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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가 비선실세-284화 (284/341)

〈 284화 〉 27장 - 분열하고, 갈라져라

왕국에는 그 명칭답게 일단 ‘국왕’ 이라는 존재가 있다.

하지만 이미 모든 실권을 귀족 회의에 빼앗기고 그들 앞에서 그 어떤 말도 함부로 낼 수 없는, 그야말로 비참한 지경에 이른 후였다.

심지어 왕성에조차 왕에게 충성을 바치는 이들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기사들도, 병사들도, 하다못해 왕궁 안에 머무는 궁인들까지 전부 귀족들의 끄나풀이었다.

상황이 그러할 진데 왕성으로 마왕이 마족 군세를 이끌며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과연 왕의 곁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남아서 끝까지 왕을 지키고자 하겠는가.

아무도 없었다, 해봤자 일개 경비병 몇과 시녀도 아닌 하녀들이 전부였다.

끼이이익-.

대륙 전쟁 시기에도 적에게 넘어가지 않았던 왕성이 스스로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왕은 이제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 스스로를 묶은 채 새로운 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뒤를 따라서 왕성 안에 머무르고 있던 많은 이들 역시, 함께 무릎을 꿇었다.

이미 주변을 지키고 있던 귀족들은 전부 꽁무니를 뺐다.

제 세력과 기득권을 죽기보다 내주기 싫어하는 자들이었지만.

정말로 죽음이라는 무시무시한 것이 다가오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전부 내뺐다.

요제프 대공을 필두로 하여 귀족 의회를 구성하고 있던 이들 중 살아남은 이들은 제 식솔들과 가산, 그리고 기사들과 사병들을 이끌고 전부 도주했다.

그 소식들은 바로 정찰병들에 의해 율리아의 귀에 들어갔다.

자체적으로 정찰병을 운용하고 있기도 하지만, 특히나 붉은 독거미와 리르가 부지런하게 움직이면서 계속해서 정보를 모으고 있는 게 큰 역할을 했다.

- 어찌 할까요, 마왕 전하. 지금 당장 추적하면 국경을 넘기 전에 전부 잡을 수 있습니다. -

- …아니. 놓아둬. 그냥 그놈들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도록. -

율리아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이유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에 몇몇 마족들은 혹 그녀가 자비라도 베푸는 것일까 생각했지만 아무리 봐도 자비를 베푸는 이의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 노리는 게 있고, 그게 뜻대로 잘 풀려서 유쾌한 이의 모습 같다고 할까.

어찌 되었든 그렇게 귀족들이 전부 내뺐으니 왕국은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마침내 왕성 안으로 들어와 궁 앞에 다다른 율리아는, 스스로를 꽁꽁 묶은 채 처분만 기다리고 있는 인간 측 왕을 마주할 수 있었다.

“어리석고 어리석어 나라를 망조에 들어서게 하고 백성들을 도탄에 빠트린 죄 작다고 할 수 없을 거다. 하지만 그대 스스로 뭘 어떻게 해볼 수 없을 수준으로 귀족들의 폐단이 심각했으며 무엇보다 왕은 왕을 죽이지 않으니, 왕의 자리는 거두되 목숨은 살려주도록 하겠다.”

승자의 자비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민심을 관리하는 최소한의 장치이기도 했다.

비록 왕이 왕답지 못 한 존재였다고 하지만 결국 왕은 왕이다.

귀족들도 형식적으로나마 자신들의 왕 앞에 공손한 기색을 보였을 정도다.

그것을 다른 이도 아니고 율리아 스스로 깨트린다면 그건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게 아니라 오히려 역으로 제 권위를 깎아먹는 짓과 다름이 없었다.

왕좌에 앉아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는 율리아.

처음부터 자신을 따랐던 충성파의 일원인 아인부터 나중에 합류한 페르디난트 엘세, 에슐리 팔라티나트와 같은 마족들이 있었다.

그 옆으로는 인간 측 인물이었던 다넬 키엔마이어와 제임스 프리몬트, 그 외의 귀족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두 종족 사이에는 카엘라와 플랑슈가 얌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그들의 앞에 이 모든 것을 시작하는 길을 열어준 클라우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마침내, 왕국을 손에 넣었다. 이번의 전투만 보았다면 짧았으나, 이전의 전쟁까지 생각한다면 참으로 길고도 길었던 시간이었다.”

“감축드립니다, 마왕 전하.”

