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9화 〉 27장 - 분열하고, 갈라져라
“키엔마이어 후작이 어떻게, 어떻게 항복을 한단 말이야! 그래도 명색이 대륙 전쟁에서 나름 전공까지 거둔 귀족이란 작자가 어떻게 왕국과 귀족의 명예를 버리고!”
요제프 대공은 있는 힘껏 테이블을 후려치면서 고성을 내질렀다.
얼마나 세게 내리친 것인지 나무 테이블이 쩍 갈라지고 거기에서 튄 파편으로 대공의 손에서 피가 흐를 정도였다.
기사들이 다급히 그를 챙기려 했지만 워낙 분위기가 흉흉해서 함부로 다가갈 수도 없었다.
눈에서 시퍼런 살기가 번뜩이는 것이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죽여 없애겠다는 느낌을 가득 내어주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일은 상정하지 못 했다.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 했어! 그 거대한 대삼림을 돌파하는 것부터 그 부근의 요정들과 요새들을 한 번에 제압한 것, 마치 이전부터 전부 꿰고 있었다는 듯 보급로를 모조리 털어먹은 것, 마지막으로 수인 측과 요정의 연합군까지 일격에 완전히 괴멸시켜버린 것까지! 조금도 예상을 할 수 없었던 일이란 말이다!!’
동부의 마족들에 대한 경계, 그리고 그들에게로 넘어간 클라우스에 대한 경계.
모두가 이 이상 할 수 없다고 자신할 정도로 최선을 다해 준비를 마쳤다.
남부 지역들에 있는 버려진 요새들까지 수리하여 병사들을 배치했고 왕국으로 들어오는 중앙 부분에는 일부러 뒤로 물러서주면서 적들의 보급로가 길어지게 만들었다.
분명 마족들은 이전에 실패한 남부 공략을 다시 한 번 하려고 할 것이다.
왕국의 밥줄이니만큼 빼앗기만 한다면 마족들이 이용할 수 있는 거대한 식량 창고와 같은 곳.
심지어 그곳을 지키던 클라우스와 몇몇 배신자들까지 마족들한테 붙어먹었으니 분명 남부를 노리고서 달려들 것이라고 요제프 대공은 확신했다.
‘남부만 막는다면, 그래서 클라우스 그 자식의 전승 행진만 막는다면 평민들의 미련하기 짝이 없는 믿음도 전부 되돌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영웅이라 여겼던 자의 민낯을 보는 것만큼 확실하게 실망하는 일도 없으니까! 그런데, 그런데… 이런 빌어먹을!’
1차 대륙 전쟁에서 서부도, 동부도 대삼림을 돌파한다거나 막는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미쳤다고 그곳을 돌파하다가 비전투 손실이 최소한 수백에서 수천까지 나올 수 있는데 어느 누가 그곳을 전략적으로 이용하겠냐고 생각해서, 그게 이유였다.
아주 오래 전에 요정 측이 마족들에게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기 위해 그 대삼림을 돌파해서 동부로 넘어갈 계획까지 세운 적이 있기는 했었다.
요정들 하면 숲을 오고가는 부분에 있어서 가장 정확하고 뛰어난 종족이니까.
그들 딴에는 대삼림을 돌파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해서 동부는 여전히 모르고 있다, 왜냐고? 대삼림을 돌파하지도 못 하고 대실패로 일이 끝나버렸으니까.
숲 같이 갇힌 곳에서 방향을 알기 위해서는 하늘의 움직임, 그리고 해와 별이 꼭 필요하다.
하지만 대삼림은 대낮에조차 햇빛의 거의 들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곳이다.
그 안에 종도 정확히 알 수 없는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며 길이라고는 전혀 찾을 수 없다.
또한 그 넓이가 엄청나기에 무기에 식량까지 짊어지고 가야 하는 입장에서는 피곤할 수밖에 없으며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전혀 알 길이 없다.
결국 요정들조차 대삼림 돌파를 포기하고 그냥 자연 방벽으로 두는 것에 만족해야 했는데.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것인지 마왕과 클라우스는 그걸 단번에 돌파해버렸다.
심지어 숲과 같은 좁은 곳에 들어가면 말 그대로 짐덩이가 된다는 기병들을 인솔해서!
“대공. 또 다른 보급대와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요정과 수인 연합 측에서 한동안 지원을 보낼 수 없을 것 같다고 합니다. 피해가 너무 커서 현재 정확하게 그 규모가 산출되고 있지도 않다고 전해왔습니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건 오직 최악의 소식들뿐이었다.
