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5화 〉 28장 - 체하지 않도록
얼마 후, 페르디난트와 에슐리는 다시 자신들의 군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원래 자신들이 이끌고 있던 병력에 율리아가 이끌고 있던 기병들까지 붙으니 순식간에 거대한 군세가 되었으며 당장이라도 대륙 끝까지 내달릴 것만 같았다.
그들은 저대로 국경을 돌파하여 제국으로 뛰어들 것이고, 아무 것도 없는 그곳을 한순간에 먹어치운 후 다음 명령을 기다릴 것이다.
그 외에 아직 정식으로 항복을 하지 않은 왕국의 북쪽은 카엘라와 세실리가 맡았다.
마족과 맞서기로 생각을 하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수인들과 요정들의 지원이 또 다시 온다면 가장 먼저 밟히는 건 자신들인지라 저항도 없이 항복을 하면 뒤가 불안하다는 게 이유였다.
해서 적당하게 무력시위를 해줄 인물이 필요했는데 카엘라는 무력으로, 그리고 세실리는 마법으로 적당한 수준의 무력시위를 할 수 있으니 제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원래는 내가 가고 싶었지만… 역시 당신이 뜯어말렸겠죠, 클라우스?”
“왕은 어디까지나 왕으로 있어야지, 선봉장으로 나서면 안 됩니다. 특히나 홀몸도 아닌 아이를 안고 있는 몸으로서는 더더욱 안 돼요.”
클라우스의 말에 율리아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아이만 아니라면 페르디난트와 에슐리를 데리고서 제국으로 향했든.
아니면 카엘라나 세실리 대신 왕국 북부로 향해서 마왕의 위엄을 보이고 왔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확실히 홀몸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고.
왕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후계자를 두는 것이니 그 부분에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율리아가 내린 결론이었다.
“어쩔 수 없네요. 조금 더 날뛰어서 요정들이나 수인들에게 공포심이라도 좀 유발하고 싶었는데. 그러면 우리 병사들이 조금 더 쉽게 싸울 수도 있잖아요.”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만 지금은 공포심보다는 왕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무척 실망했을 왕국의 이들에게 진짜 왕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더 나을 겁니다.”
왕국에는 왕이 있었다, 다만 그 왕이란 존재가 귀족들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왕은 고사하고 조그마한 영지의 귀족만도 못 한 힘을 지녀서 그렇지.
당연히 왕국의 사람들도 자신들의 왕을 뭔가 대단한 존재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저 왕좌에 앉아서 왕 놀음만 하고 있는 한심한 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일단 높으신 분이니 예의를 취하겠지만 뭔가 대단한 대우를 할 가치는 없다.
그런 감정이 귀족들은 물론이고 왕국 평민들에게조차 암암리에 퍼져있었다.
그만큼 이곳 왕국에서 왕이란 존재는 더는 떨어질 곳도 없이 추락한 이였다.
“다넬 키엔마이어였나요? 그 인간 귀족 친구 말이에요.”
“네, 맞아요.”
“정확히 어떤 인간인가요. 괜찮은 자라는 건 알고 있어요. 내가 듣고 싶은 건, 앞으로 그를 어떻게 써먹어야 가장 최고의 효율을 거둘 수 있을까 하느냐는 거죠.”
“일단 그대로 키엔마이어 후작령에 둔 후 항복은 했지만 뭔가 자율권을 지닌 것처럼 놓아두면 될 겁니다. 허면 불순한 의도를 품은 자들이든, 아니면 그냥 아직까지 마족을 믿지 못 하는 자들이든 전부 그 곁으로 몰려들겠죠. 허면 다넬 키엔마이어는 그들 중 당신에게 반하려는 자들을 알아서 처리하거나 잡아다 바칠 것이고 불안에 떠는 이들에게는 앞장서서 마왕의 치세 아래가 차라리 귀족들의 아래보다 나을 것이라고 말할 겁니다.”
“정리하자면 왕국민들에게 꽤나 인기가 좋다는 거군요. 그들의 왕보다 말이죠.”
“꼭두각시 노릇만 하던 왕이고, 한 번도 얼굴조차 비치지 않은 왕입니다. 당연히 일반 왕국민들 입장에서는 그 왕보다는 직접 대륙 전쟁에 참전하여 싸우기도 하고 자신들을 챙겨주던 그를 훨씬 더 신뢰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시작부터 믿어라! 믿지 않는다면 큰 벌을 내리겠다! 라고 말할 수는 없다.
1차 대륙 전쟁 당시 생겼던 감정의 골이 아직 다 사라지지 않았다.
