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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가 비선실세-282화 (282/341)

〈 282화 〉 27장 - 분열하고, 갈라져라

몇 달, 아니 몇 년이고 버틸 것만 같았던 왕국의 남부 방어선이 단 3주 만에 무너졌다.

세상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 한 일이 벌어졌다, 가히 충격적인 상황이었다.

왕국과 제국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저 멀리 요정과 수인들도 놀랐지만.

가장 충격을 먹은 것은 그 왕국 남부를 두드리던 마족 병사들이었다.

아직 1차 대륙 전쟁의 고참병들이 서부에 많이 남아있는 것처럼.

동부에도 그 때의 힘겹고 길었던 전쟁을 기억하고 있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들에게 있어 왕국 남부는 절대 넘어설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이었으며 감히 깨트릴 수 없는 파도였고, 죽어서도 오를 수 없는 하늘의 산이었다.

그곳을 점령하기 위해 못 해도 수만에 이르는 마족들이 동원되었다.

하지만 단 한 명의 마족도 결국 남부에 마왕가의 깃발을 꽂을 수는 없었다.

초기에는 압도적으로 유리했던 전투가 장기전이 되면서, 그리고 남부를 장악하지 못 하면서 지리멸렬해졌고 급기야 불리한 형세로 돌아가다 못 해 전쟁에서 패하기까지 했다.

헌데, 그런 단단했던 남부가 본격적으로 두들기기 시작하니 말 그대로 와르르 무너졌다.

전투다운 전투를 몇 번 벌이지도 않은 것 같은데, 스스로 문을 열거나 내부에서부터 서로 분열하고 갈라져서 마족들의 공격을 허용했다.

“이게 도대체 뭡니까…?”

페르디난트의 옆에 서있던 부관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마왕에게서 남부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었다.

1차 대륙 전쟁에서 결국 뚫지 못 했던 남부의 방어선을 자신들이 뚫어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클라우스라는 최대의 난적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강력한 구심점이자 날카로운 창이었고 단단한 벽이었던 남자가 자신들 편에 있다.

그 부분 하나만으로도 안심이 되었고, 예전과는 다르게 자신감을 가지고 국경을 넘었다.

“…나도 할 말이 없군.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페르디난트와 휘하 마족들은 상황 파악을 하느라 바빴다.

얼마나 예상치 못 한 일이었으면 혹시 이게 전부 왕국, 아니 서부 전체가 그려둔 거대한 함정은 아닐까 하고 걱정까지 할 수준이었다.

“요새들이 조금 버티나 싶더니 갑자기 이러는 이유라. 지원군이 전멸했다고는 해도 이렇게 심할 정도로 분열을 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요정들과 수인들도 멍청한 자들이 아니니 어떻게든 전선을 왕국에 국한시키고 싶을 게 아닙니까? 다시금 버티기에 들어가면 원군이 또 올 터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와르르 무너질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 했습니다.”

“페르디난트님. 역시나 그 남자의 존재가 이런 영향을….”

“음. 아무래도 그 부분의 가능성이 무척이나 높겠군.”

당장 1차 대륙 전쟁에서 클라우스가 모함을 받아 쫓겨났던 순간.

남부군은 다른 귀족을 사령관으로 받게 되었고 그 직후 전투에서 대패했다.

클라우스가 몇 년 동안 피땀 흘려 이룩한 정예병들이 갈려나갔고, 단 한 뼘의 땅도 내어주지 않았다가 순식간에 남부의 반 가까이를 상실하기도 했다.

아무리 강력한 군대라고 해도 같잖은 지휘관이 병권을 쥐는 순간 망한다.

사자가 지휘하는 양떼가 양이 지휘하는 사자떼보다 강하다는 말은 아무래도 사실인 모양.

그런 부분을 보자면 그 클라우스가 마족들에게로 온 것이 왕국군들에게는 악재로 작용했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아직 함락하지 않은 요새가 몇 남아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미 중요한 요새들은 거의 대부분이 항복을 하거나 완전히 전소되었다.

안에 있던 병사들이 불을 지르고 모두 흩어진 모양인데, 그곳을 맡고 있던 지휘관들이나 기사들이 그걸 전혀 막지 못 했다는 건 참 이상한 일이었다.

“페르디난트님. 전방에 한 무리의 기병들이….”

“적인가?”

“일단 인간들은 맞습니다만, 딱히 이쪽을 보고서 전투 준비를 하는 모양새는 아닙니다.”

“…허면 조력하고자 하는 자들인 건가?”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무장 상태를 보아하니 최소한 정규군 수준입니다.”

“일단 기본적인 준비를 하도록. 만에 하나 속임수임을 가정해야겠지.”

