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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가 비선실세-283화 (283/341)

〈 283화 〉 27장 - 분열하고, 갈라져라

동부의 군세가 왕국 국경을 넘은지 정확히 4주째에 들어섰다.

클라우스가 말한 그대로, 왕국의 모든 방어선은 붕괴되었고 더는 동원할 수 있는 병력도, 징발할 수 있는 어떤 자원도 남지 않았다.

남부 지역이 전부 마족들에게 넘어간 이상 이제 장기전으로 간다고 해서 마족들을 이겨낼 수도 없고 덤으로 거의 대부분의 병력이 흩어지거나 항복하여 남은 병사들이 전부인 상황이다.

심지어 그 병사들마저도 언제 도망을 치거나 마음을 바꿔 먹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귀족들의 속내에 가득했다.

그러는 사이 중앙 지역의 에슐리 팔라티나트와 남부의 페르디난트 엘세는 모든 방어선을 돌파하여 마침내 자신들의 왕이 기다리고 있는 키엔마이어 후작령에 다다랐다.

“움직이는 데에 있어서 조금의 소란이라도 보이면 극형으로 다스릴 거라고 전해.”

“모두에게 알려라. 만에 하나 인간들에게 해를 끼치는 놈이 있다면 경중을 막론하고 무조건 가장 무거운 벌을 내릴 것이라고.”

에슐리와 페르디난트는 후작령으로 향하면서 그런 명령을 내려두었다.

왕국의 많은 이들이 폭정을 일삼던 귀족들에게 진절머리를 내면서 돌아섰다고 하지만.

여전히 그들에게 있어 마족은 과거 엄청난 전쟁을 일으킨 자들이자 부모형제자매, 친척과 친구들을 해라기도 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이 타이밍에 자신들이 실수라도 한다면 기껏 회유한 자들이 다시금 저항 세력으로 돌아설 수도 있다.

다 된 스프에 코를 빠트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오히려 이런 때에 더더욱 병사들을 닦달해서 그 어떤 허튼 짓도 하지 못 하게 해야만 했다.

덕분에 마족 병사들은 전투를 치를 때보다도 더욱 긴장해서 진군했다.

길을 오고가면서 혹 험악한 분위기를 줄까 길가에서 구경하는 인간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가끔 가다가 몇몇 인간들이 그들에게 뭔가를 내어주기도 했지만 일절 받지 않고 그저 묵묵히 갈 길이나 갈 정도였다.

‘인간이라고 해서 함부로 대할 이유는 이제 없어. 적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들과 함께 같은 울타리 안에서 살아갈 이들이야.’

‘마왕 전하의 뜻이 확고하다. 단순히 점령 좀 하고 물자를 수탈하는 수준이 아니야. 이들이 곧 새로운 시대의 바탕이 될 자들이니 어떤 실수도 있어서는 안 돼.’

클라우스가 미리 점찍어둔 인재들답게, 에슐리와 페르디난트는 율리아와 클라우스의 뜻을 알아차리고서 그 어떤 실수도 저지르지 않았다.

왕국이라는 성이 다 허물어지기는 했지만, 아직 왕국 전부를 손에 넣은 것은 아니다.

괜스레 기대감에 부풀어 실수라도 저지른다면 기껏 세운 공적에 흠이 생길 것이다.

두 남녀 마족은 분명 공명심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조심했다.

지금 현 상황에서 마왕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인물은 하나도 없다.

그녀 스스로 군을 이끌고 들어가서 왕국의 절반을 마비시켰다.

순수하게 전공으로만 따진다면 자신들의 공을 합친 것보다도 뛰어나다.

때문에 더더욱 이 둘은 이후의 행보에 주의를 할 필요가 있었다.

“뭐들 그리 긴장했어. 다들 전하께서 내린 일을 완벽하게 수행했잖아?”

…아니, 아무래도 한 명 있는 것 같다. 마왕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인물이.

자신들의 앞에서 나아가고 있는 저 인간 남자.

그의 말에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요새 하나가 통째로 항복까지 해버릴 정도였다.

그걸 보고 있자니 다시금 이곳 왕국 땅에서 ‘클라우스’ 라는 이름이 지니는 가치를 알 수 있었다.

“완벽하게 수행하기만 했지. 정작 공이라고 볼 수는 없잖아.”

“에슐리 팔라티나트의 말이 맞다, 클라우스. 우리는 그냥 마왕 전하께서 놓아주신 길을 걸었을 뿐이야. 당장 후방에서의 지원이 있었다면 우리가 여기까지 오지도 못 했을 거다.”

