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0화 〉 27장 - 분열하고, 갈라져라
자신에게 이전 전투의 영감을 준 전대미문의 명장은 결국 전쟁에서 패배했다.
본인은 최고의 전략으로 최소한의 병력으로서 최대한의 피해를 적에게 입혔다.
하지만 자국의 계속되는 삽질과 반대로 포기하지 않는 적국, 그리고 그 동맹 세력들.
결정적으로 자신의 모국과 거점이 모조리 공격당하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클라우스는 바로 그 부분을 경계하며 동부의 마족들이 그 나라와 같은 전처를 밟지 않도록 율리아를 통해서 최고의 상황을 유지하려고 했다.
후방을 유린하는 동시에 전선을 유지하여 잘 버텨주고, 적을 안에서부터 무너트린다.
왕국이라고 하지만 결국 귀족들로 가득한 곳이니 조금만 칼을 쑤셔 넣어도 금이 가기 마련.
“조금이라도 다쳐서 돌아온다면 다시는 못 나가게 할 거예요.”
자신도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율리아였지만 절대 불가한 일이었다.
정규전도 아니고 단신으로 성에 침투하여 걸리적거리는 놈들을 치워내고, 이후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된 자들을 항복시키는 작업이다.
왕은 그런 일에 나설 필요가 없다, 위엄 돋게 앉아 항복하는 자들을 맞이하면 그만이다.
이것은 왕의 신하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그것도 전면에 나서는 신하가 아니라, 왕의 뒤에서 조용히 움직일 자들이 말이다.
“카엘라, 세실리. 너희는 병사들을 추스르면서 마왕 전하를 보필하도록. 다른 의견은 받지 않는다. 이번 일은 나 혼자, 은밀하게 행할 거다.”
“사령… 아니, 클라우스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따르겠습니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게요. 되도록 일찍 돌아오시고요. 마왕님은 저희 둘로서는 벅차서.”
세실리의 말에 클라우스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임신 초기에 나타나는 증상이 여럿 있다는데, 율리아는 이때에 곁에 클라우스가 없으면 쉽게 짜증을 내고 초조해하는 기색을 조금 보이곤 했다.
분리불안증이라던가 의존증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건 다른 여인들에게 해당되는 부분이다.
율리아도 평소에는 전혀 그런 티를 내지 않았는데 이렇게 아이를 가졌을 때는 또 그런 모습을 보인다는 걸 클라우스는 다 알고 있었다.
늦어도 사나흘 안에는 돌아온다는 말과 함께 키엔마이어 후작령을 나선다.
동시에 가볍게 땅을 구르던 클라우스는 스킬을 발동하면서, 그대로 지면을 박찼다.
투웅!-
말을 탄 자들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거기에 어지간한 암살자들보다 더 은밀하기까지.
간만에 제대로 날뛸 생각을 하니 클라우스는 절로 심장이 두근거리는 중이었다.
‘안타깝지만 이렇게 나서는 건 이제 정말 몇 남지 않았군.’
자신이 왜 여전히 동부에서, 마왕성에서 변변한 직함이나 자리도 없이 그저 클라우스님, 이라고 불리고 있겠는가.
클라우스 본인이 원하지 않아서다. 전면에 나서는 걸 은연중에 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얼마든지 나서서 싹 다 정리할 수도 있다지만.
그렇게 하면 결국 이전의 회차들에서 나왔던 실수처럼 너무 과도한 관심을 받게 된다.
본인은 그럴 생각이 없다지만, 그리고 율리아는 자신을 절대 놓아주지 않을 테지만.
나중에 시간이 흐르고 조금이라도 둘의 사이가 소원해지는 것 같다 싶으면 마왕의 권위를 핑계 삼아서 슬그머니 클라우스의 힘을 줄이자는 의견이 나올 것이다.
왕국 귀족들 마냥 제 자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마왕을 위해 투항한 인간 남자의 힘을 줄이자는 것이니 역적들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리고 그런 부분들을 다 떠나서, 클라우스도 이제는 좀 조용히 살고 싶었다.
되도 않는 전쟁 영웅 짓, 혹은 전설의 사령관 연극은 이제 신물이 난다.
뒤에 처박혀서 놀고먹고, 그러다가 자신이 필요할 듯 싶으면 잠깐 나서면 그만인 삶.
여태까지 고생 중에서도 아주 개고생만 죽어라 한 자신인데 이제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마지막으로 다른 녀석들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해야 할 필요도 있고.’
자신만 너무 높이 올라가버리면 되려 불편한 점이 많다.
반대로 본인과 연관이 있는, 접점이 있는 자들이 각자 큰 공을 세우고 그로 인해 요직에 있다고 생각하면 그보다 더 좋은 일도 없다.