그 부분을 억지로 메우려고 하기 보다는 시간을 두고서 천천히 진행하는 게 좋다.
키엔마이어 후작도 있고, 무엇보다 클라우스 자신이 있으니 어차피 왕국의 평민들은 몇 년도 아니고 몇 달 안으로 완벽하게 마왕 아래 고개를 조아릴 것이다.
저들이 귀족들에게 실망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귀족들의 치세 아래 먹고 사는 것조차 힘들었다는 거다.
전쟁이 끝났으니 사정이 조금이라도 나아졌어야 정상이었지만.
그 전부터 군량에까지 손을 대면서 장난질을 친 귀족들이었다.
당연히 먹고 사는 일은 전쟁이 끝나고서 몇 년이 지나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분명히 땅을 받아 경작을 하는데, 세금으로 내고 나면 남는 게 없다.
심지어 세금은 말도 안 되게 무시무시하고 얼마 되지도 않는 곡식을 받으면 그것을 팔아 돈을 마련하기는커녕 당장 다음 경작 때까지 버티기조차 힘들 수준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클라우스의 말에 대부분의 평민들이 창을 거꾸로 잡았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명예도, 권력도 아닌 하루를 먹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걸 귀족들은 전혀 지켜주기 못 했기에 비록 상대가 마족이라고 하지만 그 마족들이 차라리 낫겠다고 외치면서 귀족들의 등판에 창을 꽂은 거다.
“요지는 그들의 신뢰를 얻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군요.”
“귀족들 절반 이상이 죽거나 도망쳤고, 이제 왕국에서 주된 세력을 이루는 게 바로 평민들입니다. 민심은 천심이라고 했고, 그 천심이 일단 우리 쪽으로 조금 더 기울었으니 이번 기회에 완전히 이쪽으로 기울게 만들어서 외부의 바람잡이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역시… 직접 시찰을 나가는 편이 가장 좋겠군요.”
그러자 클라우스는 그게 맞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이 직접 나서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녀가 전선으로 나가는 것을 말렸다.
지금은 전투보다는 일단 점령한 지역의 민심부터 다독이는 게 중요하다.
다넬 키엔마이어와 다른 인간 귀족들이 있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보험 같은 것이다.
비록 마족이라고는 하나, 그 마족들의 왕이라고는 하나 여태껏 너희들을 핍박하고 괴롭히던 귀족과는 전혀 다른 누군가임을 알려주어야 한다.
결론이 나자 율리아는 망설일 것도 없다는 듯 지금 당장 나서자고 말했다.
호위병들을 차출해야하는 것이 아니냐는 클라우스의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곁에 마족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가면 분명 왕국민들이 겁을 먹고 다가오지 못 할 것이라고.
그리고 자신과 클라우스마저 이겨낼 수준의 적이라면 호위병이 몇이 있든 의미가 없으니 딱히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말이다.
일리가 있는 말에 클라우스도 더는 호위병으로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다만 아주 최소한의 구색을 위해서, 그리고 마왕으로서 최소한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이전부터 계속 율리아의 시중을 들고 있던 플랑슈를 대동하기로 했다.
플랑슈만이라도 대동하자는 말에 잠시 고민하던 율리아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단 둘이서 그냥 조용히 돌아다니고 싶은 게 자신의 솔직한 마음이었지만.
명색이 왕인데 시중을 들어줄 이 하나 정도는 같이 있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시찰인가요?”
클라우스에게서 명령을 전해들은 플랑슈는 바로 후드를 준비했다.
아무래도 왕국민들 몰래 바깥으로 나서서 민심을 살피려는 것이 주된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 것 같은데, 지금 이건 대놓고 공개적으로 움직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해서 여태까지의 왕이라는 존재와는 전혀 다른 이라고.
마왕은 그렇게 어리석은 방식으로 너희들을 대하지 않을 거라고 알려주러 가는 길이었다.
그렇게 세 남녀는 궁을 벗어나 조금은 혼잡한 왕성 안을 거닐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갑작스러운 두 미녀의 등장에 거기로 시선이 몰리는 듯 했지만.
곧 그녀들이 전부 마족이라는 사실과, 그 옆에 같이 걷고 있는 자가 다름 아닌 클라우스라는 것을 인지한 왕국민들이 눈에 띄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왕성 안으로 들어오면서 율리아는 저들에게 한 번 제 모습을 보인 적이 있다.
그리고 클라우스가 바로 옆에 붙어서는 상전 모시듯 하고 있으니 저 마족 여인이 다름 아닌 마왕이 맞을 거라는 예측은 더더욱 신빙성을 지니게 되었다.