“수준이 더 떨어졌다면 그렇게 놓아준 길을 걸으라는 명령도 못 들어먹었을 텐데. 당장 그 멍청한 인간 귀족들을 봐. 누구 하나 제대로 뭘 해낸 게 없잖아.”

“크흠….”

“그렇긴 한데 그건 귀족들이 너무 수준 이하였잖아. 개들이라고 해도 그것보단 잘 지키겠어.”

에슐리의 직구에 클라우스는 크헙,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왕국 귀족들의 수준은 가히 개만도 못 한 것이었다.

설정에 충실한 게 죄는 아니라고 하지만 정말 ‘사람이 이 정도로 병신일 수가 있나?’ 라는 부분의 끝판왕을 보여주었다고 할까.

솔직히 이렇게 뒤를 들이칠 필요도 없이 그냥 클라우스 본인이 앞에 나서서 요새를 하나씩 함락시켜도 귀족들은 뾰족한 수를 내놓지 못 했을 것이다.

그냥 항복하면 마족들이 너희들을 모조리 잡아먹는다든가 노예로 판다는 헛소리를 퍼트리면서 어떻게든 날조와 선동으로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려고 했을 거다.

“아무튼 공을 세우는 것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라. 왕국 이후의 일부터는 마왕 전하께서 움직이지 않고 너희들에게 일임하실 거다.”

“…정말인가?”

“마왕 전하도 좀 쉬셔야지. 대삼림을 통과하는 게 쉬운 일도 아니었고, 너희만큼이나 많은 전투를 치르셨어. 휴식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리고 왕국에 남아서 분위기를 인정시킬 필요도 있고.”

왕국을 뚫어내는 것이 1차이고, 다음으로 수인들과 요정들을 밀어버리는 게 2차이다.

그 사이에 제국이 있다고는 하지만 걸고 있는 간판만 제국이라는 화려한 것이지 실상은 그냥 왕국보다도 못 한 곳이다.

1차 대륙 전쟁에서 왕국처럼 온갖 고생을 하면서 그래도 조금은 강성해질 수 있는 기회를 붙잡은 것도 아니고 요정이나 수인들처럼 원래부터 세력이 공고했던 것도 아니다.

그냥 왕국과 수인, 요정들이 서로 싸우지 않기 위해 일종의 완충 지대로 놓아둔 게 전부다.

당연하게도 그곳에서 뭔가 괜찮은 인재가 나온다든가 혹은 꽤나 강성한 세력이 등장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왕국이 다 무너진 지금에서 남은 것은, 수인과 요정이 전부다.

그리고 율리아는 그 두 강력한 적들을 에슐리와 페르디난트에게 맡겨보겠다고 결정을 했다고.

클라우스는 그렇게 두 마족들에게 전달해주고 있었다.

“…요정들과 수인들의 일을 우리에게 맡기신다.”

“그래. 혹시 뭐 걱정이라든가 불만이라도 있나, 페르디난트? 목소리가 좋지 않은데.”

“설마 그러겠어? 오히려 전하께서 우리들을 생각하셔서 전장을 내어주신다면 우리야 감읍할 뿐이지. 솔직히 나는 제대로 된 전투를 치른 게 없어서 몸이 쑤실 정도라고.”

페르디난트에 비하면 상당히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는 에슐리다.

패기 가득하게 중앙 지역으로 들어갔는데 적들은 최대한 그녀를 끌어들여 보급선을 늘여놓고, 절대 전면전을 해주지 않으면서 요새를 두고 버티기에 집중했다.

원래의 그녀라면 어떻게든 적을 꼬드겨서 전장으로 불러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율리아의 명령도 있고, 그녀 본인도 괜스레 병력을 희생시켜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해서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하지 않았고 그 와중에 남부와 같이 중앙 지역의 왕국군도 거의 대부분이 알아서 무너져 내렸다.

부장들은 행운이 찾아왔다고 좋아했고 에슐리 본인도 괜한 피를 흘리지 않아서 기뻤지만.

동시에 에슐리는 한 줄기 아쉬움을 안고서 입술을 깨물어야만 했다.

‘팔라티나트의 영광을 다시 찾고 싶은데. 이렇게 그냥 줄 잘 타서 자리 하나 꿰찼다는 말을 들을 수는 없어, 절대로.’

공을 세우는 것에 눈이 먼 수준은 아니지만, 공명심은 분명히 있다.

에슐리는 자신의 손으로 허물어지기 직전의 팔라티나트를 일으켜 세우고 싶었다.

그래서 단순히 자신을 이용만 해먹는 게 아니라 진짜 의미의 신하로 쓰고자 하는 율리아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이었다.

“자신 있는 모양이네, 에슐리.”