패전, 패전, 그리고 패전. 그게 아니면 전멸, 전멸, 그리고 전멸.
그나마 조금 다행인 부분을 굳이 말해보자면 항복하지 않고 후퇴에 성공한 이들이 간신히 돌아와서는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지 전하는 것 정도였다.
“키엔마이어 후작령과 그 일대의 귀족들이 전부 항복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외에도 왕국 각지에서 평민들이 조금씩 오고 있다는데 보통 자들이 아닙니다. 저번 전쟁에서 클라우스와 함께 활약하던 병사들이라고 합니다.”
“그 빌어먹을 것들이 은혜도 모르고 왕국의 배신자에게 붙어먹었단 말인가.”
으득!-
이를 갈면서 요제프 대공은 다급히 왕국 지도를 확인했다.
후방은 이미 완전히 휩쓸렸고 중요한 지역 중 하나인 왕국 중부의 일부 부분이 넘어갔다.
나름 커다란 세력을 지니고 있던 키엔마이어 후작과 그 인근의 귀족들과 함께 말이다.
더 큰 문제는 이제 왕국은 그 어떤 지원도 기대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여태 자신이 짜둔 지구전 전법이 그야말로 완벽하게 파토가 난 셈이었다.
보급도 불가능하고 지원도 없다면 제아무리 백 개의 요새라고 해도 하루를 버티지 못 한다.
희망이 있다면 극악의 상황에서도 1년이고 10년이고 버티는 게 사람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 어떤 희망도 없고 기대도 할 수 없다면.
최강의 요새라고 해도 하루를 버티기 힘든 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마왕이 연합군을 박살낸 이후 특별히 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들 역시 만만치 않게 피해를 봤을 테지.’
그야말로 수만이 뒤얽혀 싸운 대접전이라고 했다.
그런 수준의 전투라면 아무리 승리를 했다고 해도 결국 피해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요제프 대공은 비록 수인과 요정들이 패하기는 했지만 적들에게 한동안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충격을 주었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적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면, 조금 더 버티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수인들과 요정들도 패배를 당했으니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2차 원정군을 파견할 것이 자명한 상황.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피해를 입고 잠시 추스르고 있는 것 같은 마왕의 군대와.
국경을 넘어서서 한창 요새들을 두드리고 있는 동부군이 합쳐지는 것을 막는 거다.
왕국 곳곳이 흔들리고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과거의 경험이란 무서운 것이다.
대륙 전쟁 시기에 마족들로 인해 부모형제, 자매와 친척, 그리고 친구를 잃은 자가 몇인가.
평민들이 딱히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 가지 좋은 부분이 있다면.
그들이 퍽 감성적이고 중요한 순간에조차 그것으로 인해 일을 그르친다는 부분이다.
때문에 요제프 대공은 아직 희망이 있다고 판단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서신들을 각 방어선에 보내야만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힘들겠지만, 외롭겠지만 조금만 더 버텨라.
이제 이 전쟁은 누가 죽고 죽이는 게 아니라 누가 먼저 지쳐 쓰러지냐의 싸움이다.
너희들이 고단하고 외로운 만큼 우리 뒤에 갇힌 적들 또한 그러하다.
수인들과 요정들은 절대 왕국을 포기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전장을 여기로 제한하고 싶을 것이고 만에 하나 왕국이 넘어가면 거대한 곡창 지대가 마족들한테 넘어가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이를 악물고, 모두 죽는 한이 있더라도, 무조건 버텨라.’
그런 내용을 적은 서신들을, 요제프 대공은 전령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만일을 대비해서 한 곳에 한 명이 아니라, 여럿을 각기 다른 시간대에 보내기까지 하면서 최후의 최후까지 버틸 것을 종용했다.
어차피 이쪽이 결사항전을 마음먹으면 마왕만 골치가 아플 뿐이다.
공성전을 하자니 마왕의 병력은 거의 대부분이 기병이라고 했다.
허면 남은 건 키엔마이어의 병사들, 아니면 클라우스를 따르는 병사들인데.
아무리 항복을 했다고는 하나 자신들과 똑같은 왕국민들이 사는 곳을 무너트리고 안으로 쳐들어가는 공성전을 치르게 하기에는 여러모로 문제가 많을 거다.
두두두두!!-
성문이 열리고 곧 외로운 전투를 벌이고 있는 각지의 요새들도 전령들이 날려나간다.