적이 비록 소수라고 해도 이동 중에 기병의 공격을 받으면 결코 유쾌하지 않을 것이다.

해서 페르디난트가 막 정지 명령을 내리고 진형을 준비하라고 하는 순간.

다시금 정찰병들이 도착하여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보고를 올렸다.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곧 그들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페르디난트 엘세.”

“…클라우스?”

“생각보다 늦었네. 이 앞에 있는 요새까지는 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솔직히 나는 이 속도도 너무 빠르다고 여겼는데.”

“이미 남부 후방 지역의 요새는 대부분 우리 수중에 떨어졌어. 당장 앞에 있는 요새만 넘어서면 왕국의 중앙 지역까지 한순간에 도달할 텐데.”

웃는 낯으로 그렇게 말하는 클라우스를 보고 있자니 페르디난트는 어이가 없었다.

자신들이 걸어온 그 길을 이전 전쟁에서 걸어보겠다고 몇 명이 전장의 시체가 되었던가.

이곳을 점령하기 걸렸던 세월만 7년이 넘는다, 그야말로 억겁의 세월 수준이었다.

그걸 고작 몇 주 만에 돌파했다, 아니 돌파한 수준도 아니고 그냥 걸었다.

그 어떤 저항도 없이 그렇게 원했던 왕국의 남부를 하나씩, 하나씩 손에 쥐고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서 뒤집어질 일인데 클라우스는 늦은 게 아니냐고 말하고 있다.

“…아니, 그보다 자네가 여기는 무슨 일이지? 키엔마이어 후작령에 있는 거 아니었나?”

“네가 너무 늦어서 마중이나 나온 거지. 그런데 마침 요새 하나를 남겨두고 있더군. 해서 내가 대신 뚫어줄까 했어.”

“자네가 뚫겠다고? 요새를?”

“그래. 뭐 문제라도 있나?”

“아니….”

페르디난트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뒤를 쳐다보았다.

클라우스의 뒤에 서있는 자들은 아무리 많게 잡아줘도 서른을 넘을까 말까 한 기병들이다.

저들을 데리고서 요새 하나를 돌파하겠다고?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그런데 더 황당한 건, 저 클라우스라면 혹시 정말로 저 서른을 데리고 요새 하나를 돌파하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하는 자신의 속내였다.

“그런데 또 이렇게 페르디난트, 너를 만났으니 같이 가도록 하지. 아, 공적인 업무를 수행 중이니 페르디난트님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참고로 클라우스는 여전히 별다른 직책도, 자리도 없는 상태다.

그에 반해서 페르디난트는 율리아에게 남부 지휘관이라는 자리도 받았고, 무엇보다 엘세 가문을 이끄는 가주이니 일단 동부에서의 사회적 위치는 매우 높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지 말지. 오히려 내가 더 소름이 돋을 지경이야.”

하지만 페르디난트는 왕국의 귀족들과는 궤를 달리 하는 인물이다.

당장 클라우스가 어떤 인물인지 잘 알고 있는게 고작 그런 사회적 위치 가지고서 우위에 서려고 하는 그런 멍청한 짓은 할 생각이 없었다.

더해서, 이렇게 보기에만 아무 것도 없다 할 뿐이다.

실상 마왕이 가장 아끼는 신하이자 오직 옆을 내어준 사내라는 걸 페르디난트도 어렴풋이 눈치를 채고 있었다.

아마 언젠가는 자신의 위치마저 가뿐하게 뛰어넘고 곧 아득하게 높은 곳에 있을 남자인데 그나마 친구 사이라는 부분을 본인이 나서서 없애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면 가볼까?”

미소를 지으면서 가장 앞에 서서 움직이는 클라우스.

페르디난트는 그런 제 친우를 잠시 바라보다가 뒤를 따라서 이동했다.

“대승을 축하한다. 듣자하니 정말이지 엄청난 승리더군.”

“아아, 그 전투 말인가? 상당히 어려웠어. 솔직히 운이 많이 뒤따랐지.”

“운도 실력인 세상이야. 더구나 요정과 수인 연합 수만이라면 우리 마족들도 그와 동일한 규모를 동원해서 싸워야 했을 정도야. 그걸 병력도 열세인 상황에서 이겨냈다니. 아니 이긴 수준이 아니라 그냥 처참하게 무너트렸다고 해야 하려나?”

“또 흥분했구만. 진정해, 페르디난트 엘세.”

“진정하게 생겼나! 자네는 역사적인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낸 거야. 마족 역사에 길이 빛날 대승리를 만든 것이라고!”