“이미 주력 중의 주력을 마왕 전하께서 박살내셨잖아. 그렇다면 남은 건 2군이라는 소리지. 그 정도 수준이라면 내 선에서 어떻게든 정리가 가능할 거야.”

“본인을 너무 과신하는 건 아닌가, 에슐리 팔라티나트? 마왕 전하께서는 마왕 전하시니 가능한 일이었을 수도 있어. 그리고 적들도 멍청이가 아닌 이상 더욱 조심해서 군을 움직일 거다. 더해서 이제는 저들이 오는 게 아니라 우리가 가야 할 터인데.”

페르디난트의 말에 에슐리가 읏, 하고 입술을 깨문다.

처음에는 그저 그런 마왕인줄 알았는데 요근래 들어서 엄청난 성장을 보인 율리아.

아니, 거의 각성을 했다고 봐도 될 정도로 몰라보게 달라진 그녀였다.

때문에 페르디난트는 물론이고 에슐리도 그런 율리아의 변화를 느게 느낀 부류다.

당연히 그녀가 자신보다도 훨씬 더 뛰어나고 더 강한 이가 되었음을 확신하고 있고.

그러자 클라우스는 잘 해낼 거라고 에슐리를 응원했다.

페르디난트 말대로 적들도 바보가 아니고, 당연히 대비라는 것을 할 테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아서 다 무뎌진 창칼이 될 것이었다.

“다 왔군.”

마침내 키엔마이어 후작령, 그 중에서도 마왕이 머물고 있는 후작가의 성에 다다르자 클라우스와 페르디난트, 그리고 에슐리가 전부 말에서 내렸다.

인간들이 공을 들여 지은 성에 마족들이 거리낌 없이 들어온 부분도 그렇고.

그런 마족들의 등장에도 딱히 별 반응 없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 인간 병사들이나 기사들도 모두가 참 묘한 느낌이 드는 그림이었다.

“…몇 번 봤던 장면이지만 진짜 기분 묘하네. 인간들이 있는 성 안에 이렇게 들어오는 거.”

“이하동문이다.”

“익숙해져라. 이제는 왕국의 사람들이 아니라 마왕 전하의 충성스러운 자들이니까.”

걸음을 옮겨서 키엔마이어 후작이 원래 기거하던 곳으로 향한다.

현재는 이곳의 영주가 아닌, 그 영주의 군주가 머무는 공간이 되었다.

굳이 말하자면 이곳이 제 2의 마왕성이 되었다고나 할까.

“어서들 와. 고생들 많았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마침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던 듯 차를 마시고 있던 율리아가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율리아와 조우하자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바로 무릎을 꿇고서 왕에게 예의를 갖춘다.

“승전을 축하드리나이다, 전하.”

“이미 시간이 꽤나 흐른 전투야. 굳이 또 축하 인사를 받을 필요는 없지. 오히려 그대들이 공을 세운 거 아니었나? 국경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요새를 몇 개나 떨어트린 건지 계산하면 그대들도 분명 대단한 공적을 남겼다고 말할 수 있을 텐데.”

“전하께서 후방을 맡아주시지 않으셨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페르디난트의 말에 율리아는 되었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자신이 후방을 교란시킨 건 맞지만 결국 여기까지 오는 동안 별 탈이 없었다는 건 그대들의 능력 또한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그대들을 거둔 것이 역시나 틀리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마왕은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 왕국의 마지막만 도모하면 된다.”

“왕성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동안은 혹여나 왕국 측 인간들의 반발을 살까 조심스럽게 행동했지만 이제는 아니야. 곳곳에서 왕국민들이 들고 일어났으며 왕국의 여러 이름 난 이들까지 내게 항복했으니, 이제 민심은 완벽하게 저들을 떠났다. 다 쓰러진 집을 밀어버린다고 해서 반발하는 이는 없을 거야. 이제 다 정리해야지.”

남부도 무너졌고, 그나마 사람 구실을 하던 자들은 다 돌아섰고.

귀족이라고 남은 자들은 본인들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이며.

마지막으로 왕이라는 자는 ‘왕’ 이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인물이었다.

이제는 툭, 하고 밀면 알아서 와르르 무너질 모래성이 되어버린 왕국.

그곳에 살아가는 이들도 헛된 희망을 놓을 수 있기를.

혹은 가슴 안에 가득 쌓인 분노를 풀 수 있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쉬운 왕국이었을 줄이야. 어이가 없군.”

그렇게 말하면서 율리아는 클라우스를 바라보았다.

왕의 시선에 페르디난트와 에슐리 역시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과거 저 남자는 도대체 혼자서 어떤 싸움을 해왔던 것인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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