“아직 이르다. 이제 시작이야. 오히려 지금보다도 더 신속하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말하며 율리아가 가볍게 손짓을 했다.

그에 클라우스가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 뒤를 따라 마왕의 신하들이 전부 일어서서는 그녀의 앞으로 모여들었다.

“클라우스.”

“네, 마왕 전하. 계획한 대로 한 달이 되기 전에 왕국을 점령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아직까지 정리가 되지 않은 지역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영양가도 없고,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고개를 숙일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클라우스의 말에 주변에 모여 있던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율리아의 손에 들어온 왕국 지역은 남부 일대와 왕성, 키엔마이어 후작령을 포함한 중부, 그리고 대삼림부터 시작되는 북부 지역 약간이었다.

면적으로 따진다면 왕국의 거의 8할을 먹어치운 것이었으며 왕까지 손아귀에 있다.

즉 마족들 입장에서는 이제 실질적으로도, 명분으로도 왕국을 완벽하게 손에 넣었다고 할 수 있었다.

“좋은 소식이군요. 허면 전하. 잠시 병사들에게 휴식을 주면서 잠깐 상황을 살피는 건 어떨지 여쭙겠습니다. 그리 많은 전투를 치르지 않았다고 하지만 군에는 기세라는 것이 있는 법입니다. 오히려 그런 전투가 없던 부분이 그 기세를 무뎌지게 만들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들 정도입니다.”

페르디난트의 말에 몇몇 마족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제대로 된 전투를 치르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자신들 역시 공성전을 치렀다.

하지만 그게 피를 말리는 격전이었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었다.

오히려 그 피 말리는 격전은 마왕과 클라우스가 다 치렀다.

그럼에도 휴식을 제안하는 이유는 군대의 상황 때문이었다.

이전 대륙 전쟁으로 인해 이제 마구잡이식으로 병사들을 소모하는 게 불가능하다.

병사 하나, 하나가 무척이나 소중한 백성이자 앞으로의 노동력이다.

아군이 많이 상한다는 건 그만큼 후일의 손해라고 볼 수 있으니, 준비를 다시금 하여 비전투 손실이라도 최소한으로 줄이겠다는 뜻이었다.

“…일리는 있는 말이군. 에슐리 팔라티나트. 그대도 같은 생각인가?”

“저는 페르디난트 엘세와 조금 다릅니다. 병사들의 휴식이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그보다는 하루 빨리 국경을 넘어 제국까지 진입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뭐지?”

“왕국에서 도망쳐 제국으로 향한 인간 귀족들이 또 다시 방어선을 쌓고 귀찮게 하기 전에. 수인들과 요정들의 원군이 재차 당도하기 전에 제국까지는 밀어내는 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흐음. 그대의 말도 타당하다고 볼 수 있겠어.”

턱을 쓰다듬으면서 율리아는 가만히 생각에 잠기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말고 말없이 자신의 옆에 서있는 클라우스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대는 어찌 생각하지, 클라우스?”

“저는 에슐리 팔라티나트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병사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현재 우리에게는 휴식을 취할 여유 따위는 없습니다. 최대한 빨리 이동해서 제국까지 전부 무너트리고 요정 측과 직접 얼굴을 맞대고 있어야 합니다.”

그에 율리아는 조금 전과 같이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이유를 물었다.

왕국을 점령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병사들을 다시 끌고 나간다면 그들의 불만도 꽤나 쌓일 것이 분명한데 왜 그리 해야만 하느냐고.

“뜸을 들이다가는 요정과 수인들이 제국 내에 들어설 겁니다. 동시에 왕국 귀족들도 우리가 추격하지 않는 걸 깨닫게 되면 그곳에 새로이 집을 차리려고 하겠죠.”

“그게 문제인 것인가? 그들이 제국을 이용한다는 게?”

“아뇨. 가장 큰 문제는 제국 내의 분위기입니다.”

클라우스의 말에 율리아는 물론이고 주변의 이들 전부가 그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제국 내의 분위기가 뭐 어쨌기에 그런 말을 하느냐는 듯.

“과거 1차 대륙 전쟁 시절에 왕국은 동부와 직접 창칼을 맞대고 처절하게 싸웠습니다. 그리고 수인들과 요정들은 비록 직접적으로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만 어찌 되었든 계속 원군을 보내서 동부와의 전투를 지속했죠.”

“그랬지. 헌데 그게 어쨌다는 건가?”