슛! 슈슛!- 타타탓!!-
키엔마이어 후작령이 위치한 곳에서 남부의 요새들이 집중 배치되어 있는 곳까지.
한나절은 말을 달려야 닿을 수 있는 거리를, 클라우스는 반나절 만에 돌파했다.
아무리 스킬이 최고라고 하지만 이 정도로 내달렸으면 당연히 지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클라우스는 잠시 숨 돌릴 시간도 없이 오히려 더 속도를 냈다.
마침내 요새 중 하나를 목전에 두자 클라우스는 달리던 속도 그대로 껑충껑충 뛰어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허공을 박차고 올라 가볍게 성벽 위에 올라섰다.
“고생들 하네.”
그 성벽 위에서 경계 근무를 서고 있던 두 청년들에게 인사를 한 후.
수고하라는 말을 남겨두고서 다시금 요새 안으로 뛰어든다.
마침 어둠이 깔린 시점이라 별 큰 어려움 없이 어둠 안으로 스며든 클라우스는 그제야 후우, 하고 숨을 고르면서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역시 꽤나 지치네. 그냥 말을 타고 올 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
잠깐이나마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곧 클라우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말을 타면 기척을 최대한 줄이는 스킬들을 전부 사용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자신만의 기척을 지워주는 것이지 다른 이들에까지 영향을 주지는 못 하니까.
한 번 더 숨을 고른 클라우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어딘가로 향했다.
원래라면 이곳 요새 내부의 지리라던가 길을 파악하는 것이 먼저이겠지만.
이미 이전 회차들에서 몇 번이나 오고갔던 요새이기에 그럴 필요도 없었다.
어디서 어떤 길로 가고 어느 계단을 올라야 단숨에 이곳 요새를 맡고 있는 머저리 귀족한테로 직행할 수 있는지 죄다 꿰차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무너질 왕국이긴 하다. 하지만 아무 것도 안 하고 손을 놓고 있으면 아무리 짧아도 한 달은 더 걸려. 기다리는 것도 싫지만, 더 큰 문제는….’
더 큰 문제는 바로 수인과 요정들이다.
제국이야 껍데기만 남은, 영양가 하나도 없는 말라비틀어진 것에 불과하다.
진짜 제대로 된 먹잇감은 수인들과 요정들의 영토였는데, 왕국의 여러 머저리들과는 다르게 그들은 그래도 꽤나 많은 준비를 해왔다.
지금의 왕국처럼 내부를 분열시키려고 해도 쉽지 않다.
그나마 요정 쪽에서는 나타샤가 제 할 일을 제대로 해주고 있는 모양이지만, 결국 그것도 요정 사회에서 벨라루스가 떨어져나온 것이지 그들 자체가 조각조각 나뉜 건 절대 아니다.
그런 이유로 율리아가 벨라루스에 자비를 보이면서 또 다른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너희 요정들 중 어느 누구라도 내게 호의를 보인다면 벨라루스가 받는 것만큼의 대우는 확실하게 보장하겠다고 말이다.
‘물론 잘 들어먹지 않지.’
요정도 요정이지만, 수인들도 문제다.
특히 수인 쪽에는 이렇다 할 선이 없었는데 정확하게 누구 하나를 포섭하기가 너무 힘들었던 것이 그 이유였다.
수인들 중에서는 카엘라가 가장 나은 편인데 충성심이 너무 강하고.
다른 수인들은 그럭저럭 쓸 만하다지만 또 본인의 성에 전혀 차지 않고.
무엇보다 수인들은 압도적인 힘으로 한 번 찍어 누르고 서열 정리를 해줄 필요가 있다.
그걸 클라우스가 해서는 안 된다, 대륙을 통일할 마왕이 직접 해야지.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수인들과 접점을 만들어두지 않은 것이었다.
‘그놈들이 준비를할 시간을 주면 굉장히 피곤해진다. 벨라루스가 위험하기도 하고, 율리아의 출산 시기와도 겹칠 수가 있어. 그 전에 끝내려면 내가 움직이는 게 확실해.’
페르디난트나 에슐리 같이 미래의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세워야 할 공을 빼앗는 것.
해서 마음이 아주 조금은 편치 않았지만 그들도 이해해 줄 것이다.
적들에게 시간을 내주지 않기 위함인데 설마 이 정도로 마음이 상할까.
“꺼읍!”
가는 길 중간, 중간에 배치되어 있는 기사들은 죄다 그 자리에서 참살한다.
굳이 죽이고 갈 필요도 없고 일을 다 끝내고 돌아갈 때까지도 눈치를 채지 못 할 테지만.
이곳에 있는 병사들이 조금 더 편하게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빠르게 치워내는 편이 좋았다.
그렇게 순식간에 요새의 지휘관이 머무르고 있는 곳까지 당도한 클라우스는 마치 이 방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안으로 들어섰다.