“미안하지만 그 전투를 지휘한 건 마왕 전하시고, 큰 공을 세운 건 카엘라 전사장. 그리고 그 직전에 항복하여 병력을 지원해준 인간 왕국 측의 다넬 키엔마이어다.”

“그게 무슨… 설마 자네, 논공행상에서 빠지겠다는 건가?”

페르디난트의 말에 클라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율리아에게도 다 말해두었고 허락까지 받아낸 상황이라고 덧붙이기도 했고 말이다.

“아니… 그게 말이 되나? 자네를 따르던 병사들이 큰 역할을 했다는데. 그리고 자네의 전략이었다고 분명 마왕 전하께서 서신까지 보내셨는데….”

“이미 결정이 다 난 일이야, 네가 뭐라고 하든 변하지 않을 거다.”

“클라우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아마 더 모를 거다. 사실 이 다음 요새를 함락시킨 건 내가 아니라 너라고 할 생각이거든.”

“뭐?”

그건 또 무슨 말이냐는, 왜 그런 짓을 하냐는 질문을 무시한 채로.

클라우스는 저 앞에 보이는 요새를 향해 조금씩 다가섰다.

슈웃!-

순간, 뭔가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들은 클라우스가 슬쩍 고삐를 잡아당기자 말이 멈춰 섰고, 곧 바로 앞에 화살 한 대가 땅바닥에 거의 반 가까이 쑤셔 박혔다.

“그 이상 다가온다면 고슴도치로 만들어줄 것이다! 허튼짓 하지 말고 썩 꺼져라!!”

요새에서 거친 목소리 한 줄기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클라우스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의 옆구리를 살짝 찼다.

그러자 말은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고, 그 직후 또 한 발의 화살이 날아왔다.

이번에는 클라우스의 옆을 스쳐지나가는, 꽤나 위협적인 일격으로 말이다.

하지만 클라우스는 전혀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움직였다.

마침내 요새 바로 앞까지 당도하자 그는 요새 위를 바라보면서 큰 목소리로 입을 열았다.

“홀 라텐! 오랜만이군. 자네가 역시 이곳을 지킬 줄 알았어.”

“…마족들이 오기를 바랬는데, 하필이면 그대가 오는군. 클라우스.”

“어쩌다 보니 내가 오게 되었어. 이미 다른 요새들은 죄다 무너지거나 항복을 했던데 중요한 길목을 지키고 있는 요새 중 멀쩡한 곳은 여기가 유일하더군.”

“….”

“이제 그만하지. 다 끝났어. 왕국은 무너졌어, 홀.”

“아직 아니지 않은가. 국왕이 계시고 귀족들이 남았으며 아직도 많은 병사들이….”

“그 병사들이 과연 그 왕이나 귀족들을 위해 싸우려고 할까?”

클라우스의 외침에 홀 라텐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도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주변의 요새들이 어떤 식으로 무너졌는지.

지휘를 맡고 있던 귀족과 기사들이 평민들로 이루어진 병사들의 반발에 허물어졌고 결국 그리도 견고하게 보이던 남부 방어선은 안에서부터 무너져 내렸다.

자신이 뛰어난 지휘관이라고는 여기지 않지만, 최소한 사람은 좋다고 홀은 생각했다.

그렇기에 자신이 귀족의 핏줄임에도 기사들은 물론이고 병사들도 아직까지 그를 믿고 따라주고 있다.

하지만 그게 다른 곳의 다른 귀족들까지 그러할 것이라고는, 예상이 가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을 거라고 여겨졌다.

“이미 키엔마이어 후작도 새로운 왕 앞에 무릎을 꿇었어. 나 역시 그렇고, 왕국의 진짜 귀족들은 다 그렇게 했지.”

“마왕이 그렇게도 좋은 분이라는 거요? 마족은 왕국을 침략한 자들이오!”

“마족들에게 빼앗긴 것보다 귀족들에게 빼앗긴 게 더 많은 지금의 왕국민들은, 그 말에 동의하지 못 할 거야. 홀.”

그 말에 홀 라텐은 으득, 이를 악물었다.

분하지만 저게 맞는 말이다. 왕국은 이미 썩을 대로 썩어 문드러진 상태다.

겉으로는 제법 단단해 보였을지 몰라도 안은 이미 곯아서 허물어지기 직전이다.

변화가 필요하다. 아니, 새로운 세상이 필요하다.

이 빌어먹을 고리를 끊어줄 존재가 너무나도 간절하다고 할 수 있었다.

“문 열어, 홀 라텐.”

“….”

“네 상관으로서 명령하는 거다. ‘말’ 로 할 때 문 열어. 내가 말과 함께 다른 뭔가를 하게 만들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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