그리고 그 모습을, 아까부터 한 여인이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가 그 중 몇몇 전령들의 뒤를 재빠르게 따라잡기 시작했다.
샷! 샤샷!! 슈슈슛!!-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전령이 말을 달리는 속도와 거의 맞먹을 정도였다.
더해서 분명 전령 바로 옆까지 다가가고 있음에도, 말에 타고 있는 전령은 조금도 기척을 느끼지 못 한 채 그저 박차만 가하고 있는 중이었다.
미소를 지은 은발의 여인은 유려한 동작으로 말 등 위에 올라탔다.
그제야 자신 이외에 또 다른 누군가가 말에 올라탔음을 자각한 전령이 급히 뒤를 돌아보려고 했으나 이미 그 전에 여인의 손에 들려있던 단검이 번쩍 하고 빛을 발했다.
“끄륵!”
목에서 피를 뿜어내며 경련을 일으키다가 곧 축 늘어지는 전령.
할 일을 마친 여인은 이제는 시체가 되어버린 것을 행여 말에서 놓칠까 꼭 붙잡은 채로 계속 말을 달렸다.
그리고 강가에 이르자 마치 쓰레기를 버리듯 전령의 시체를 거칠게 내던졌다.
“이걸로 하나.”
나긋한 어조로 속삭인 플랑슈는 잠시 제가 타고 있던 말을 내려다보았다.
이 말이 요새들까지 달려가서 소식을 전할 일은 없다.
하지만 모든 흔적을 깔끔하게 지우기 위해서는, 그 어떤 흔적도 남겨두지 않기 위해서는 조금은 마음에 걸리는 부분마저 전부 치워내야만 했다.
“미안, 어쩔 수가 없네.”
* * * * * * * * * *
남부에서 요새가 하나씩, 하나씩 차례대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거센 공격을 받았고, 결국 그 공세를 버티지 못 하여 그런 것이라면 좋겠지만.
초반 요새가 넘어간 것 외에는 전부가 내부에서부터 일어난 분열로 무너진 것이었다.
보급은 점점 줄어들고, 앞에는 여전히 동부의 군세가 꽉 들어차있다.
심지어 과도한 공격을 퍼부어서 정신이 없도록 하는 것도 아니다.
진득하게 달라붙어서 숨도 쉬지 못 하도록 압박을 하면서도 그 이상으로 나서지 않는다.
그 압박감과 긴장감이 요새 안의 모든 이들을 지치고 피곤하게 만들었다.
큰 전투는 얼마 없음에도 절로 몸에서 힘이 쭉 빠지고, 그냥 어떻게든 살고 싶다는 생각만이 간절해지는 시기였던 것이다.
“어이, 존. 소문 들었어? 오귀스탠 요새가 넘어갔다고 하던데.”
“정말이야? 아니, 오귀스탠 요새는 쉽사리 함락될 곳이 아니었잖아!”
“그렇지. 나도 그렇게 알고 있어. 그런데 전해진 소식에 따르면 마족들의 공격에 무너진 게 아니라 그냥 성문이 열렸다고 하더라고.”
기사들의 눈을 피해서 속닥거리고 있던 병사들.
얼굴을 보아하니 아직 앳된 부분이 남아있는 게 아무래도 이제 막 성인이 된 이들인 모양.
원래라면 이제 슬슬 세상에 대해서 알아갈 청년들이 약간은 커 보이는 투구와 갑옷을 입고 있는 게 퍽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잡담들 하지 말고 똑바로 경계들 서라. 전시에 경계 업무를 소홀히 하는 건 참형에 처해져도 할 말이 없는 것이야!”
결국 기사 중 하나가 으르렁거리면서 살벌한 경고를 내려준다.
그에 두 청년 병사는 눈치를 살피면서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그들에게는 세상 무엇보다 귀족, 그리고 그들 밑에 있는 기사들이 무서웠으니까.
마족들이 악마 그 자체라고 하지만 제대로 본 적도 없고, 오히려 악마라고 하면 바로 저 기사들이 악마이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렇게 대충 이야기를 멈추고 다시 경계 업무에 들어가는 찰나.
“고생들 하네.”
“아, 예. 감사합니다.”
“수고해.”
그렇게 말하며, 한 남자가 갑자기 성벽 위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야, 존. 방금 누구였어?”
“어? 기사님 아니었어?”
“아니잖아. 방금 그 남자 기사 복장도 아니고….”
“그, 그랬나? 그럼 내가 본 건 뭔데?”
두 청년은 서로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