“노크도 안 하고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허어억!!”
“오랜만이네. 필베르.”
이곳 요새의 현 지휘관은 필베르라 불리는 중년 남성 귀족.
과거 클라우스가 왕국의 남부 사령관 자리에 있던 시절.
그를 시기하여 온갖 거짓 음해와 모함을 퍼부어 결국 그를 밀어내는 것에 성공했던 귀족.
무능한 자들과는 다르게 꽤나 괜찮은 재능을 지니고 있기도 한 귀족이긴 했지만.
그 재능에 비해서 성깔이 너무 고약했던지라 한계가 명확했던 인물이었다.
“그래, 예전에 나를 밀어내고 한 자리 제대로 차지했다더니 결국 그 고약한 심보 때문에 다시금 밀려나서 이곳 요새 지휘관까지 떨어지셨군.”
“네, 네놈이 도대체 어떻게! 아무도 없느냐! 여기 극악무도한 반역자가 들어왔다! 뭣들 하느냐! 어서 이놈을 포박하란 말이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허둥지둥 제 검을 찾는 필베르.
하지만 그 전에 클라우스가 한 마리 범처럼 날아들어서는 그대로 그를 제압했다.
쿠당탕!!-
“끄악!”
필베르가 바닥에 엎어져서 그대로 얼굴을 처박은 채 낑낑거린다.
볼썽사납게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상당히 우스웠기에 클라우스는 손아귀에 슬쩍 힘을 주었다.
그러자 필베르는 더욱 괴로운 비명을 내지르면서 퍼덕거리기 시작했다.
“끄으으읍!!”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 하는 자들이 꼭 남들 시키는 건 빠르더군.”
“끄윽! 이, 이 빌어먹을 배신자 새끼!”
“배신자. 그걸 네놈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1차 대륙 전쟁 시절에 패전해서 처벌 받을 날만 기다리던 너를 수습하여 공이라도 세우라고 써먹어줬는데. 내 명령만 따라서 싸운 주제에 입은 또 대단한 놈이라서 온갖 헛소리를 하고 다녔었지. 덕분에 나는 내 자리를 잃었고, 사령관을 잃은 남부군의 거의 대부분이 몰살당했었다. 그러면 과연 네놈은 배신자가 아닐까?”
“닥치라고 했다! 나, 나는 최소한 마족들에게 빌붙어서 복수를 하겠다고… 끄헉!”
으직-.
필베르의 머리통을 그대로 거세게 짓밟는 클라우스.
슬쩍 몸을 숙여서 마리 한 마리의 벌레마냥 꿈틀거리고 있는 귀족을 향해 이죽거린다.
“그래. 역시 그렇게 나와야 아무런 죄책감 없이 일을 마무리할 수 있지. 솔직히 처음에는 걱정이 좀 들었기도 했어. 만에 하나 너희들이 내게 사과를 한다면, 죽을죄를 지었다고 용서라도 해달라고 빈다면 과연 어찌 해야 하나.”
“크읏… 헛소리 하지 마라! 내, 내가 왜 잘못을 빈다는 거냐!”
어쩜 이리 한결 같은지, 그 비결이라도 좀 묻고 싶다.
그 일관된 마음을 욕심이 아니라 충성심으로 했다면 그래도 회유 한 번은 해볼까 고민이라는 것을 좀 해봤을 텐데.
참으로 고맙게도 끝까지 제 잘못은 없다고 지껄이는 놈이었다.
“네놈 덕분에 전장의 귀신이 되어 떠도는 수천의 영혼들이 있을 거다. 가서 사죄하고 있어. 머지않아서 나와 내 병사들을 고생하게 만들었던 년놈들, 전부 다 보내줄 테니까.”
꾸우욱-.
점점 더 힘이 들어가는 클라우스의 발아래에서 필베르가 허둥거린다.
바닥은 차가운 화강암이고, 위에서는 전쟁 영웅의 우악스러운 발이 당장이라도 제 머리를 짓뭉갤 듯 강하게 압박해오고 있다.
클라우스가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 알아차린 필베는 소스라치게 놀라서는 입을 열었다.
“으으! 도으대채 기사노드은 어이서 므어하는…!”
“그래. 그렇게 끝까지 벌레 새끼처럼 꿈틀거리다가 죽어. 그게 그 날, 네놈이 날 모함한 덕분에 죽어나간 병사들에게 바치는 적당한 술 한 잔이 되겠어.”
꾸우욱…. 우지지직!!-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사방으로 뭔가가 뿜어져나갔다.
말 그대로 머리통이 짓뭉개진 시체가 되어버린 귀족 남성.
클라우스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낄낄거리다가 다음 요새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아직 시간은 남았고, 손봐줄 귀족들은 차고도 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