왕이라는 존재가 궁을 벗어나 갑자기 지극히 평범한 이들이 있는 곳에 내려왔다.
심지어 번쩍이는 창칼을 지닌 호위병들도 없이 변변찮은 이들을, 그것도 딱 둘을 데리고서.
물론 클라우스나 플랑슈가 변변찮은, 이라는 말을 들을 수준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왕국민들이 보기에는 아무리 봐도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마왕 전하. 웅성거림이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 플랑슈. 나도 다 들려.”
“저들 사이에 전하께 해를 끼치고자 하는 이가 있을 수도 있는데, 돌아갈까요?”
“그럴 생각이었다면 네 말대로 얼굴을 가리고 나왔을 거다. 걱정 마. 네가 있고 클라우스가 있고, 그리고 나 자신도 있는데 뭐가 그리 무서울까.”
자만한다고 말하기보다는, 그게 바로 현실이었다.
셋이면 왕성 안에 있는 왕국민들 전부가 덤벼든다고 해도 반나절 안에 다 정리할 수 있다.
그런데도 쓸데없이 지레 겁을 집어먹고 몸을 돌리는 건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지금 이곳에 호위병도 없이 나선 이유가 다름 아닌 왕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가.
조금은 과하가 싶을 정도로 당당하고, 또 조금은 가까운 분위기를 연출할 줄도 알아야 한다.
“전하, 잠시만요.”
갑자기 플랑슈가 길을 가다 말고 율리아를 제지한다.
그리고서 품에 숨겨두었던 단검을 살짝 쥐는 게 아무래도 뭔가 감지한 모양.
율리아가 왜 그러냐는 말을 하려고 하는데 대답은 플랑슈가 아닌 클라우스의 입에서 나왔다.
“잠깐. 괜한 행동 말고 잠깐만 대기해라, 플랑슈.”
메이드를 제지한 후 몇 걸음 앞으로 나서는 클라우스.
그러자 이쪽을 주시하고 있던 인파들 사이에서 몇몇 왕국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군가는 팔 하나가 없고 또 누군가는 눈 한쪽을 잃은 상태.
상처가 꽤나 오래된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1차 대륙 전쟁의 참전자들인 모양이었다.
“….”
그들은 모두 침묵한 채로 클라우스와 뒤에 선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자리에 무릎을 꿇으면서 입술을 떼었다.
“사령관님, 클라우스 사령관님.”
“이제, 이제 우리 왕국은, 아니 우리 왕국민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 하여 우리 손으로 왕국의 문을 열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창칼을 겨눈 적이 있는 사이 아닙니까.”
“혹 인간이라고 하여 불이익을 당하는 건 아닐까 모두가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걱정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걱정이다.
왕국은 과거 대륙 전쟁 당시 동부와 혈전을 벌였던 사이다.
혹 그로 인해 마족들이 자신들을 함부로 할까, 불이익을 받지는 않을까.
왕국민들의 입장에서는 그런 부분이 가장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얼른 그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면 이쪽이 난처해진다.
해서 클라우스가 막 입을 열려는데, 갑자기 율리아가 그를 제지했다.
자신이 해결할 터이니 그대는 그저 지켜만 보라는 뜻이었고, 그에 클라우스는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고서 뒤로 물러섰다.
“길게 말하는 건 재주가 없으니, 짧게 말하겠다. 왕국의 백성들이여.”
“….”
“그대들은 지난 세월 귀족들이라는 자들의 밑에서 온갖 핍박을 받아왔다. 오직 해야 하는 것만 강요당하면서 그 어떤 존중도 받지 못 했지. 천하다는 이유로, 평민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심지어 전황이 불리해지니 죄다 왕국을 떠나버렸지. 불쌍한 그대들만 두고서.”
율리아의 말에 여기저기서 귀족들을 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털어갈 때는 언제고 정작 자신들을 지켜야 하는 순간에는 또 도망친 무리들.
여태 무얼 믿고 내라는 세금을 꼬박꼬박 다 바쳤단 말인가.
“해서,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하게 말해두겠다. 이제부터 그대들은 나의 이름 아래서. 마왕의 밑에서 ‘보호’를 받을 것이다. 생명을 포함하여, 모든 권리를 말이다.”
거기까지만 말했다면 조금은 부족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율리아는 현재 왕국민들의 불만 사항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민심을 사로잡아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기도 했다.
“그대들이 온갖 세금을 내면서 경작하고 있던 땅들은 이제 그대들의 것이다. 이 또한 마왕의 이름 아래서 보호 받을 권리이니, 여태 하던 대로 그대들의 삶을 살아가라. 나의 백성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