“반대로 제국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무 것도 한 게 없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무기력한 존재들이기에, 아무런 힘도 없는 자들이기에. 그리고 그걸 왕국도, 요정들과 수인들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어떤 재촉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걸고 있는 간판만 제국이지 실상은 왕국의 3할에도 채 미치지 못 하는.

공국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너무나도 작은 곳이 바로 지금의 제국이다.

황제는 얼마 전 붕어했고 후계자는 없으며 귀족들은 무기력하고 제국의 백성들은 그저 하루 일해 하루 먹고 사는 일에만 온 신경을 기울일 뿐이다.

1차 대륙 전쟁 시기에 의용병 같은 형식으로 병사들을 뽑기는 했지만.

워낙 수준이 떨어지는 군대라 전선에 제대로 투입된 적도 없었으며 때문에 다른 이들에 비해서 마족이나 동부에 대한 거부감이나 적의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곳.

그게 바로 현 제국의 상황이라고 클라우스는 말했다.

“즉 이 말은, 왕국과 다르게 제국은 저항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순할 거라는 겁니다. 우리가 왕국으로 들어온 후 민심을 다잡기 위해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헌데 그게 제국에는 필요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전방으로 두고 잠시 이용하기에 뒤통수가 싸늘하지도 않을 테고 요정들이나 수인들의 회유에 넘어갈 확률도 무척 낮아는 것이지요.”

클라우스가 그렇게 말하다 모든 이들이 아하, 하고 탄식을 내뱉는다.

워낙 제국의 상태가 엉망이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있었는데.

눈앞의 저 남자는 다른 사소한 부분까지 전부 파악하고서 이용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반대로 제국을 향한 공격이 늦춰진다면 조금 전 말했듯 수인들과 요정들이 먼저 들어와서 방어선을 만들고 동시에 제국민들에게 동부에 대한 적의를 심어주려고 할 겁니다. 마침 왕국에서부터 피신 중인 귀족들까지 있으니 아주 제격이겠죠.”

“수인들은 몰라도 요정들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겁니다. 우리 마족들에 대한 적의를 심는 것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들이니까 말이죠.”

아인이 은근히 동조의 뜻을 내비치자 마족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수인들은 입으로 뭔가 하는 걸 싫어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요정들은 달랐다.

그자들의 속삭임에 마족들이 무슨 악마의 후예라고 비쳐진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리고 분노가 이글이글 타오를 정도였다.

“압박을 주기 위해서라도 제국까지는 손에 넣어야 합니다. 동시에 도망친 귀족들이 제국 땅이 아닌 수인들, 혹은 요정들의 땅에 틀어박히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자 하는 이유라도 있는 것인가?”

율리아의 질문에 클라우스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무슨 일이 있어도 제국까지 먹어치우고 도망친 귀족들을 요정들과 수인들 틈바구니에 넣으려고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래야 더더욱 분열하고, 갈라질 테니까. 스스로 물어뜯고 싸우느라 바빠서 적이 눈앞에 몰려왔음에도 주변을 경계하느라 피곤해질 테니까!’

원래 살고 있던 자들은 웬 굴러온 돌이 자꾸 신경을 거슬리게 하니 짜증이 날 테고.

반대로 쫓겨 온 자들은 혹 이것들이 자신들을 무시하면서 만에 하나 화친을 위해 써먹는 선물로 사용하지는 않을까 긴장을 하게 될 것이다.

클라우스는 바로 그 부분을 이용하기 위해 일부러 귀족들을 놓아준 것이었다.

‘어차피 나중에 가면 다시 모조리 다 내 손에 들어온다.’

먼저 죽은 놈들은 그래도 낫다고 할 수 있을 거다.

최소한 자신들이 이룬 모든 것이 완전히 허물어져 가루가 된 장면을 보지는 않을 테니까.

“…허면 제국까지 빠르게 점령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리겠다. 그것보다 누구를 보낼지 고민이군. 마음 같아서는 내가 움직이고 싶으나 이곳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라도 내가 움직이는 건 지양해야 할 듯 해서 말이야.”

그렇게 중얼거린 율리아는 페르디난트와 에슐리를 지목했다.

서로 합심하여 이번에는 그 어떤 도움이나 지원도 없이 제국을 바치라는 것이었다.

율리아의 말에 페르디난트와 에슐리는 동시에 고개를 숙이면서 외쳤다.

“명 따르겠습니다, 나의 왕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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