. 내가 성군이니 피를 보기 싫어해서니 그런 게 아니라, 그걸 바라보고 있을 다른 자들의 시선 때문이죠.”
“이해합니다.”
“일단 마왕성의 위치를 바꿀 생각은 없지만 대륙 통일이 마무리되어도 한동안은 서부에서 지내는 걸로 하죠. 일단 이곳 왕성에 머물면서 상황을 좀 보다가 가능하다면 요정들과 수인들의 땅에도 좀 찾아가고, 그런 식으로 민심을 보는 수밖에요.”
“혹여나 그 방식이 거슬린다면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율리아.”
“아뇨. 내가 보기에 이 방법이 지금으로서는 최고에요. 편하지 않은 길이 항상 옳은 길이라는 건 아니지만. 옳은 길은 대부분 약간의 수고로움을 지니곤 하니까요.”
마왕의 거처를 정하는 건 생각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동부로서는 갑자기 자신들의 왕이 본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게 아니라 다른 곳에 더 신경을 쏟는 것처럼 보여질 수도 있다.
반대로 서부 입장에서는 뭔가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이제부터 서부의 모든 것을 탐하는 거 아니냐는 불안감에 시달릴 수도 있음이었다.
뭐가 되었든 편하고 확실한 길은 없다, 이건 한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한 게 아니다.
수백만이 훨씬 넘는 이들의 마음을 사기 위한 것이니 당연히 어렵고 또 고될 수밖에 없다.
“클라우스. 노파심에 하는 이야기인데 말이에요.”
대륙 지도에서 두 눈을 떼지 않으면서 조심스레 입을 여는 율리아.
그녀는 제국이 그려져 있는 곳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그곳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페르디난트와 에슐리를 믿지 못 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정말로 만에 하나 그들이 전투에서 패한다면 전선을 유지하는 게 힘들어질 수도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나요?”
“네. 당장 우리로서는 왕국에 집중할 수밖에 없고, 어찌 되었든 병사는 한정이 되어 있으니 한동안은 지원도 불가능하겠죠. 심지어 동부에서 오는 병력들이 제국 전선까지 가려면 아무리 못 해도 몇 주는 걸릴 거고요. 그동안에 패배를 당한다면 수인과 요정들은 절대 그 틈을 놓치지 않으려고 할 거예요.”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는 율리아다, 실제로 수인과 요정 측은 마족들이 제국에 막 발을 들이는 순간 대대적으로 반격을 개시하여 그들에게 패배를 선사해줄 생각이었다.
현재까지는 그 어떤 패배도 당하지 않아 사기 충만한 동부의 군세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패배를 한 번 당한다면 그 사기는 언제든지 휘청거릴 수 있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쪽은 연합이고 동부는 연이은 승리에 조금은 혼미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기에 연합은 더더욱 강렬한 한 방을 노릴 것이 분명했다.
“솔직히 나는, 당신이 전선으로 향했으면 좋겠어요.”
“싫습니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단번에 율리아의 말에 거부를 표하는 클라우스.
덕분에 율리아는 조금은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고 말았다.
비록 자신과 그가 단순히 군신관계가 아닌, 훨씬 더 가까운 사이라고는 하지만.
클라우스는 율리아의 부탁에 단 한 번도 거부 의사를 내보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마왕의 권위가 손상되는 건 절대 싫으니 부탁이 아니라 명령을 내리라고 할 정도.
헌데 이번에는 너무나도 칼 같은 대답이 나왔다.
그 덕분에 율리아가 조금은 당황해서 어버, 거리고 있자 클라우스는 진지함이 가득 묻어나던 얼굴을 치우고 입가에 미소를 그리면서 입을 열었다.
“그렇게 놀랄 정도로 갑작스러웠나요?”
“아니… 뭐에요. 지금 장난친 거예요? 아니면 진심이에요. 헛갈리게 하지 말고요.”
“얼굴 표정을 굳힌 건 장난이죠. 하지만 싫은 건 진심입니다, 율리아.”
“…어째서요?”
이유를 대충 알 것 같지만, 율리아는 그래도 그 이유를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어느 누구도 감히 닿을 수 없는 존재라고 해도.
이상하게 지금만큼은 그 말 한 마디를 꼭 듣고 한 명의 여린 여인이 된 것 같았다.
“내 아내와, 내 아이를 두고 어디를 갑니까. 가서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게 분명한데.”
그리 속삭이며 클라우스가 율리아의 배를 조심스레 쓰다듬는다.
그 손길이 어찌나 따스하고 부드러운지, 율리아는 저도 모르게 ‘가지 마요. 사실 나도 당신이 계속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라고 대답할 뻔 했다.
“…클라우스.”
하지만 그녀는, 한 남자의 여인이자 한 아이의 어미이기도 하면서.
또한 이 대륙을 자신의 밑에 두고 싶어 하는 욕심 많은 마왕이기도 했다.
“다녀와요. 나 대신, 확실하게 그들을 밟아놓고 오도록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